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187화
15. 기묘한 시신(9)
다음 날, 종로 경찰서.
강력 3반의 사무실로 가니 개미 새끼 한 마리 없다. 다들 어디 간 걸까? 백승현의 집에서 나온 송수신기에 대해 전달해 줘야 하는데.
최영현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수신음만 가고 전화를 받지 않는다. 하지만 곧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지금 검찰에 와 있습니다. 담당 검사와 토론토 대학 법의학자란 사람과 면담 중이니 나중에 통화하시죠.
검찰. 서울 중앙지검일 것이다.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중앙지검은 서초구 반포대로에 있다. 막히지 않는 시간이니 빨리 가면 40분 내로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차를 몰고 중앙지검으로 향하는 길.
핸드폰이 진동을 울린다. 액정을 힐끔 보니 강혁 아저씨 이름이 떠올라 있다. 하, 또 잔소리인가?
“여보세요.”
-너 인마!
“예?’
-그냥 좀 치료받으면서 쉬면 입안에 가시가 돋기라도 하냐, 인마!
“공무원이 왜 쉽니까? 월급도 다 받는데.”
-그 월급 내가 준다. 내가 쉬라면 쉬는 거야!
“제 월급은 청장님이 주시는 게 아니라 국민들이 주는 건데요?”
-말이나 못하면.
“치료 잘 받을 테니 걱정 마세요.”
-하…….
잔소리 할아버지가 다 되었지만 나는 안다. 수녀님들을 제외하면 세상에서 날 가장 생각해 주는 사람이 아저씨라는 것을. 언젠가 이 지겨운 잔소리들이 그리워질 날이 올 것이고, 나는 그때 후회하고 싶지 않았기에 아저씨의 마음을 외면하고 싶지 않다.
한숨을 푹푹 쉬던 아저씨가 물었다.
-보고받았다. 최영현이 놈 사건을 돕고 있다고?
“여기저기 쁘락지를 많이 심어두셨나 보네요, 하하.”
-내가 청장이다, 이놈아.
“아, 그렇지 참.”
-아, 그렇지 참? 뒤지고 싶지?
“하하, 가끔 잊어버려서 그런 겁니다.”
-이 자식이 청장한테 농담을 해? 날 뭘로 보고 있는 거냐!
“음, 삼촌?”
-…….
“아닌가요?”
내 너스레에 말이 없어진 아저씨. 사실 내 속마음은 삼촌이 아니라 아빠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렇게 말하고 나면 아저씨가 괜히 부담스러워하실 것 같아 이 정도만 표현했다.
-흠, 그래. 지금은 어디야?”
한껏 누그러진 목소리. 아저씨는 내 농담이 기꺼운 모양이다.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운전 중이에요.”
-운전 중에 전화를 받아? 뒤지고 싶지?
“스피커폰으로 받고 있어요.”
-어디 가는데?
“중앙지검이요.”
-응? 거긴 왜?
“토론토 대학 법의학 센터장이란 사람이 와 있다고 해서.”
-만나서 뭐 하려고?
나는 관우와 발견한 송수신기에 대해 말했다. 상황을 들은 아저씨가 물었다.
-너 또 기억 읽었냐?
음, 읽긴 읽었는데. 내가 읽은 기억과 이 사건은 다른 것 같다.
“그게 좀 헷갈려요. 내가 읽은 기억이 이 사건과 연관된 것이 맞는지.”
-설명해 봐.
나는 간단히 아기를 버리고 간 여성의 기억들을 이야기했다. 내 말을 끊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들은 아저씨가 말했다.
-사건 관계자 주변상황과 비교했을 때 확실히 사건 기억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네가 뭔가 읽었다면 이유가 있을 거야.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기억하지? 첫 사건 때 내가 했던 말.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아저씨의 말. 그건 중학교 때 시신 없는 살인사건을 도우며 들었던 말이다.
‘네 기억 속에 반드시 힌트가 있다. 무심코 스쳐 지났던 모든 것들을 다시 기억해라.’
지금은 운전 중이라 그리할 수 없지만 시간을 내 꼭 기억을 되짚어야 할 것 같다.
“예, 기억해요. 지금은 바쁘고, 이따 시간 날 때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알았다. 일단 인형에서 송수신기가 나왔다는 건 좋은 단서다. 가서 알려주고 넌 너무 개입하지 마라. 네 담당 사건도 아닌데 왜 사서 고생을 해, 미친놈아.
“하하, 알았어요.”
-끊는다, 망할 놈.
나는 끊어진 전화를 물끄러미 보며 빙긋 웃었다. 날 걱정하는 아저씨 마음이 물씬 느껴진다.
어느새 도착한 중앙지검에 주차를 하고 로비에서 신분증을 꺼냈다.
경찰이라도 미리 약속을 하고 오지 않으면 출입할 수 없는 중앙지검. 하, 생각을 좀 하고 움직일 걸 그랬다. 최영현에게 전화를 해 담당 검사 이름이라도 알아내야 할 판이다.
하지만 로비의 직원은 내 신분증을 PC에 입력하더니 바로 임시출입증을 내어준다.
“어?”
로비 직원이 친절하게 웃으며 말했다.
“무슨 문제 있으신가요?”
나는 출입증을 가만히 바라보며 물었다.
“출입증 발급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까요?”
직원이 모니터를 힐끔 보며 말했다.
“강혁 경찰청장님이 조금 전에 지검장님께 요청하셔서 발급해 주란 메모를 남겨놓으셨습니다.”
아, 역시 아저씨다. 내가 이런 일로 곤란해질 걸 알고 미리 움직이셨구나. 역시 아저씨가 최고다.
나는 눈인사를 한 뒤 엘리베이터로 가며 다시 최영현에게 문자를 보냈다.
-중앙지검에 와 있습니다. 어디 계십니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도중 바로 답이 온다.
-9층 주현성 검사님 방으로 오시면 됩니다. 그런데 급한 일이 아니면 좀 기다리시죠. 그래도 검사님 방에 막 들어오시는 건 좀.
-사건에 관계된 일입니다. 검사님도 알아야 됩니다.
-음, 알겠습니다.
9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주현성 검사실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내리자마자 첫 번째 사무실이었기 때문이다. 노크를 한 뒤 문을 열자 남성 검찰수사관과 여성 사무장이 보인다.
검찰수사관이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나는 임시출입증과 신분증을 동시에 꺼내며 말했다.
“주현성 검사님 만나러 왔습니다.”
수사관이 내 신분증을 보며 놀라 눈을 크게 뜬다.
“총경……?”
아마 자신이 본 총경 중에 내가 제일 어릴 것이다. 신분증과 내 얼굴을 여러 번 확인한 수사관이 소파로 안내한다.
“검사님이 지금 누굴 좀 만나고 계신데. 잠시만 기다리시죠.”
“토론토 대학 법의학자. 맞습니까?”
“어……? 이번 사건 관계자이십니까?”
“예, 그것 때문에 만나러 온 겁니다. 들어가 봐도 될까요?”
“아…… 잠시만요.”
수사관이 눈짓하자 사무장이 인터폰을 들어 확인을 한다. 다행히 최영현이 언질을 해놓았는지 검사의 허락이 떨어지고, 수사관이 검사실 문을 열어주자, 안의 전경이 보인다.
맨 먼저 보이는 건 현중이다. 최영현의 팀 형사들이 다 와 있는 모양이다.
사무실의 주인 자리에 앉아 있는 주현성 검사는 꽤 나이가 있는 사람이었다.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데 벌써 머리가 반백발이다. 주름진 얼굴을 보니 사건 때문에 꽤나 고생하는 일선 검사인 모양이다.
“들어오시죠.”
“안녕하십니까, 검사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국가수사본부 수사과장님.”
구석에 빙 둘러 앉아 있는 최영현과 그의 팀 형사들과 눈인사를 한 나는 검사 앞에 앉은 외국인 남성을 보았다.
통역을 대동하고 있는 그는 전형적인 학자의 외모이지만 매우 강단 있는 인상을 가진 자였다.
그는 들어오는 날 가만히 지켜본 뒤 다시 제 할 말을 한다. 검사와 나는 영어를 알아듣지만 다른 형사들을 위해 통역사가 나선다.
“닥터 마이클 로벤 플라스(Michael Robben Plath)께서 작년에 란셋(LANCET)에 기고한 논문에 따르면 이번 사건이 반드시 살인사건이 아닐 수 있다는 근거를 보실 수 있을 거라고 하십니다.”
주현성 검사가 골치 아프다는 듯한 얼굴로 프린트 된 영어 논문을 눈짓했다.
“이거 말입니까?”
마이클 박사가 논문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저는 이 부문에 대해 오랜 기간 연구했으며 캐나다 경찰이 살인으로 판단한 사건 사례 19건 중 11건에서 유효한 증거사례를 발견, 법의학자로 법정 증인석에 섰으며, 8건의 소송에서 승소한 바 있습니다.”
통역의 말을 들은 형사들이 머리를 쥐어뜯는다. 솔직히 사건 해결을 위해 저 어려운 논문을 검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상대의 승소율이 너무 높다. 어쩌면 살인사건이 아닌 이상자세로 인한 질식사라는 말 같지도 않은 결론으로 사건이 종결될 수도 있다.
최영현이 으르렁거리며 끼어든다.
“이 사건과 당신 논문이 같은 사례라는 걸 증명할 수 있습니까?”
마이클 박사는 통역을 전달받고 최영현을 슬쩍 본 뒤 어깨를 으쓱한다.
“아주 특이한 발상이군요. 애초부터 행위를 했다는 사람과 하지 않았다는 사람이 있을 경우, 했다는 사람 쪽이 증명을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행위를 하지 않은 사람은 애초부터 증거가 없습니다. 알리바이를 대는 것이 최선이죠. 그러하기에 당신 나라의 법에 증거주의 원칙이 있는 것일 텐데요.”
최영현은 더 말을 하지 못했지만 얼마나 화가 났는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주현성 검사가 그만하라는 듯 손을 들며 말했다.
“일단 대한민국 검, 경찰은 이 사건을 살인사건으로 보고 수사 중이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당신의 논문에서 말한 것처럼 이 사건이 사망자 본인 실수로 인해 발생한 안타까운 사고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단계에서 당신이 옳다는 가정하에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마이클 박사가 고개를 끄덕인다.
“옳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극단적으로 닥터 백을 용의자로 몰고 가는 행위 역시 부당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하…….”
“24시간 감시를 당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
“여권 동결로 해외 도피를 막는 수준에서 끝내시죠? 어차피 대한민국은 작은 나라입니다. 또한 대륙과 연결되어 있다고 하지만 위쪽은 북한 아닙니까? 지리적으로 보면 고립된 섬과 마찬가지인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또한 닥터 백은 신분도 확실합니다.”
주현성 검사가 최영현을 바라본다. 최영현은 절대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마이클 박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주현성 검사가 마지막으로 다시 경찰을 감싼다.
“대한민국 사정을 잘 모르시겠지만 꽤 많은 범죄자가 밀항선을 타고 중국으로 도주합니다. 만약 당신 말처럼 경호를 풀었다가 도주라도 하면 어쩌시겠습니까?”
마이클 박사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이동금지 명령이란 좋은 방법이 있지요. 잊지 마세요. 전 닥터이지만 동시에 법의학 박사이기도 합니다. 나는 검사인 당신만큼 많은 법을 알고 있습니다.”
“…….”
주현성 검사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인상을 쓴다.
한숨을 푹푹 쉬는 주현성 검사. 이대로 가면 백승현의 감시명령이 철회된다. 이동금지 명령? 그건 더 큰일이다. 명령 내린다고 살인자가 명령에 따르겠는가?
그의 집을 겹겹이 포위해 모든 이동 차량을 검문하게 되면 단순 감시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인력을 사용해야 한다.
주현성 검사는 이를 갈다 마이클 박사를 보며 입을 뗐다.
“후…… 일단 백승현 씨를 용의자로 보기에는 증거가 미비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현 시간부로 감시명령을…….”
그때, 주머니 속에 넣어둔 내 핸드폰이 진동을 울린다. 조용한 사무실이라 진동 소리가 크게 들리자 모두가 날 바라본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하고 빙긋 웃으며 일어났다.
“말씀을 끊어 죄송합니다, 검사님.”
주현성 검사가 가뜩이나 짜증 나는 상황에 외지인이 들어와 뭣 하는 짓이냐는 표정으로 본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내 핸드폰을 보여주며 슬쩍 귓속말을 했다.
“백승현의 집에서 영상 송수신기가 발견됐습니다. 지금 우리 팀원이 송수신기와 연결된 곳이 어디인지 확인했답니다. 잠시만 판단을 보류해 주시죠.”
주현성 검사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나는 그와 눈을 맞춘 뒤 지금 무슨 행동을 하는 것이냐 눈으로 묻고 있는 마이클 박사에게 영어로 말했다.
“닥터 마이클.”
“예?”
“나는 당신에게 의학적 지식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
나는 허리를 숙여 책상을 짚은 후 그와 눈높이를 맞추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증거로 말할 겁니다. 잠시 후에도 당신의 논문이 맞다고 생각한다면 그때는 우리도 두말없이 물러서죠.”
나는 최영현과 형사들에게 눈짓을 하고 빠르게 사무실을 벗어났다. 뭔가 있다는 걸 직감한 최영현과 형사들이 우당탕 소리를 내며 뛰어나가는 검사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는 마이클 박사의 중얼거림이 들려온다.
“What th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