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188화
15. 기묘한 시신(10)
명륜 4가 승용빌딩 지하 7층 주차장.
종로 경찰서 강력 3반의 승합차와 내 SUV가 동시에 지하 7층에 도착했다.
빙글빙글 돌아 내려오느라 잠시 어지러웠던 나는 목을 풀며 주변을 보았다. 저 멀리 관우가 커다란 철제 가방과 연결된 헤드폰을 쓰고 손을 흔드는 것이 보인다.
나는 액셀을 밟아 관우 앞에 차를 세운 뒤 내리며 물었다.
“여기야?”
“예, 과장님. 찾느라 죽을 똥 쌌습니다. 저 밤 꼬박 샜다고요.”
“술 제대로 산다.”
“진짜 좋은 술 사주실 겁니까? 또 포장마차 가는 거 아니죠?”
그때 날 따라온 승합차에서 내려 바람처럼 달려온 최영현이 관우 목을 꽉 붙잡으며 말했다.
“예쁜 새끼! 내가 산다! 죽이는 곳에 가서 양주 먹여줄 테니까 빨리 뭘 발견했는지 말해!”
“어! 이 무식한 근육돼지! 오랜만에 보는데 보자마자 이럴 거예요?”
“하하! 그래, 그래. 오늘은 뭐라고 불러도 다 용서해 준다. 오타쿠 자식!”
“아! 나 오타쿠 아니라 매니아라니까요!”
“뭐든 인마! 빨리! 어디야?”
관우가 목을 붙잡힌 채 인상을 쓰며 한쪽을 가리킨다.
“저기…… 수색영장…….”
아저씨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형사들이 무서운 눈빛을 쏘아 보낸다. 기세에 압도된 아저씨가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힉! 아, 아닙니다. 열어드리겠습니다. 하, 하지만 건물주에게 연락을 해야…….”
“열어주고 연락하세요. 필요하면 수색영장은 추후에 받아드리죠.”
“예…….”
아저씨가 문을 여는 것을 본 나는 관우에게 말했다.
“KCSI로 연락해서 출동하라고 해.”
“예, 과장님.”
“건물주와 계약한 대여자가 누구인지도 알아보고.”
“예.”
문이 열리자, 예전에 쓰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부식된 보일러 기계들이 보인다. 그리고 구석에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 미닫이 파티션이 보인다. 천장부터 바닥 끝까지 완벽히 뒤를 가린 파티션이다. 최영현이 달려가 파티션을 열려 했으나 자물쇠로 잠겨 있는 파티션.
최영현이 주변을 보더니 쇠지레를 구해 자물쇠를 부수기 시작한다. 무거운 철제 가방을 끌고 들어온 관우가 그 모습을 보고는 혀를 찬다.
“저 선배님 여전하네. 수색영장도 없이 와서 기물파손 했는데 아무것도 안 나오면 어쩌려고.”
최영현은 엄청난 힘을 가진 형사다운 움직임으로 단 세 번의 가격으로 자물쇠를 부숴 버린 후 파티션을 열었다.
눈치 빠른 현중이가 모두가 볼 수 있게 파티션을 활짝 열자, 안의 전경이 들어온다. 최영현이 잔뜩 인상을 쓰며 말했다.
“씨X, 여기 빌렸다는 놈이 사람이 아니라 돼지였냐?”
나는 파티션 안쪽에서 풍기는 냄새에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음식물 썩는 냄새가 난다.
나는 장갑을 끼며 말했다.
“중요 현장일 수도 있으니 모두 장비 착용하세요.”
형사들이 얼른 주머니를 뒤져 장갑과 발싸개를 착용한다. 맨 먼저 장비 착용을 마친 내가 제일 먼저 안으로 진입해 육안으로 대략적인 구조를 살폈다.
파티션 안쪽은 약 열 평 남짓한 공간. 빙 둘러 책장이 있는데 책 대신 CD들이 두서없이 널려 있다. 모두 일본제 AV(야동)이다. 한국에 정식 수입 루트가 없으니 일본에서 직접 수입한 것이리라.
책장 가운데 32인치 모니터가 연결된 데스크탑이 있고, 바닥은 쓰레기장 같다. 빈 소주병과 먹다 만 라면이 쏟아져 있는 너저분한 곳.
사람이 생활하는 곳인지, 돼지가 사는 곳인지 분간이 안 갈 만큼 지저분하다.
데스크톱을 본 나는 관우에게 눈짓했다. 관우가 빠르게 달려와 PC 앞에 앉으며 손가락을 푼다. PC의 전원 버튼을 켠 관우가 씩 웃으며 말했다.
“호, 보안의식이 투철하신 분이네 그려. 하지만 내 앞에선 소용없지. 시작해 볼까?”
최영현이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꼭 그런 만화에나 나올 오그라드는 대사를 하고 일을 시작해야 직성이 풀리냐?”
관우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그럼 하지 마요?”
“아니.”
“하기 싫다, 갑자기.”
“아이고, 정관우 경위님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자자, 고정하시고 얼른 시작하시죠.”
“허허, 그럴까요, 최영현 경위님? 아, 그러고 보니 우리 이제 같은 계급이네요?”
최영현이 주먹을 부르르 떨었지만, 지금은 관우 신경을 거스를 수 없다 생각했는지 입맛을 다시며 다른 곳을 뒤진다.
나는 관우 옆으로 가 잠겨 있는 윈도우 화면을 보며 물었다.
“얼마나 걸려?”
관우가 핸드폰과 PC를 연결하며 말했다.
“10분이면 됩니다.”
“O.K.”
10분이면 KCSI가 도착하기 전이다. 빨리 확인할 것만 하고 백승현을 긴급체포해야 된다. 아직도 검찰청에 앉아 주현성 검사를 압박하고 있는 닥터 마이클이 그의 24시간 감시를 해제하기 전에.
책장에 잔뜩 꽂힌 AV CD를 몇 개 빼 표지를 본 최영현이 인상을 썼다.
“이 새끼 취향 봐라. 변태 새끼.”
최영현이 케이스에 담긴 CD를 내밀며 내게 말했다.
“교복, 강간물이 엄청 많습니다.”
교복과 성폭행에 관련된 영상물. 한국에서 정식 수입할 수 없다고 하지만 케이스를 보았을 때 일본에서는 정식 발매한 영상물이니 이것은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닌 컨셉을 잡고 찍은 영상일 것이다.
나는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적나라한 케이스 겉면을 보았다.
여학생 분장을 한 여성 배우가 폭행당하고 있는 장면을 찍은 사진. 나는 가만히 그것을 보다 다른 CD를 집었다.
이번에는 온몸에 시뻘건 멍이 들어 눈물이 고인 여성의 얼굴 사진이 표지이다. 범인은 폭력적 성향을 표출하며 살거나, 숨기고 사는 자이다.
책장을 다 들어내고 뒤에 뭐가 있는지, 혹시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 뭐가 없는지 확인하는 형사들.
나는 관우가 잠금을 풀 때까지 기다리다 밖에서 나는 차 소리에 파티션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KCSI 요원들이 출동한 모양이다.
나는 차에서 제일 먼저 내리는 사람을 보곤 실소를 흘렸다.
“목 과장님이 현장까지 오셨네.”
어지간히 사건 해결에 목이 탔던 모양이다. 현장에 나오는 일은 별로 없는 분이 제일 먼저 버선발로 뛰고 계신 걸 보니.
목 과장님이 장비가 든 가방을 들고 뛰어오며 손을 흔든다.
“도경아!”
그와 동시에 뒤에서 관우의 목소리가 들린다.
“풀었습니다, 과장님.”
나는 목 과장님께 손을 흔들어준 뒤 관우 옆으로 왔다. 그새 파티션 안으로 뛰어 들어온 목 과장님이 득달같이 외친다.
“전부 스톱! 누가 현장을 훼손하고 그래, 이 망할 새끼들아! 전부 손 떼!”
최영현과 형사들이 장갑 낀 손을 보여주자 그제야 안심하는 목 과장님이 한숨을 쉰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더 만지지 말고 나가 있어. 이제부터 우리가 맡는다.”
KCSI는 엄연히 경찰조직이다. 물론 일선 형사들은 현장에 나가 수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들은 경찰과 같은 계급체계를 공유하므로 목 과장님쯤 되는 인사의 명령에 불복할 수 없다.
안면이 있어 개기는 최영현을 제외하고 다른 형사들이 모두 나가자, PC를 확인 중인 관우와 내 옆으로 다가온 목 과장님이 말했다.
“관우, 잠깐만 비켜. 지문 뜨게.”
“예, 과장님.”
PC를 확인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지문 채취가 더 중요하다. 목 과장님이 키보드 위에 알루미늄 가루를 흩뿌린다. 하지만 키보드에는 아무 지문도 나타나지 않는다.
눈썹을 꿈틀거린 과장님이 이번에는 닌하이드린(Ninhydrin)용액을 분사했다.
지문이 찍힐 때, 기름 성분과 함께 피부의 단백질을 이루는 소량의 아미노산도 묻어나는데 1954년 스웨덴 과학자 스반테 오덴(Svante Oden)에 의해 이 성분이 닌하이드린과 반응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고, 이를 활용한 액체법이 개발된 이후에 이 기법은 수사에 전방위적으로 사용되는 방법이다.
목 과장님은 용액을 뿌린 후 키보드를 자세히 바라보더니 이번에는 마우스에 용액을 분사했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지나자 과장님 입에서 욕설이 나온다.
“이런 씨X 새끼가.”
과장님이 이렇게 차진 욕을 하시는 건 처음 봤다. 항상 고고한 학자나 마음 좋은 선배님 같은 느낌이었는데. 관우가 키보드와 마우스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우와, 꼼꼼한 새끼. 키보드와 마우스에 지문이 없다고?”
목 과장님이 화난 얼굴로 관우에게 물었다.
“키보드, 마우스 여분 있어?”
“네.”
“네 거 써. 이거 뜯어간다.”
“시아노아크릴레이트(Cyanoacrylate) 돌리시게요?”
“그렇게 해봐야지.”
시아노아크릴레이트(Cyanoacrylate)를 이용한 훈증법은 주로 물체에서 지문을 채취할 때 사용한다.
밀폐된 공간에 잠재 지문을 가진 물체를 넣고, 시아노아크릴레이트를 기화시키면 지문 속 수분과 반응하여 하얗게 굳은 지문을 얻을 수 있다. 최근에는 진공펌프를 접목하여 보다 더 선명한 지문을 채취할 수 있다고 들었다.
목 과장님이 허리춤에 손을 올리며 파티션으로 분리된 입구를 보며 버럭 소리를 지른다.
“빨리 움직여! 거기! 사진 제대로 남기면서 들어와! 오늘 여기서 범인 새끼 증명 못 하면 기회 없어! 마지막 기회라고, 이 자식들아! 정신 똑바로 차려!”
그사이 자기 개인 키보드와 마우스를 연결한 관우가 혀를 찬다.
“하, 이 새끼 성격 참. 윈도우 메인 화면에 폴더가 백 개도 넘는다고?”
관우 말에 화면을 보니 정리되지 않고 열도 맞지 않는 폴더가 화면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는 것이 보인다. 최영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증거 영상 찾으려면 시간 좀 걸리겠지? 이 많은 걸 언제 다 뒤지고 앉았냐?”
관우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 누나가 이럴 때 도움이 될 줄 몰랐네요.”
“뭔 소리야?”
관우가 Ctrl + f 버튼을 누르자 탐색기가 실행된다. 실실 웃는 관우가 말했다.
“어릴 때 우리 누나가 제 PC에서 야동 찾을 때 쓰던 방법입니다. 이거 때문에 제대로 걸려서 겁나 처맞았죠.”
탐색기에 ‘.avi’라는 검색어를 넣자 와르르 쏟아져 나오는 동영상 검색결과들. 최영현이 소름 돋는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와, 우리 마누라가 알까 봐 겁나네. 씨X 소름 돋아. 저렇게 쉽게 찾을 수 있는 거면 괜히 시스템 폴더에 숨겨놨었네. 어우.”
관우가 키보드를 연타하며 웃는다.
“나중에 아들놈 PC 검사할 때 써먹어보시든가, 킬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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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나를 비롯한 형사들의 고개가 관우가 가리킨 방향으로 획 돌아간다. 보일러실이라고 써 있는 문이 있다.
현중이가 제일 먼저 달려가 보일러실 문을 열어봤지만 잠겨 있다. 최영현이 바로 지시를 내린다.
“올라가서 관리 아저씨 데려와. 마스터 키 가지고 오라고 하고.”
“예, 팀장님.”
다른 형사들도 뭔가 돕기 위해 함께 올라가고 나와 최영현, 관우만 남았다.
난 관우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물었다.
“어떻게 찾았어?”
관우가 땅에 내려놓은 철제 가방을 열자, 레이더 같은 화면과 버튼이 잔뜩 있는 기계가 보인다.
“송수신기는 고유 신호가 있어요. 이 신호가 없으면 출력된 신호가 어디로 갈지 모르니까 반드시 같은 신호로 연결된 기계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 신호를 추적하는 건데 여기 명륜4가 12번 블록으로 신호가 집중되고 있는 걸 발견하고 새벽부터 이거 들고 이 블록을 다 돌아다니느라 죽을 뻔했죠.”
그러니까 이 무거운 기계를 들고 일일이 다니면서 신호가 강하게 나오는 곳을 찾아냈다는 뜻이구나. 대단한 자식.
최영현이 관우 등을 마구 때리며 머리를 헝클어뜨린다.
“예쁜 오타쿠 새끼! 뭐 나오면 이 형이 제대로 쏜다!”
“아, 좀!”
잠시 후 영문 모를 얼굴을 한 관리 아저씨를 데리고 온 형사들. 시커먼 남자 형사들에게 둘러싸인 아저씨는 무척 두려운 얼굴이다.
나는 신분증을 보여준 뒤 물었다.
“여기 뭐가 있습니까?”
보일러실 문을 똑똑 두들기며 질문하자, 관리 아저씨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거기는…… 재작년까지 보일러실로 사용하다가, 전체 건물 중앙 히터로 바꾼 후에는 사용처가 없어진 곳입니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겁니까?”
“아뇨, 재작년에 건물주가 어떤 사람한테 대여해 줬다고 들었는데. 저희는 잘 모릅니다.”
“열어주시겠습니까?”
관리 아저씨가 머뭇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