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인의 기억-183화 (182/328)

살인의 기억 183화

15. 기묘한 시신(5)

열리고 있는 문틈으로 맨 먼저 보인 건 책장이었다. 잘 정리되어 꽂혀 있는 의학서적들.

하지만 그것을 본 나는 지독한 이질감을 느꼈다. 거꾸로 꽂혀 있는 책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엔 정리되어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정리되지 않은 커다란 두 개의 책장.

열리는 문으로 책상이 보인다. 책상 위에는 논문과 수술 자료들이 쌓여 있었는데, 밑에서부터 두껍고 큰 책이 쌓인 것이 아닌, 크기도 맞추지 않은 책이 중구난방으로 마구 쌓여 있다. 일부는 옆으로 쓰러져 있기도 하다.

현중이 문을 활짝 열자 백승현 선생의 얼굴이 보인다.

하얀 얼굴, 남자치고 약간 붉은 입술. 긴 머리에 가르마를 타서 포마드로 넘긴 세련된 헤어 스타일이다. 의사 가운을 입고 책상에 앉아 모니터를 보고 있던 그는 우릴 힐끔 보고는 다시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현중이 날 바라본다. 하지만 난 백승현 선생의 방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다. 할 수 없이 나선 현중이 말했다.

“몇 가지 여쭤볼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백승현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현중을 노려보며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경찰서에 이틀이나 갇혀 질문을 받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직도 부족한 겁니까?”

현중이가 곤란한 얼굴로 날 돌아본다.

하지만 나는 계속 백승현 선생의 방을 둘러보았다. 다시 보니 책장 위에도 책들이 마구 올려져 있는 것이 보인다. 공간이 부족해 그런 것이 아니다. 책을 잘 정리하면 충분히 공간이 남지만 정리를 하지 않아 위쪽까지 쌓인 것이다.

게다가 책장 옆쪽으로 뽀얀 먼지들이 앉아 있다. 위가 아닌 옆쪽에 먼지가 앉아 있다는 건 적어도 몇 년 이상 먼지를 털어내지 않았다는 뜻이다.

나는 책상 쪽으로 가며 힐끗 그의 티 테이블을 보았다. 잘 정리되어 있는 티 상자들과 커피들. 하지만 보통 이런 의사의 방에서 저런 부분을 챙기는 건 간호사들이나 후배 의사들일 확률이 높다.

그 증거로 씻지 않아 커피 찌꺼기가 남아 있는 컵이 보인다. 굳어 있는 검은 커피 찌꺼기 상태를 보아 적어도 며칠은 그대로 놓아둔 것 같다.

나는 현중이가 밀어주는 의자로 가며 백승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일반인들 기준에서 보면 이상할 건 없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렇게 깔끔한 아내를 둔 남자라면? 이로 인해 다툼이 생기지 않았을까?’

주변 인물의 증언을 백 퍼센트 믿을 순 없다. 가까운 지인도 부부간의 일을 모를 확률이 높은데 이웃들이 부부싸움의 소음이 없었다는 증언을 했다고 둘이 싸우지 않았다고 생각할 순 없기 때문이다.

또한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싸움보다 소리 없는 냉전이 더 무서운 법이다.

백승현은 자신을 뚫어지게 보는 날 마음에 들지 않는 시선으로 보며 말했다.

“경찰이십니까?”

나는 그와 초면이다. 지겹게 봤던 형사들과 다른 얼굴이니 묻는 것이리라. 나는 신분증을 내밀며 말했다.

“국가수사본부 중대범죄 수사과장, 현도경입니다.”

내 소속을 들은 백승현의 눈썹이 꿈틀한다.

“국가수사본부?”

일선 경찰서 강력계와 다른 무게. 국가수사본부라는 이름에는 그러한 무게가 있다. 책상 위에 올려둔 내 신분증을 들고 얼굴을 비교하던 백승현은 계급을 보고 다시 한번 놀랐다.

“총경?”

그는 내 얼굴을 다시 보며 미간을 좁힌다.

“너무 젊어 보이는 분인데. 본인 신분증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저도 아는 경찰들이 좀 있는데. 보통 총경쯤 되려면 빨리 진급해도 50대라고 들었습니다만.”

얼굴에 금칠을 하려는 의도인가? 버젓이 신분증을 보여주었는데 이런 소모성 대화가 왜 필요한 거지? 나는 신분증을 눈짓하며 말했다.

“사람들은 주변이 세상의 전부라 생각하고 살죠. 내 주변인에게 물어보니 그렇다고 하던데, 넌 왜 다르지? 네가 틀린 것 아닌가? 라는 시선. 하지만 우린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내 주변의 작은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

백승현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현중이가 나서서 말했다.

“신원은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백승현은 현중이를 힐끔 본 뒤 내 신분증을 내려놓는다.

“후, 그래서 오늘은 무슨 질문을 할 겁니까? 부탁드립니다만, 이미 경찰서에서 조사받을 때 했던 질문을 다시 받고 싶진 않군요.”

나는 백승현을 가만히 바라보다 물었다.

“먼저 아내분의 사고에 대해 유감을 표합니다.”

“입 바른 소리 마시고, 본론으로 바로 가시죠?”

나는 비협조적인 백승현의 태도에 최영현의 취조가 꽤 강압적이었음을 예상했다. 그 양반 스타일이 좀 거치니 만에 하나 백승현이 범인이 아니라면 이런 태도가 이해된다.

“아내분인 이은지 씨는 잠옷을 입은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백승현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제가 최초 발견하고 신고한 건데 당연히 알고 있죠.”

“신고자는 장모님 아니었습니까?”

“같이 했습니다.”

“백승현 씨가 아내의 죽음을 알린 대상은 112 신고센터가 아니라 장모였죠.”

“그게 왜요?”

“그저 그렇다는 말씀을 드린 겁니다. 사실에 입각해 진술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종의 말장난. 나는 일부러 백승현을 화나게 하고 있다. 그가 이런 말장난으로 화가 나 이성을 잃고 실수를 하기 바란 것이다. 하지만 백승현은 날 노려보기만 하고 딱히 화를 내진 않았다.

나는 잠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결혼 3년 차이시고 아내분은 내달에 출산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요?”

“병원에는 다녀오셨습니까?”

“전 병원이 직장입니다.”

“아내분 사망 후에 제왕절개로 꺼낸 딸의 병원을 말하는 겁니다.”

“…….”

백승현이 잠시 말을 잃었다. 그는 왼쪽 눈가를 파르르 떤 후 애꿎은 서류들을 치우며 말했다.

“경찰에 잡혀 있는 동안 일이 밀려서. 급한 일들만 처리하고 가 보려고 했습니다.”

아직 안 갔다. 아무리 아내가 죽어 정신이 없다고 하지만 살아난 자신의 딸을 돌보지 않는 아빠라? 나는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112신고센터에 전화하셨을 때 장모님 옆에서 했던 말이 녹음되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백승현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무슨 말이요?”

“제가 의사인데, 사망한 지 수 시간은 지난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아, 그 말. 맞습니다. 수사에 도움이 될까 싶어 했습니다.”

나는 백승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녹음 음성 속에서 그는 매우 차분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죽어 있는 아내를 보고 침착할 수 있는 인간이 과연 있을까? 의심스러운 점이 꽤 많다.

“진술서를 보니 출근을 위해 아침을 드시고 있을 때 아내분이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다고.”

“예.”

“무슨 프로그램이었습니까?”

“모릅니다, 맨날 보는 아침 드라마였을 겁니다. 전 그쪽엔 관심이 없어서 한 번도 같이 본 적이 없습니다.”

“백승현 씨가 식사를 마치고 씻고 나오자, 아내분이 흰색 후드 티셔츠와 검은색 트레이닝 바지를 챙겨주셨다고 하셨는데.”

“예.”

“출근하실 때 그런 옷을 입으십니까?”

“예, 간편한 복장으로 출근한 뒤에 사무실에서 옷을 갈아입습니다.”

“집을 나설 때 아내분은 현관으로 배웅 나오지 않고 안방에서 ‘잘 가’라는 인사를 하셨다고 진술하셨습니다.”

“예.”

“평소에도 그렇습니까?”

“보통 그렇습니다. 맨날 하는 출근이니까.”

나는 거의 표정이 없는 백승현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그의 이마에 ‘ㄴ’자 모양의 상처가 도드라져 보인다.

“이마에 난 상처에 대해서는 병원 계단에서 굴렀다는 진술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예.”

“언제 그랬습니까?”

“아내가 죽기 하루 전에 그랬습니다.”

“이 병원 계단에서 그랬습니까?”

“예.”

“계단에 CCTV가 있습니까?”

“아뇨.”

“그럼 넘어질 때 누군가 같이 있었습니까?”

“혼자 있었습니다.”

나는 백승현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최영현이 말해준 건 이마에 남은 큰 상처뿐이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오른쪽 관자놀이와 귀 밑, 왼쪽 뺨에도 긁힌 자국들이 보인다.

“나머지 상처도 그때 난 겁니까?”

백승현이 순간적으로 자기 상처를 만진다. 그의 왼쪽 눈가가 슬쩍 떨리는 것이 보인다.

“아뇨.”

“그럼 왜 상처가 나셨습니까?”

“피부병이 있습니다. 가려워서 긁다가 이런 상처들이 생긴 것이고.”

“동의해 주신다면 상처를 사진으로 남겨도 되겠습니까?”

“…….”

“동의해 주시지 않는다면 압수수색영장을 가지고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백승현이 살짝 화가 난 얼굴로 날 노려본다.

“압수수색영장이 그렇게 쉽게 나오는 게 아닐 텐데요.”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국가수사본부에서는 쉬운 일이니 괘념치 마시길.”

“…….”

“다시 묻죠. 동의하시겠습니까?”

“…….”

백승현이 말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인다. 나는 현중이에게 눈짓하며 말했다.

“사진 찍어둬.”

“예, 과장님.”

현중이가 사진을 찍고 있는 도중에도 날 노려보고 있는 백승현. 범인이 아니라면 이 모든 상황이 기분 나쁠 터이다. 하지만 수사는 수사다. 상대 기분을 고려하며 해낼 수 있는 업무가 아니다.

나는 그런 백승현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까 들어보니 토론토에서 초빙한 의사가 도착했다고 하던데.”

백승현이 반색하며 물었다.

“도착하셨다고 합니까?”

“곧 도착이라 경찰에서 모시러 갔습니다.”

“다행이군요. 그분이 오시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겁니다.”

“토론토대학 법의학 센터장이라고 들었습니다.”

“예, 닥터 마이클 로벤 플라스라고. 이 분야에 세계적인 권위자입니다.”

“평소 알고 지내는 분입니까?”

“아뇨, 사건이 나고 이로 인해 제가 의심을 받은 후에 연락드렸습니다.”

“지인도 아닌데 한국까지 와주시는군요. 사례를 했습니까?”

“물론입니다. 귀한 분을 모시는데 당연히 사례를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죠.”

백승현은 자신감 있는 얼굴로 말했다.

“대한민국의 과학수사는 아직 서구 세계를 이길 수 없습니다.”

나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잘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협조 감사합니다.”

“멀리 안 나갑니다. 그리고 가급적 다시 볼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나는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

나는 백승현의 방에서 나와 복도를 걷다 뒤에서 따라오던 현중이를 돌아보았다.

“이은지 씨 부검 누가 했는지 알아?”

현중이가 얼른 핸드폰으로 공유파일을 확인 후 말했다.

“KCSI 법의학 부검의 고미숙이란 선생이 했습니다.”

“지금 시신 어디 있지?”

“KCSI 본부에 있습니다.”

“알았다, 수고했고 넌 그만 가 봐.”

“저기…… 어쩌시려고 그러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나는 복도를 돌아보았다. 백승현 선생의 방을 가만히 노려본 나는 비틀린 웃음을 걸고 말했다.

“방금 저 사람이 했던 말 말이야.”

“어떤…….”

“대한민국의 과학수사는 아직 서구 세계를 이길 수 없다던 말.”

“아, 예.”

“그 이야기 들으면 광분할 분이 계시거든. 그분께 맡겨보려고.”

“……?”

나는 씩 웃으며 그만 가 보라는 수신호를 보내고 걸으며 전화를 들었다.

“예, 목 과장님. 오랜만입니다. 예, 지금 좀 뵐 수 있을까요? 아, 다름이 아니라 사건 하나가 있는데 이놈이 대한민국 법의학을 무시하네요. 과장님 들으시면 화나실 거 같아서 말씀 안 드리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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