살인의 기억 181화
15. 기묘한 시신(3)
사건 현장인 연건동 오피스텔 2208호.
나는 최영현을 비롯한 강력3반 형사들과 함께 폴리스 라인으로 봉쇄된 현관문 앞에서 발싸개와 장갑, 마스크를 착용했다.
눈치 빠른 막내 형사가 재빨리 자기 장비를 착용 후 폴리스라인을 걷고 있는 것이 보인다. 문이 열리고 오피스텔 안쪽이 보인다.
욕실 사진을 보았을 때 느꼈지만 이곳은 신축 건물인 듯하다. 인테리어도 요즘 트렌드가 반영된 곳이다.
현관문을 열면 멀리 거실이 보이는 복도가 있다.
신발장 왼편에 바로 문 하나가 보인다. 열려 있는 문을 통해 안쪽을 보니 세탁실로 사용하는 아주 작은 방이 보인다. 작은 방 너머에 베란다도 있다.
나는 문 앞에 서서 안쪽을 자세히 보았다. 방이 한 개가 아니다. 복도에서 왼쪽으로 틀면 짧은 복도가 또 나오는데 왼쪽에 세탁실과 베란다가 있고 직진을 하면 또 작은 방 하나가 더 나온다.
최영현이 그곳을 바라보는 내게 말했다.
“남편이 서재로 사용하던 곳인데, 사실 놀이방 같은 곳으로 보입니다.”
“뭐가 있습니까?”
“직접 보시죠.”
짧은 복도를 건너 작은방에 도착하자, 책상과 책들이 보인다. 의사답게 책꽂이에 있는 책들은 의학 도서들이 있다. 하지만 직업에 어울리지 않는 책들이 더 많이 보인다.
나는 책장을 유심히 보다 눈짓했다.
“이거 판타지 소설 아닙니까?”
“예, 만화책도 꽤 있습니다.”
이상하다. 물론 의사라고 장르문학을 보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서재에 꽂힌 책은 약 삼백여 권. 그중 의학서적으로 보이는 책은 서른 권 남짓이다.
나머지는 모두 만화책과 판타지 소설이다. 일반인의 방이라면 이상할 거리가 안 된다. 집에 자기가 좋아하는 책이 꽂혀 있는 건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으니까.
하지만 상대는 의사다. 의사 집단은 수술을 집도할 때, 논문을 쓸 때를 대비해 끝없이 공부하는 집단이다.
직업이 이렇다 보니 참고인이나 용의자로 의사의 집을 방문할 때가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어떤 의사도 이렇게 극단적인 비율로 업무 외적인 도서를 보관하진 않았었다.
최영현이 꺼져 있는 컴퓨터를 눈짓한다.
“KCSI가 하드를 떼어 가 분석했는데, PC 저장장치에 97개의 게임이 설치되어 있었고, 47,413개의 판타지 소설 파일이 있었습니다.”
나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 혹시 잘못 들었나 해서였다.
“사만 칠천 개요?”
“예. 게임이야 그렇다 치고 판타지 소설 숫자는 황당하게 많군요.”
판타지 소설은 보통 장르 플랫폼에서 연재된다. 즉, 파일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은 불법 다운로드 했다는 뜻.
파일 한 개가 한 편이라고 가정했을 때 소설 한 질이 평균 300편이라고 생각한다면, 158질 이상의 판타지 소설을 불법 다운로드 했다는 말이 된다.
물론 지금 우린 저작권법을 단속 나온 게 아니니, 그리 중요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지만 용의자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해야 한다.
“게임은 주로 어떤 장르였습니까?”
최영현이 검지로 머리를 긁으며 계면쩍게 말했다.
“제가 게임을 워낙 몰라서.”
그때 막내 형사가 슬쩍 나서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부분 FPS류였습니다.”
최영현이 막내 형사를 보며 물었다.
“FPS가 뭐냐?”
“총이요, 총.”
“총싸움하는 거?”
“예, 주로 외국 플랫폼에서 유료로 다운로드받아 이용하는 게임들이었는데 전쟁게임이 아니라 대부분 괴물이 나오거나, 좀비가 나오는 게임이었습니다.”
“좀비 쏴 죽이는 게임이라고?”
“예, 꼭 쏴 죽이는 건 아니고 게임 내에서 얻은 톱이나 칼, 몽둥이 같은 것도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헐…… 살인마 게임이냐?”
사람들은 자극적인 것을 좋아한다. 평소에는 절대 겪을 수 없는 일에서 스릴을 찾는다. 그것은 결코 나쁘다 할 수 없다.
하지만 하나의 장르를 극단적으로 파고들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극단적인 사랑은 집착을 낳고, 집착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비교적 이쪽을 잘 알고 있는 듯한 막내 형사에게 물었다.
“판타지 소설은 어떤 장르였습니까?”
“주로 던전 헌터 관련된 소설이었습니다.”
“던전? 헌터는 뭡니까?”
“그게, 뭐 갑자기 세상에 구멍이 뻥뻥 뚫리며 다른 세상에서 온 몬스터가 있는 게이트가 열리고, 특수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나 게이트로 들어가 몬스터를 소탕한다는 뭐 그런 내용입니다.”
음, 그런 생각도 할 수 있군. 최영현이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물었다.
“몬스터 사냥하는 걸 아주 생동감 있게 쓰는 거냐? 재미 포인트가 뭐야?”
막내 형사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음…… 그러니까 일단 헌터들은 강하고…… 평범한 사람들과 다른 대우를 받습니다. 게이트에서 몬스터를 잡고 나온 부산물들을 비싸게 팔아서 아주 잘 먹고 잘 살거든요.”
최영현이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서?”
“그 안에서 또 성격 나쁜 헌터가 나오고, 주인공과 싸우다 걸레 되도록 처맞고…… 뭐, 사이다 퍼붓는 그런 소설이죠.”
“하? 그런 거 인기 많아?”
“예, 장르 문학 쪽에서 아주 인기 많아요. 몇 년 전부터.”
“이해가 안 가네…… 나 때는 소설들이 조금만 현실과 동떨어져도 팬들이 난리 났었는데.”
“지금도 그래요, 팀장님.”
“뭐가 지금도 그래?”
“현대 판타지라고. 현대가 배경이고 전문직 종사자가 주인공인 소설들은 현실감 떨어지면 욕을 먹죠.”
“아니, 하늘에 빵꾸가 나서 몬스터 쏟아지는 소설 보던 사람들이 현실성 떨어진다고 뭐라고 한다고?”
“장르가 다르니까.”
장르문학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최영현은 정말 이해 안 된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사실 장르문학이 얼마나 인기 있는지. 왜 인기 있는지 따위는 전혀 궁금하지 않다. 지금 중요한 것은 남편의 성향이다.
나는 소모성 대화가 길어지는 것을 느끼고 끼어들었다.
“모든 소설이 그랬습니까?”
“네.”
“방금 말씀하신 현대판타지 소설은 어때요? 하드에 그런 것도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던전이나 헌터 물도 일종의 현대판타지라.”
“주인공 직업을 말하는 겁니다. 꼭 싸움질하는 주인공이 나오는 것만 봅니까?”
“예, 전부 그랬습니다.”
음, 그는 총, 칼, 톱으로 사람이나 괴물을 패 죽이는 게임을 자주 한다. 소설 취향도 지극히 폭력적인 것들만 골라서 본다.
물론 문화생활의 취향으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범죄 스릴러 드라마를 본다고 살인자가 되는 건 아니니까.
최영현이 목을 어루만지며 얼굴을 찡그린다.
“내가 살다 살다 이런 의사는 처음 봅니다. 영상 검색 기록을 봤더니 검색기록에 ‘스너프 필름’이란 검색어도 있었답니다.”
나는 눈을 찌푸리며 최영현을 보았다.
“스너프요?”
“예, 그런 거 보는 의사 보셨습니까? 하여간 취향 참 독특해요.”
스너프 필름(snuff film). 어떤 사람이 실제로 살해되거나 자살하는 것을 촬영하는 영상이다. 그런 것을 보려고 하는 사람 중에 제대로 된 인간은 없다.
“혹시 하드에서 영상물 나온 거 있습니까?”
최영현이 고개를 저었다.
“한국에서 그런 거 못 구하죠. 있을 리가. 그냥 검색 기록에만 있었습니다.”
“음.”
다행이라고 해야 되나? 나는 책과 PC만 있는 서재를 지그시 바라보다 말했다.
“방에서 조사해야 될 건 다 한 거죠?”
최영현이 책이 가득한 책장을 툭툭 치며 말했다.
“여기 꽂힌 책들 사이사이 다 봤습니다. 덕분에 우리 애들 죽을 똥 쌌죠. 하드에서 나온 증거 말고는 없습니다.”
“그럼 이동하죠.”
나는 다시 긴 복도로 나와 거실로 향했다. 복도에서 정면으로 큰 창문이 있고, 소파와 TV가 있는 거실장이 보인다.
복도를 빠져나와 완전히 거실로 들어온 후에 우측 뒤로 거실과 연결된 주방이 있다. 거실 왼편으로 안방으로 보이는 넓은 방이 보인다.
나는 먼저 거실을 살폈다.
거실장의 높이는 1미터 30㎝가 넘는다. 일반 가정집의 거실장 높이는 50㎝ 이하.
저렇게 높은 거실장을 사용하는 이유는 한 가지다. 바로 이 집주인이 거실의 TV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다는 뜻.
TV가 낮게 설치되어 있으면 장시간 시청 시 목이 아플 수 있다. 소파에 앉았을 때 눈높이보다 약간 위에 TV가 있어야 장시간 시청을 해도 덜 피로하다.
나는 소파를 물끄러미 보았다. 회색 소파에 인도나 네팔풍의 에스닉한 천 씌우개가 덮여 있다. 남성의 솜씨로 보이진 않고 사망한 아내의 센스인 모양이다.
소파 옆의 작은 테이블엔 투명한 유리병에 노란 조화 두 송이가 물에 담겨 있다.
전체적으로 매우 깨끗하다. 급하게 치운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 거실장의 아래 공간에도 같은 색의 바구니들이 꽉 차게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아내의 성격이 모든 것을 깔끔하게 정리해 눈에 보이는 지저분한 것이 없어야 하는 성격인 것으로 보인다.
그 성향은 주방에도 잘 드러나 있다. 주방기구의 용도에 따라 분류해 가지런히 꽂아둔 도구들이 보인다.
싱크대 문을 열자, 문에 부착되어 있는 칼꽂이에 여섯 개의 구멍이 보인다. 칼은 KCSI가 모두 회수해 성분을 분석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바닥을 살피며 물었다.
“여기 원래 이렇게 깨끗했습니까?”
최영현이 바닥을 힐끔 보며 말했다.
“예, 저도 좀 석연치 않아서 KCSI 대원들에게 물었는데 올 때부터 그런 상태였답니다. 물기가 하나도 없었다는 걸 봐서 평소에도 이렇게 사는 모양입니다. 집 전체에서 증거 채취를 해봤는데 모발이 딱 두 점 나왔습니다. 사망자 머리 길이가 60㎝가 넘는데 딱 두 점 말입니다. 얼마나 깨끗하게 살았는지 아시겠죠?”
“두 점은 모두 아내 것입니까?”
“예, 남편 것은 안 나왔습니다. 남편 말로는 아내는 평소에 자기가 출근하면 오전에 꼭 집 전체를 청소했다고 합니다. 남편이 퇴근 후에 아내를 발견하고 신고한 것이니 모발이 안 나올 수 있겠죠.”
“장모가 같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예.”
“장모 증언도 일치합니까?”
최영현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최영현은 노련하고 경험 많은 형사다. 남편 말만 듣고 수사해야 할 부분을 놓칠 사람이 아니다.
최영현이 말했다.
“장모 말로는 그것 때문에 남편이 스트레스를 좀 받았다고 합니다. 딸이 결혼 전부터 워낙 깨끗하게 살던 사람인데, 그런 사람은 보통 다른 이에게도 청결을 강요하니까요.”
“다툼이 잦았다고 합니까?”
“보통 부부들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뭐, 안 싸우고 사는 부부가 있겠습니까?”
“주변 소음 신고도 없었습니까?”
“예, 층간 소음으로 다툼이 발생한 적도 없고, 주변 이웃들 탐문 결과 싸우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음, 정말 타인의 침입이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범인은 어떻게 오피스텔 1층 CCTV에 걸리지 않고 22층까지 온 걸까? 나는 가까운 형사에게 물었다.
“건물 CCTV 위치 어떻게 됩니까?”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 순간적으로 긴장한 형사.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답한다.
“오피스텔 입구는 총 세 군데. 정문과 후문, 주차장 입구이며 모두 CCTV가 있습니다. 엘리베이터에도 물론 있고, 복도에도 있습니다.”
“계단은요?”
“1층과 지하 주차장에서 진입하는 계단 입구에 있습니다. 중간 층에는 없습니다.”
2층 이상에서 계단으로 이동했다면 계단 CCTV에는 걸리지 않을 수 있지만 입구에서도 안 걸릴 순 없는 구조다.
“CCTV 전부 확보했죠?”
“예, 반복 확인 중인데 아직 의심점은 없습니다.”
음, 도대체 어떤 사건인 걸까? 최영현이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이제 사망자 시신이 발견된 욕실을 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