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186화
15. 기묘한 시신(8)
나는 TV를 보고 있는 아이 중 가장 커 보이는 남자아이를 불렀다.
“저기, 잠깐 형 좀 볼까?”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내 부름에 머뭇거리며 다가온다.
“네?”
“잠깐 여기 앉아.”
경계심이 많은 것 같아 보였지만 좀 전까지 수녀님과 내가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봐서 그런지 머뭇거리면서도 자리에 앉는 남자아이. 나는 화면을 눈짓하며 말했다.
“너도 윌리 알아?”
아이가 화면을 힐끔 본다. 이미 다른 화면이 나오고 있어 인형이 보이지 않았지만 인형 자체가 유명한지 아이는 바로 고개를 끄덕인다.
“네.”
“형이 저 프로그램 안 봐서 그런데. 저 곰 인형이 무슨 역할이야?”
아이는 화면을 다시 보다 고개를 갸웃거린다.
“역할이요?”
“어, 출연자가 자꾸 만지고 그러네.”
“아, 저거 저기 출연하는 사람 집에 갖다 놓는 인형이에요.”
“왜?”
“왜인지는 모르는데. 그냥 저게 있으면 프로그램 촬영한다는 뜻이거든요.”
“아, 그래? 다른 역할은 없고?”
“저거…… 카메라일걸요?”
“카메라?”
나는 다시 화면을 보았다. 출연자가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고 맞은편 의자에 앉혀둔 인형. 아무 장치도 없어 보이는 인형이다.
“카메라가 어디 있어?”
아이가 자기 눈을 가리킨다.
“눈에 있어요. 사람들이 곰 만질 때 인형 시점으로 화면이 나올 때가 있어서 알아요.”
나는 미간을 좁혔다.
“인형 눈에 카메라가 있다고?”
“네.”
“그렇구나…… 고마워.”
아이는 볼일 다 끝났냐는 눈빛으로 날 본다. 나는 지갑을 뒤져 만 원짜리를 꺼내주며 말했다.
“맛있는 거 사 먹어.”
아이는 동그란 눈으로 돈을 보다 자기도 모르게 주방 쪽을 본다. 수녀님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는 아이 손에 돈을 쥐여주며 말했다.
“형도 여기 출신이야. 형이 주는 건 괜찮아.”
아이는 그제야 허리를 숙이며 인사한다.
“감사합니다, 형.”
“그래, 가서 TV 봐.”
나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아이를 가만히 바라보다 현장에서 본 곰 인형을 떠올렸다.
안방의 핸드백 진열장 위에 있던 인형. 화장실 문이 열려 있다고 가정했을 때 인형의 위치에서 보였던 욕실 안쪽의 시야를 떠올렸다.
그리고 또 하나. 백승현의 검색 목록에 있었다던 한 단어가 생각났다.
‘스너프 필름.’
나는 코를 찡그린 후 전화를 바라보았다. 아까 현중이 명함을 받았는데 입력을 안 했었구나. 아, 차에 명함이 있는데. 차에 가서 확인해 봐야겠다.
나는 잠시 새별이와 함께 앉아 TV를 보다 수녀님이 포장해 주신 김치를 받아 차에 탔다.
배웅 나오신 루이사 수녀님이 말했다.
“새로 부임하신 신부님께 인사드리고 가지.”
사건 생각 때문에 머리가 복잡하지만 그냥 가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나는 트렁크에 김치를 싣고 말했다.
“네, 그럴까요?”
보육원과 성당은 입구가 다르다. 성당 입구는 보육원의 우편으로 걸어 나와 성당 건물을 빙 돌아야 나온다. 즉, 보육원은 성당의 뒤편에 있는 것이다.
수녀님들과 성당 옆면을 돌아 정문으로 가는 길. 나는 아주 어린 시절 자주 지나다녔던 성당 건물 옆길을 걷다 문득 옅은 두통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매번 걷던 길이었는데. 주일이 되면 미사를 지내기 위해 성당으로 가던 이 길은 내게 아주 익숙한 길인데. 왜 이렇게 갑작스러운 이질감이 느껴지는 거지? 그리고 난 왜 최근에 여길 봤던 기억이 나는 걸까?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길을 바라보았다.
약 3미터쯤 되는 폭이 좁은 옆길. 최근에 이 길을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럴 리가 없는데. 지난번에 과자를 들고 왔을 때는 보육원 앞에 차를 대고 볼일만 본 뒤에 떠났다. 최근에 이 길을 걸었던 기억이 없는데. 옛날 기억들 때문에 그런 걸까?
수녀님들과 걷던 나는 성당 정문이 보이는 길로 빠져나온 뒤 주변을 보았다. 성당 맨 위에 뾰족하게 솟아오른 십자가.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고풍스러운 성당.
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성당 앞에서 하얀색이 나오는 돌로 아스팔트 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놀다가 신부님께 혼났던 기억이 난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세 개의 돌 계단이 보인다. 저기에 앉아서 참 많은 시간을 보냈었는데.
수녀님이 성당 정문에 도착한 뒤 허리를 숙여 뭔가 집어 들며 말했다.
“새로 오신 신부님은 꼭 조간, 석간 신문을 다 보시더라. 세상 돌아가는 데 관심이 많으신가 봐.”
로사 수녀님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신부님들은 보통 이런 거 관심 없으신 분이 대부분인데. 특이하시죠.”
나는 물끄러미 수녀님이 손에 든 신문 뭉치를 보았다. 다시 살짝 두통이 찾아온다. 계단 위에 놓인 신문. 나 이거 어디서 봤더라? 또 어릴 때 기억인가? 나는 잠시 관자놀이를 잡고 인상을 썼다.
루이사 수녀님이 그런 날 살피며 물었다.
“도경아? 왜 그래, 어디 아프니?”
“아…… 안 아파요. 걱정 마세요.”
“머리 아픈 것 같은데?”
“가끔 이래요.”
“그러게 건강 관리 좀 잘 하라니까. 이 녀석이.”
바로 그때 동네 사람으로 보이는 여성이 트레이닝복을 입고 러닝을 하는 것이 보인다. 성당에 나오는 사람인지 뛰다가 수녀님들을 보며 허리를 숙이는 여성.
“하아, 하아. 안녕하세요 수녀님.”
루이사 수녀님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어머, 그레이스. 오늘도 열심히 운동하네요. 보기 좋아요.”
여성이 숨을 헐떡이며 웃는다.
“하아, 하아. 네. 열심히 해야죠. 살 빼야 되거든요. 하아, 하아. 그럼 주일에 봐요!”
여성이 다시 뛴다. 아무 문제도 없는 일상적인 광경. 하지만 이 평범한 일상의 것이 합쳐져 쪼개졌던 기억의 퍼즐이 서서히 맞춰진 나는 급히 주변을 보았다.
성당 꼭대기의 뾰족한 십자가.
계단 위에 놓인 신문 뭉치.
뛰느라 숨을 헐떡이는 여성.
이건 정신의학과 상담 중에 읽었던 바로 그 기억이다. 그때 기억이 내가 자란 성당 앞의 기억이었다고? 아니야, 확실하지 않아.
나는 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의 기억과는 다른 모습이다. 성당 주변에 꽉 차게 지어진 빌라들. 내가 읽었던 기억과 다른 모습이다.
기억 속의 성당 주변은 매우 한적했다. 정면에 빌라가 아니라 큰 공장 같은 게 있었다. 우리 성당 앞처럼 닭장 같은 빌라가 꽉꽉 차게 지어진 곳이 아니었다.
‘성당 앞. 신문. 숨을 헐떡이는 여자.’
무슨 기억이었던 걸까? 난 그때 뭘 본 걸까?
* * *
새로 오신 신부님과 인사를 나누고 수녀님들과 헤어진 뒤 다시 차에 탄 나는 가만히 성당 건물을 보았다.
지금까지 나는 사건에 대한 기억을 읽어왔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현재 벌어진 사건과 내가 읽은 기억의 연관성이 없다. 하물며 나는 최영현에게서 사건 설명을 듣기도 전인 오후 첫 진료 중에 기억을 보았다.
이번 사건의 피해자는 만삭의 여성. 아직 자기 눈으로 아기를 보지도 못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기억 속의 여성은 자기 아기를 성당 앞 계단에 버리고 갔다.
아니, 버린 것은 아닌 것 같다. 식은땀으로 머리카락이 다 젖어 있던 그녀가 마지막에 했던 말이 떠오른다.
‘엄마가 미안해. 금방 찾으러 올게. 조금만 기다려, 내 아기.’
도대체 뭐지? 그냥 개꿈인가? 나는 잠시 기억에 대해 생각해 보다 머리를 흔들며 핸들을 잡았다.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변속기 옆에 두었던 현중이 명함을 확인하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현중아.”
-네, 과장님!
현중이는 내가 전화해 준 것이 무척 좋은 모양이다. 늦은 시간임에도 목소리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늦은 밤에 미안하다.”
-아닙니다, 과장님! 언제든 전화 주셔도 괜찮습니다.
“어, 그래. 다름이 아니라. 너 아까 현장에서 본 곰 인형한테 뭐라고 말하지 않았어?”
-어…… 곰 인형이요?
“응, 네가 인형을 툭 치며 뭐라고 했던 거 같아서.”
-아! 그거…… 죄송합니다, 그걸 보셨을 줄은.
“괜찮으니 말해.”
-그런데 그건 왜…….
“아, 그냥 궁금해서.”
-그게…… 제가 현장에서 장난 치려던 건 아니고…… 그냥 ‘윌리 안녕?’이라고 했습니다. 혹시 아시나요?
윌리. 그때 현중이가 현장에 있던 곰 인형에게 윌리라고 불렀던 거였구나.
“TV 프로그램에 나오는 인형 말이지?”
-아시는군요.
“같은 제품이야?”
-사이즈는 다릅니다만, 방송국에서 구매한 것인지 윌리 티셔츠를 입고 있었습니다. 저도 그거 사고 싶었는데 구하기가 너무 힘들더라고요.
“구하기 힘들어? 왜?”
-인기가 많습니다. 그냥 인형 구하긴 쉬운데 티셔츠에 윌리 이름이 들어간 제품은 방송국에서만 팔거든요.
“얼마야?”
-16만 원이요.
더럽게 비싸구나. 무슨 애들 인형이 16만 원씩이나 하냐.
“왜 그렇게 비싸? 설마 거기 진짜 카메라가 있어?”
-아뇨…… 카메라가 있었으면 더 비싸죠. 그냥 인형입니다, 인형.
이상하게 찜찜한 기분이 든다.
“혹시 곰 인형 확인해 봤어?”
-인형 주변에 먼지 한 톨까지 싹 가져갔죠.
“아니, 인형 안쪽 말이다.”
-안쪽이라고 하시면 어디를…….
“인형 솜 안에 뭐가 들었는지 봤냐고.”
-아뇨…… 그렇게 하지는 않았는데. 무슨 일로 그러시는지.
“음, 아니다. 그냥 물어봤다. 어디야?”
-사무실입니다.
“아직 퇴근 안 했어?”
-사건 끝나기 전에는 퇴근 없습니다. 우리 팀장님 스타일이 좀…… 하하.
음, 최영현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물론 자신이 솔선수범해서 제일 오래 남아 있을 사람이라 악덕 상사 소리는 안 듣겠지만 참 주먹구구식으로 일하는 사람이다.
“그래, 수고하고.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마.”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과장님. 충성!
나는 현중이와 통화를 종료 후 곧바로 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과장님.
“관우야. 어디야?”
-예, 저 이제 퇴근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어디세요? 하루 종일 안 보이시던데.
“어, 나 잠깐 나와 있는데. 혹시 약속 있어?”
-아뇨? 술 한잔할까요?
“그래, 근데 그전에 하나만 도와줄래? 주소 찍어줄 테니 거기로 와.”
-네, 바로 가겠습니다.
잠시 후 사건 현장인 오피스텔.
폴리스라인이 쳐진 현관문을 본 관우가 허탈하게 웃었다.
“설마 여기가 술집은 아니죠?”
나는 실소를 지으며 장갑을 착용했다.
“이거만 하나 하고 마시자.”
관우와 함께 집안으로 들어가 곧바로 안방으로 간 나는 조심스럽게 곰 인형을 꺼내 관우에게 내밀었다.
“머리 열어봐.”
관우가 곰 인형을 들고 멀뚱히 바라본다.
“이거 따요? 여기 사건 현장 같은데 막 만져도 되는 겁니까? 우리 관할 사건도 아닌 것 같은데.”
“최영현 팀장님 관할이야. 도와달라고 하신 사건이고.”
관우가 휘파람을 불며 인형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아이고, 종일 안 보이신다 했더니. 역시 우리 과장님은 절대 놀지를 못 하시네요. 사건 배당 없을 때 좀 쉬시는 줄 알았는데. 고새 최 선배님 사건까지 손대고 계시다니.”
관우가 자기 필통에서 커터 칼을 꺼내 인형 뒤통수를 따자 하얀 솜이 보인다. 손을 쑥 집어넣는 관우. 눈썹을 꿈틀대며 안을 뒤진다.
“눈 쪽 잘 뒤져봐.”
내 말을 들은 관우가 머릿속의 솜을 약간 빼낸 후 다시 손을 집어넣더니 눈을 꿈틀댄다. 잠시 후 관우 손에 긴 전선 한 가닥이 잡혀 있다.
“이거…….”
관우가 인형 머리의 솜을 모두 빼버리자 사건 현장 바닥이 솜으로 난장판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인형 안에 있던 전선 끝에 달린 손톱만 한 기계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설마 진짜 카메라가 있었던 거야? 나는 관우에게 바짝 붙어 물었다.
“카메라야?”
관우가 작은 장치를 보며 미간을 찌푸린다.
“SD 카드가 없는 모델인데.”
후, 잘못 짚은 건가? 그런데 인형에 왜 이런 게 달려 있어? 관우가 장치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거 송수신 장치입니다, 과장님.”
“송수신장치?”
관우가 인형을 더 뒤져 배터리가 든 상자까지 꺼낸다. 몇 번 조작을 해본 관우가 말했다.
“배터리가 다 되어 더는 작동을 안 하네요.”
“송수신 장치라는 게 무슨 뜻이야?”
관우가 장치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음, 그러니까. 여기서 촬영된 영상이 이 기기에 저장되는 게 아니라, 연결된 다른 장치로 저장된다는 뜻이죠. 앵글이 있는 카메라는 맞는데 저장공간은 없는 기계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도대체 뭔데 그러세요?”
나는 관우가 들고 있는 작은 수신기를 노려보았다. 누군가 영상촬영을 했다. 하지만 그 영상은 어디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영상 속에 사건의 진실이 담겨 있을 가능성이 높다.
“어디로 연결된 건지 확인 가능해?”
관우는 가만히 날 바라보다 혀를 찬다.
“이거 찾아내려면 밤 새워야 되는데. 술 안 사주실 겁니까?”
나는 관우 어깨를 꽉 잡으며 말했다.
“찾기만 하면 두 배로 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