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인의 기억-189화 (188/328)

살인의 기억 189화

15. 기묘한 시신(11)

이름을 말하기도, 입에 담기도 싫은 제목의 파일들. 최영현이 검색 결과 폴더에 표기되고 있는 영상 파일 제목들을 보다 혀를 찬다.

“이 새끼는 살인죄도 죄지만 불법영상 소지죄로도 체포 가능하겠네.”

어찌 보면 희망적인 소식일 수도 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이곳의 소유주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최영현이 허리춤에 손을 얹고 말했다.

“백승현의 집에 있던 곰 인형과 연결된 송수신기가 여기 있는데 누구 소유이겠습니까? 당연히 백승현이지.”

나는 최영현을 보며 말했다.

“아뇨. 만약 백승현이 살인자이고, 만삭의 자기 아내를 죽였다면 이놈은 살인죄도 피해갈 수 있을 만큼 치밀한 범인입니다. 버젓이 자기 이름으로 이곳을 빌리진 않았을 겁니다.”

헤드폰을 쓰고 영상을 확인 중이던 관우가 핸드폰의 문자를 확인한 뒤 손을 든다.

“여기, 부동산 대여한 사람 이름 나왔습니다.”

최영현이 팔짱을 끼고 웃는다.

“백승현이지?”

“아뇨?”

“아니야? 그럼…… 장모인 지희경?”

“아뇨, 남자 이름인데.”

“뭐? 누구?”

“양진승이란 사람인데요?”

최영현은 처음 듣는 이름에 순간 멍한 얼굴로 중얼거린다.

“양진승? 그건 또 뭐 하던 놈이 갑자기 나타난 거야?”

“저야 모르죠.”

최영현이 파티션 밖으로 나가 쫓겨나 있던 강력 3반 형사들에게 고함 친다.

“부동산 소유주 이름 양진승! 나가서 뭐 하는 놈인지 잡아와! 이 새끼 이거 소지하고 있는 불법 야동만 가지고도 체포 가능하니까 바로 움직여.”

최영현이 한숨을 쉬며 다시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나는 PC에 떠오른 수백 개의 파일들을 보며 관우에게 말했다.

“사건 영상이 있다고 가정하면 찾는 데 얼마나 걸릴까?”

관우가 목 뒤로 깍지를 끼며 눈알을 굴린다.

“음…… 일단 제목이 일반 야동 파일이 아니라, 전송파일처럼 일련의 영문과 숫자로 이루어진 파일을 먼저 본다고 가정하면 금방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 밑에 보시면 영상 확장자 파일이 8,314개로 나오죠? 만약에 이 자식이 이 많은 파일 중에 유사한 제목으로 바꿔놔서 데이터 분류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면 이걸 다 확인해야 됩니다. 그럼 하루 이상 걸릴 거고. 최악의 경우는…….”

최악? 여기서 더 최악이 있나? 관우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일반 야동을 편집해서 중간부터 영상을 넣어서 숨겨놨다면…… 8,314개의 파일을 전부 확인해 됩니다. 파일 1개당 평균 영상 길이가 116분으로 나오는데 116 곱하기 8,314면…… 964,424분이네요. 빨리 감기로 확인한다고 치고 2배속으로 계산해도 확인하는 데 482,212분이니 8,000시간쯤 걸리죠.”

“…….”

“지원 불러서 한 스무 명이서 확인한다고 치면 두 당 401시간을 확인해야 되는 겁니다.”

헐. 그렇게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고? 관우가 헤드폰을 벗고 PC를 끈 후 하드를 떼어내며 말했다.

“여기서 혼자 하려면 사후 세계에서나 영상 찾아낼 수 있을 거예요. 본부 가져가서 분석하겠습니다.”

“본부? 차라리 종로경찰서 사람들과 나눠서 하지. 본부 가면 너 혼자 해야 되는데.”

관우가 씩 웃는다.

“저 정관우입니다, 과장님.”

“방법이 있어?”

“아는 방법 다 동원해 보죠, 뭐. 언제 스무 명이 사백 시간을 뒤집니까.”

관우가 엄지를 들며 말한다.

“한번 맡겨주세요. 이틀 안에 못 찾으면 지원팀 부르겠습니다.”

그래, 이런 업무에 관우만 한 녀석은 없지.

“그래, 믿는다.”

“히히.”

“빨리 복귀해.”

“네, 과장님. 충성.”

넉살 좋은 관우는 현장 감식 중인 목 과장님께 굽실거리며 인사한 후 나간다.

나는 팔짱을 끼고 있는 최영현에게 말했다.

“보일러실 대여한 사람. 빨리 찾아서 취조해 주세요. 현재 상황에선 백승현보다 양진승이라는 사람 쪽을 더 중요도 높은 용의자로 봐야 됩니다.”

“예, 알겠습니다.”

밑에 형사들에게 지시했지만 자신도 움직이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최영현도 현장을 벗어난다. KCSI 요원들만 남은 현장.

나는 바닥을 자세히 살피고 있는 목 과장님 옆에 가 쪼그리고 앉았다.

“뭐 좀 나왔습니까?”

목 과장님은 바닥에 용액들을 흩뿌린 후 심각한 눈으로 말했다.

“용의주도한 놈이야. 이런 개인적인 공간에서까지 지문을 감추려고 장갑을 끼고 생활한 것 같다.”

“음. 이번에도 증거 찾는 게 힘들까요?”

목 과장님이 날카로운 눈으로 현장을 살핀다.

“이번엔 절대 안 놓쳐. 네가 여기까지 수사해서 떠 먹여주는데도 못 받아먹으면 내가 옷을 벗어야지. 여긴 맡겨라.”

나는 의지에 차 보이는 목 과장님을 보며 빙긋 웃었다. 이 정도 각오라면 없던 증거도 나올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다. 부디 주 검사가 마이클 박사의 압박을 잘 벗어나야 할 텐데. 백승현의 감시가 해제되면 혹시 은닉하지 못한 다른 증거가 은폐될지도 모른다. 반드시 막아야 한다.

* * *

서울 중앙지검.

현장 발견 후 즉시 검찰청으로 온 나는 주현성 검사의 방으로 갔다.

이미 한번 들러 그런지 수사관은 말없이 인사를 한 뒤 검사에게 내 방문 사실을 알렸고, 나는 금방 검사를 만날 수 있었다.

주름진 얼굴의 주 검사가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뭘 발견한 겁니까?”

나는 관우가 발견한 송수신기와 연결된 아지트에 대해 설명했다. 설명하는 내내 시종일관 눈썹을 꿈틀대던 주 검사가 물었다.

“그러니까, 그 곰 인형의 눈에 설치된 카메라 송수신기에 사건 당시 파일이 녹화되어 있으면 게임 끝이다?”

“아닙니다, 검사님. 아지트의 실 사용자가 백승현인지 확인해야 됩니다.”

주 검사가 팔짱을 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건 당시 영상이 있으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없다. 그저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지금은 없지만, 정황상 곰 인형의 눈에 카메라를 부착할 이유가 없습니다.”

“음…… 그건 그렇네요.”

“감시는 어떻게 하기로 하셨습니까?”

주 검사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말했다.

“일단 생각해 보겠다고 하고 보냈습니다만, 24시간을 기다린 후, 다시 변호사를 대동하고 오겠다고 하더군요.”

24시간이라. 관우가 제시한 시간은 이틀이다. 그것도 아주아주 운이 좋을 경우에 그렇다.

“좀 더 시간을 끌어주실 수 없습니까?”

“음…….”

주 검사가 턱을 괴고 검지로 소파 팔걸이를 툭툭 두들기며 날 바라본다.

“과장님.”

“예.”

“백승현이 범인이라고 확신하십니까?”

“아니요.”

“음? 아니라고요?”

“경찰은 무엇도 확신해선 안 됩니다. 확신하는 순간 편견이 생기니까요.”

주 검사는 흔들림 없는 내 눈빛을 가만히 바라보다 실소를 지었다.

“자신감 있는 말투로 밀고 나가는 형사들보다 더 믿음이 가는군요. 좋습니다, 내가 어떡하든 시간을 더 끌어보죠. 하지만 길어야 48시간입니다. 그때까지 증거를 가져오세요. 범인이 백승현이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48시간 정도는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겁니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 검사가 빙긋 웃는다.

“경찰청장님이 직접 보증하신 과장님을 어떻게 안 믿겠습니까?”

응?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주 검사가 웃으며 말했다.

“좀 전에 청장님께 직접 전화가 왔습니다.”

“청……장님께서 직접이요?”

“예, 현 과장님은 경찰 최고 엘리트라며 한번 믿어보라고 하시더군요.”

“…….”

“전 한번 해보려고 합니다. 검찰 내부에서도 현 청장님을 존경하는 인사들이 많습니다. 그 정도 믿음을 주시는 분은 입도 마음도 무거운 법인데 그런 분이 입에 ‘보증’이라는 단어를 올릴 정도의 인물이라면 저도 한번 믿어보고 싶군요.”

“…….”

칭찬은 고마운데 더럽게 부담스럽구나. 아저씨는 괜한 소리를 해가지고. 주 검사가 웃으며 말했다.

“바쁘실 텐데 빨리 가 보시죠.”

“……예, 감사합니다.”

떨떠름한 얼굴로 검사실을 나와 중앙지검 로비로 내려오자 기둥 앞에 익숙한 얼굴이 팔짱을 끼고 기대 있는 것이 보인다.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사람 얼굴을 본 나는 나도 모르게 멈칫하며 중얼거렸다.

“오 선배님?”

기둥에 기대서 있는 자는 오진규였다. 그는 날 보며 다가와 말했다.

“이거 서운합니다?”

“예? 뭐가…….”

“과장님이 직접 움직이는 사건인데 절 안 부르신 거 말입니다.”

“아…… 신입 형사들 OT 가셨다고.”

“그래서 끝나고 바로 왔습니다, 하하. 연주도 오고 싶어 했는데 다른 부서 지원 업무가 너무 많아서 울고 싶다며 하소연을 하더군요. 과장님 옆에 붙어 있어야 되는데 뭐 하고 있나 싶다면서. 하하.”

“…….”

“제가 돕겠습니다.”

오진규가 도와준다면 나야 당연히 좋다. 이만한 형사는 찾아보기 힘드니까. 오진규는 내 얼굴이 밝아지는 걸 보곤 눈을 살짝 찡그리며 웃는다.

“어떤 사건인지 대충은 들었는데. 자세히 좀 말씀해 주세요.”

“차로 가서 이야기하시죠.”

나는 차를 타고 이동하며 사건 브리핑을 해주었다. 가만히 사건의 흐름을 듣고 있던 오진규는 내 말이 끝난 후에 질문을 한다.

“그래서 지금은 관우가 영상을 찾고, 강력 3반이 양진승을 찾기를 기다리면 되는 겁니까?”

“네, 일단은 그렇습니다.”

“음…… 양진승이라…… 그거 쉽지 않을 텐데.”

“부동산 계약서를 확보해서 상대 주민등록번호까지 입수한 상태입니다. 주소와 전화번호도 확보했고. 찾기 어렵진 않을 겁니다.”

오진규는 내 말에 말없이 웃는다. 뭔가 의미가 담긴 웃음 같은데? 왜 그러냐 물으려는 찰나, 최영현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양진승을 찾으러 갔던 그인데. 벌써 잡은 걸까?

“예, 최 팀장님.”

-하, 과장님. 양진승 주소지에 왔는데 그런 사람 없답니다. 월세 이체하는 은행 기록도 뒤졌습니다만, 핸드폰으로 이체한 기록만 있고.”

“핸드폰 추적해 보실 겁니까?”

-지능범죄 수사팀에 의뢰해서 은행 이체를 한 핸드폰을 추적했는데 양진승 본인 명의로 된 핸드폰이 맞습니다. 문제는 이 핸드폰이 꺼져 있다는 겁니다. 이 새끼 찾으려면 시간 좀 걸릴 것 같은데.

“…….”

나는 조수석에 앉은 오진규를 바라보았다. 아까 오진규가 양진승을 찾아내기 어려울 거라고 했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오진규가 말없이 미소 짓고 있는 걸 본 나는 그에게 뭔가 방법이 있을 거란 생각에 일단 전화를 끊었다.

“알겠습니다, 일단 최대한 빨리 찾아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나는 운전대를 잡고 오진규에게 물었다.

“이렇게 될 거 알고 계셨죠?”

오진규가 어깨를 으쓱한다.

“아뇨, 굳이 말하자면 이렇게 될 확률이 높겠다 싶었다고 하는 쪽이 옳죠.”

“왜 그렇게 생각하신 겁니까?”

오진규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비슷한 일을 겪어봤거든요.”

음, 오진규는 매우 오랜 시간 경찰 경력을 쌓은 사람이다. 그 많은 시간 중에 맞닥뜨렸던 사건 중에 비슷한 사건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찾을 방법 있습니까?”

오진규가 차창 밖을 살피다 창문을 두들긴다.

“잠깐만 세워주세요.”

응? 갑자기 차는 왜 세워? 오진규는 차가 멈추자 내려서 바로 앞에 있는 편의점에 들어간다. 설마 이 시국에 담배라도 사러 간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그렇게 개념 없는 사람은 아니지.

편의점에서 나온 오진규의 손에 큰 봉투 두 개가 들려 있다. 무척 무거워 보이는 봉투를 뒷좌석에 싣는 오진규. 뒤를 돌아본 나는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이거 다 소주입니까?”

오진규가 조수석에 타며 빙긋 웃는다.

“수사 비용으로 인정해 주셔야 됩니다? 여기 영수증도 끊어왔습니다.”

오진규가 내미는 소주 영수증. 무슨 소주를 40병이나 구입한단 말인가?

“저게 수사에 필요한 물건이라고요?”

오진규가 씩 웃으며 눈짓한다.

“탑골공원으로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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