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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기억-182화 (181/328)

살인의 기억 182화

15. 기묘한 시신(4)

TV가 있는 벽면 쪽에 있는 안방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아내의 깔끔한 성향이 잔뜩 묻어나는 침실이 보인다.

맨 먼저 보이는 것은 가장 큰 가구인 침대. 일반가정에서도 이런 걸 사용하나 싶은 하얀 침대보와 하얀 이불이 보인다. 꼭 호텔에서 사용하는 이불 같아 보인다.

이불이 개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침대 위에 쭉 펼쳐져 있고, 베개 쪽에 있는 이불의 끝이 밖으로 접혀 있으며 이불 중간에 기다랗고 검은 천이 올려져 있다.

“꼭 호텔 침대 같네요.”

최영현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나 같으면 절대 이렇게 못 살지. 이불을 개고 살긴 해도 이렇게 펼쳐놓고 베개 끝은 접어두고, 중간에 이런 천 쪼가리까지 올리려면 얼마나 귀찮겠습니까? 사망자에게 편집증 증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인에게 실례가 되는 말이지만 그건 나도 동감이다. 이 방 역시 먼지 하나 없다. 침대 옆으로 화장대가 있는데 큰 거울에 손자국 하나 없다. 화장대를 열어보니 화장도구들이 종류별로 가지런히 담겨 있다.

최영현이 서랍 안을 보라는 듯 눈짓한다.

“안에 보면 크기가 다른 상자들이 꽉 차게 들어 있습니다. 도구들을 크기와 용도에 맞게 분류해 사용했던 모양입니다. 어휴, 새삼 내 더러운 서랍장이 그립네. 어떻게 이러고 사나.”

여성들은 참 많은 화장품을 사용한다. 기초만 몇 종류. 색조화장을 하기 위한 도구도 여러가지다. 그런 도구들을 전부 가지런히 정리하기란 쉽지 않다.

보통 안 보이는 서랍에 대충 쑤셔 넣은 후 닫는 것이 보통인데 이 화장대는 꼭 분양을 위해 인테리어를 보여주는 집처럼 잘 정리되어 있다.

화장대의 색은 하얀색이고, 립스틱이나 화장품 분말이 전혀 묻지 않아 새것 같다.

침대 뒤쪽으로 같은 색의 장롱 세 개가 보인다. 천장에 장롱 꼭대기가 닿아 있는 것으로 보아 기성제품을 산 것이 아니라, 집에 맞게 맞춘 가구로 보인다.

화장대 옆에는 핸드백을 놓을 수 있는 높은 진열장이 있었는데 명품 백 두 개가 제일 먼저 눈에 띈다. 백은 총 여섯 개였는데 두 개는 명품. 나머지는 중저가 제품이다.

진열장 맨 꼭대기에 키가 1미터는 되어 보이는 곰 인형이 올라가 있다. 핑크색 티셔츠를 입고 있는 하얀 곰 인형은 이 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듯 빙긋 웃고 있다.

막내 형사가 그 곰 인형의 얼굴을 툭 치며 뭔가 중얼거리는 것이 보였지만 마스크 때문에 무슨 말인지 들리진 않는다.

최영현이 욕실 쪽을 눈짓한다.

“이쪽입니다.”

거실과 분리되어 안방과 연결된 욕실. 거실과는 문으로 나뉘어 있다.

욕실과 거실 사이에 작은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에도 천장에 닿는 크고 하얀 장롱이 설치되어 있다.

장롱 우편으로 욕실 문이 보인다. 문 바로 뒤에 깨끗한 양변기가 있고, 그 옆에 세면대가 있으며, 맨 왼쪽에 욕조가 있다.

욕조에는 아직 조사 중이라 물을 빼지 않은 핏물들이 고여 있다. 피는 금방 응고되지만 물에 섞여 있어 그런지 무거운 핏물이 아래로 가라앉아 물과 분리된 상태다.

나는 물과 분리되어 있는 핏물을 자세히 보며 물었다.

“출혈의 양으로 보아서는 사인이 출혈에 의한 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최영현이 한숨을 쉰다.

“예, 바로 그게 남편 쪽에서 이상자세로 인한 질식사를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KCSI 검사 결과 출혈량은 500㏄ 미만인데, 넘어지며 후두부에 난 상처의 크기로 보았을 때 그 정도 출혈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소견을 냈습니다. 물론 치명상은 아니고.”

사람이 뒤로 넘어지며 피를 500㏄나 흘릴 상처를 입었는데 치명상이 아니라고? 내가 최영현을 돌아보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의 설명이 이어진다.

“KCSI 말이 시신의 두개골에 골절 흔적이 없었고, 피부만 찢어졌답니다.”

음, 그럼 치명상이라고 할 수 없지.

“정신을 잃을 수는 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남편 주장은 화장실에서 청소를 하던 아내가 미끄러지며 욕조로 넘어졌는데 후두부에 강한 충격을 받고 그대로 혼절, 임신부라는 특이점 때문에 만삭의 배를 가진 아내가 이상자세로 장시간 방치되어 질식사했다는 겁니다.”

음, 가능성이 아주 없는 이야기는 아니구나.

“아까 시신 사진을 보니 아내 얼굴에 상처가 있던데.”

“예, 맞습니다. 그래서 싸움을 의심했습니다.”

“남편 손은 검사했습니까?”

“예, 그리고 남편 쪽도 얼굴에 상처가 있었습니다.”

“예?”

이게 무슨 말인가? 남편 얼굴에도 상처가 있었다고?

“무슨 상처입니까?”

최영현이 자기 이마에 ‘ㄴ’ 자를 그린다.

“이런 모양의 상처였습니다. 남편은 응급실에 온 급한 환자를 보러 내려가다 병원 계단에서 넘어졌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내 손톱은 조사했고요?”

“예, 아무것도 안 나왔습니다. KCSI 조사 결과에서도 남편 이마의 상처는 손톱에 할퀸 상처는 아니라는 판단이고. 젠장.”

“그럼 아내 얼굴 상처는 어떻게 난 거죠?”

최영현이 욕조 바로 앞의 벽면을 눈짓한다.

“저기.”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욕실 벽면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보인다. 반대편에도 같은 위치에 구멍이 있다.

“샤워 커튼?”

최영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예, 지금은 KCSI가 수거해 갔는데 현장에 도착했을 때 샤워 커튼이 있었습니다. 아내가 넘어지면서 커튼을 붙잡았던 것 같은데 우리가 현장에 왔을 때는 봉이 뽑혀 있고 커튼은 바닥에 있었습니다. 얼굴 상처는 커튼 봉과 연결 부위에 있는 쇳조각들 때문에 난 거라는 주장이고.”

바닥에? 잠깐. 사람이 넘어지다 커튼을 붙잡았다. 커튼 봉이 떨어질 정도로 강하게 움켜잡으며 욕조로 넘어졌는데 욕조 안이 아니라 밖에 놓여 있었다고?

최영현이 내 의아한 얼굴을 보고 한숨을 쉰다.

“최초 발견자인 장모가 딸이 죽었다는 것에 너무 놀라 시신을 흔들었답니다. 그때 욕조에 반쯤 담겨 있던 커튼을 들어내 바닥에 뒀고.”

하, 살해 현장을 훼손했다고? 경찰 입장에서는 정말 한숨 나오는 상황이지만 유가족 입장도 이해는 된다. 사랑하는 딸이 죽었는데 제정신인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장모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병원에 있습니다.”

“어디 다쳤습니까?”

“아뇨, 제왕절개한 애가 살았다고 했지 않습니까, 손자 돌보러 갔습니다.”

엄마의 죽음 속에서 살아난 갓난아기. 아기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아마 주변 어른들은 아이 앞에서 엄마 이야기를 하지 않을 공산이 높을 것이다. 아이는 엄마가 어찌 죽었는지도 모르고 살게 될 거다. 어쩌면 그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욕조를 살펴본 뒤 일어났다. 다시 거실 쪽으로 돌아섰을 때 반쯤 열린 욕실 문으로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화장대였다. 그리고 화장대 옆에 있는 진열대의 핸드백과 곰 인형이 보인다.

남편은 병원에서 퇴근 후 아내를 찾았을 것이다. 이 욕실은 이 집의 가장 구석진 곳에 있다. 안방 침대에 누워 있어도 욕실이 보이지 않는다. 욕실이 안쪽이 보이는 위치는 오직 화장대와 진열대의 위치에 서 있을 때다.

남편은 아마도 저곳 어딘가 서서 아내의 시신을 목격했을 것이다. 욕조에 가로로 누워 발견된 아내의 시신을 본 남편의 심정은 어땠을까? 나는 가만히 안방을 보다 말했다.

“남편이 출근을 했다고 들었는데.”

“예.”

“얼마나 쉬다 출근한 겁니까?”

“어제부터 출근했다고 들었습니다.”

어제. 사건은 일주일 전에 일어났다. 그럼 5일을 쉬었다는 뜻이다. 의사도 회사원이다. 회사원이 5일이나 휴가를 내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가족이 죽었는데 5일 만에 출근하는 게 가능할까?

게다가 5일 중 이틀은 용의자로 체포되어 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던 시간이니 자의로 쉰 건 3일이다. 또한 조사 때문에 아직 아내의 상도 치르지 못한 상태이다. 그런데 출근을 했다고?

나는 욕실을 나서며 물었다.

“남편 병원이 어디입니까?”

“쌍문동입니다.”

음, 딱 좋다. 안 그래도 강혁 아저씨가 보육원에 들르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운 좋게 보육원이 있는 쌍문동에 있는 병원이라니. 남편을 잠깐 만나보고 보육원에 들르면 되겠다.

“남편 성함이 어떻게 됩니까?”

“백승현입니다. 만나 보시게요?”

“가는 길에 잠깐 들러볼까 해서.”

최영현이 막내 형사에게 눈짓하자, 막내가 나선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과장님.”

“아, 괜찮아요.”

내가 거절하자 최영현이 나선다.

“용의자라고 하지만 거긴 그의 직장이라 모르는 형사가 자꾸 찾아오면 비협조적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얼굴 아는 형사가 따라가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음, 생각해 보니 그렇네. 자꾸 다른 놈이 찾아와 같은 말 하게 만들면 대부분 싫어하니까.

“그럼 그렇게 하죠. 시간 많이 안 뺐겠습니다. 귀찮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최영현이 씩 웃으며 괜히 내 어깨를 툭 친다.

“우리 사이에 무슨.”

우리 사이가 무슨 사이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웃어주자. 애들도 보는데. 최영현이 내 웃음을 보고 마주 웃어주는 순간 그의 전화가 울린다. 액정에 떠오른 이름을 보고는 얼굴을 구긴 최영현이 전화를 받는다.

“예, 검사님. 예, 하…… 알겠습니다.”

짧은 통화를 마친 최영현이 전화기가 부서질 정도로 꽉 쥐며 팀원들에게 말했다.

“야, 백승현이 토론토에서 초빙한 의사가 한 시간 뒤에 인천공항에 도착한다. 가서 데려와.”

형사들 얼굴이 구겨진다. 다들 한숨을 쉬고 있다. 최영현이 오만상을 구기며 투덜댄다.

“얼마를 줬길래 그 먼 캐나다에 있던 의사가 여기까지 오냐? 하여간 돈 많은 것들은.”

이상자세로 인한 질식사라는 제목의 논문을 썼다던 그 의사가 한국까지 날아온 모양이다. 아마 자신의 이론을 증명할 좋은 사례라 생각해 온 것이리라. 나는 더 일선 형사들을 방해할 수 없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막내만 남고 인천공항으로 이동하는 형사들과 함께 나온 나는 주차장에서 최영현과 간단히 인사를 나눴다.

“뭐 감 온 거 없습니까?”

“아직은 없네요.”

“후, 과장님이라면 뭔가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혹시 나중에 생각나는 거 있으면 바로 전화 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최영현과 인사를 나누고 막내 형사와 함께 내 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막내 형사는 총경과 함께 차를 타고 가는 것이 어색했는지 시종일관 굳어 있다. 나는 그런 막내 형사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예! 김현중입니다, 과장님!”

“계급은?”

“경장입니다.”

“원래 어디 소속이었어요?”

“순경으로 강남경찰서 신사 파출소에 있다가 경장 진급하면서 종로 경찰서로 발령받았습니다.”

“그렇구나.”

“저기, 말씀 편히 하십시오, 과장님.”

“그래도 돼?”

“물론입니다.”

싹싹한 녀석이다. 아까 보니 아직 좀 어색해 보이지만 눈치도 있고 일도 잘하는 것 같다. 현중이가 머뭇거리다 말했다.

“저기…….”

“음?”

현중이가 뭘 내미는 것을 본 나는 실소를 지었다. 녀석의 손에 명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얼굴의 현중이가 명함 든 손을 덜덜 떨며 말했다.

“제 명함입니다.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시면…….”

“하하. 그래, 거기 둬.”

“예!”

명함 하나 준 게 뭐 그리 신이 나는지 싱글벙글하는 현중이. 나는 창밖으로 보이는 병원을 보며 물었다.

“여기 맞지?”

“예, 맞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로비로 가 백승현 선생을 찾았다. 원무과 직원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곳은 흉부외과. 백승현은 흉부외과 전문의였다.

그가 현재 수술 중이 아님을 확인한 우리는 백승현의 방으로 갔다. 현중이가 방문을 노크하며 말했다.

“백승현 선생님. 경찰입니다.”

잠시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며 약간 차가운 목소리가 들린다.

“들어오세요.”

현중이가 날 힐끔 보며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리고 열리고 있는 문 뒤에 전경을 본 나는 백승현을 마주하기도 전에 눈이 가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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