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191화
15. 기묘한 시신(13)
KCSI.
목 과장이 무서운 기세로 요원들을 몰아치고 있다.
이번에 발견된 아지트에서 나온 증거품들을 테이블 위에 쏟아낸 목 과장이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모조리 사진으로 남겨. 지문 쪼가리 하나라도 놓치는 놈은 내년 이맘때 제사상 받게 될 거다. 숟가락 놓고 싶으면 놓쳐.”
평소와 다른 목 과장의 모습에 기겁을 한 요원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목 과장은 모니터 방으로 나와 화면을 통해 하나씩 사진으로 남겨지고 있는 증거품들을 보며 지시를 내린다.
“증거번호 32-109번 다시 확대.”
“증거번호 33-004번 사진 다시 찍어.”
“증거번호 38-013번 오른쪽 상단에 묻은 이물질 성분 검사 돌려.”
단 하나의 증거도 놓치지 않겠다는 집념. 목 과장의 눈이 이글거린다.
“이번에는 안 진다.”
같은 시각 국가수사본부 수사과 사무실.
아지트의 하드를 떼어온 관우가 영상물을 하나씩 눌러보다 눈을 비비며 시간을 본다. 벌써 몇 시간이나 이놈의 더러운 영상물을 확인하니 머리가 썩는 기분이 든다.
관우가 윈도우 화면으로 나와 몇백 개의 폴더를 제목으로 정렬시키고 빤히 폴더명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이 중에 분명히 있어. 하, 진짜 이 많은 걸 다 확인해야 된다고?”
관우 눈에 들어오는 폴더 제목들.
알 수 없는 영문과 숫자로 된 폴더 속 파일들은 이미 확인을 끝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찾지 못했다. 나머지 중에 있다.
관우는 먼저 폴더의 이름 중에 윈도우가 제공하는 자동 이름 붙이기에 의해 탄생한 폴더를 한쪽에 몰아넣었다.
“직박구리, 부엉이, 뻐꾸기, 논병아리, 발구지, 기러기, 올빼미…… 빌 게이츠가 새를 좋아하나, 왜 전부 새 이름이야?”
이미 확인한 폴더는 새 폴더를 생성 후 보관해 둔다. 나중에 다시 확인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편의를 위해 삭제하면 안 된다.
나머지 파일은 모두 영문 파일이다. 아는 단어도 있지만 모르는 단어도 있고, 영어도 있지만 타국의 언어도 보인다. 예를 들면 ‘Bonjour’ 같은 폴더이다.
“이걸 어떻게 정리해 볼까…….”
A to Z로 정리해 보기도 하고, 생성일을 기준으로 정리해 보기도 한다. 사건이 발생한 날짜를 기준으로 그보다 뒤에 생성된 폴더의 영상을 확인해 보기로 한 관우가 다시 정렬을 시켰지만 사건 발생 후에 생성된 폴더는 없다.
다시 한숨을 쉰 관우가 이번에는 암호가 걸린 폴더를 따로 정렬했다.
폴더는 총 30개. 이 중에 영상이 있을 확률이 높다.
“어디 보자…… 폴더 제목이 Adult…… 이건 넘어가고. 이건 Rape…… 씨X 변태 새끼.”
폴더 이름을 확인하던 관우 눈에 이상한 파일이 눈에 띈다.
“이건 왜 이래?”
마우스로 중앙까지 끌고 온 폴더. 제목이 ‘emaNyM’이다. 아까 단어로 볼 수 없는 영문 파일을 분류하다 빠진 모양이다. 폴더를 다시 이동시키려던 관우가 멈칫한다.
“잠깐만…… 이거.”
파일명. 말은 안 되는데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든다. 파일 제목을 뚫어지게 보던 관우가 손가락을 튕긴다.
“아, My Name이구나. 거꾸로 써 있어서 몰랐네.”
왜 거꾸로 쓴 거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히 수상한 파일이다. 관우는 이 파일을 따로 확인해야 할 30개의 파일 폴더에 넣은 후 손가락을 풀며 시간을 확인한다.
“한 폴더 암호 푸는 데 30분. 총 30개니 900분이라. 영상 확인하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세 배. 2,100분. 앞으로 35시간이다.”
물론 이 모든 건 자신이 분류한 30개의 폴더 속에 목표로 한 영상물이 존재할 경우에 한해서이다.
“한번 걸어보는 거지, 인생 뭐 있어?”
손가락을 충분히 푼 관우의 손이 키보드 위를 춤추기 시작한다.
* * *
박스를 깔고 있지만 바닥을 뚫고 올라오는 한기가 뼈를 관통한다. 평소에 박스는 꽤 푹신할 거라 상상했는데 막상 누워보니 옆으로 눕느라 지면에 닿은 옆구리와 골반뼈가 비명을 지르고 있다.
제길, 이게 무슨 고생이냐. 양 사장인지 하는 놈 찾는다고 이 고생을 해야 하다니.
나는 옆으로 누워 자는 척을 하며 이를 갈았다. 범인이 백승현인지 아니면 노숙자인 양 사장인지는 아직 모른다. 어쨌든 누구든 잡히기만 하면 갈아 마셔 버릴 거다.
나는 뒤척거리는 척을 하며 반대로 누워 실눈을 떴다. 지하철을 오가는 사람들이 날 보며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 보인다. 진짜 거지로 보이는 거냐? 난 옷도 멀쩡한데. 하긴 박스를 덮고 있으니 비슷해 보이겠지.
내 옆자리를 보니 오진규가 누워 있다. 뭐야? 이 아저씨 왜 이리 숨 쉬는 게 일정해? 설마 진짜 자는 거야? 나는 가만히 오진규를 바라보았다.
“드르렁…….”
헐, 이 상황에 진짜 잘 수 있다고? 아무리 소싯적부터 잠복을 밥 먹듯이 하던 형사라 어디든 머리만 눕히면 잘 수 있다고 하지만 여긴 지하철 통로라고.
나는 한숨을 쉬며 다시 주변을 살폈다. 노숙자들의 숫자는 우리가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와 같다. 아직 새 얼굴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나는 다시 돌아누우며 한숨을 쉬었다. 벌써 여기 잠복한 지 두 시간이 지났다.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되는 걸까?
“개새끼, 잡히기만 해.”
나직하게 중얼거리던 그 순간. 나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다행이다. 편안히 누운 자세로 기억을 읽을 수 있어서. 눈을 뜨고 있으면 세상이 쪼개지며 흩어진다. 그때 느끼는 어지러움은 상당히 크다. 누워 있는 김에 눈도 감는 쪽이 낫다.
한참 질끈 눈을 감고 있던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아주 어두운 집. 새벽 시간인 것 같고 불은 모두 꺼져 있다.
나는 어느 집 안방에 우두커니 서 있다. 눈앞에 보이는 침대에 누군가가 누워 있는 것이 보인다. 옆으로 누워 자는 것 같은 사람. 머리가 보이는 것은 한 명이다.
하지만 그 옆의 이불도 불룩하다. 이불 속에 있는 이가 한 사람인지 두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옆의 이불 속에 사람이 아닌 베개가 들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백승현의 집이다.’
불과 얼마 전에 방문했기에 집 구조를 정확히 떠올릴 수 있다. 나는 어두운 방에 서서 가만히 침대를 내려보다가 고개를 돌려 화장대 쪽을 보았다.
화장대 옆의 기다란 진열장에 올라가 있는 핸드백들이 보인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맨 위에 있는 곰 인형을 꺼냈다.
동그랗고 까만 인형의 눈을 들여다보던 나는 화장대 서랍을 열어 안경을 닦는 수건을 꺼내 반짝거리는 눈알을 닦았다. 조용히 소리가 나지 않게 움직이고 있는 나.
기억 속의 나는 과연 백승현일까? 아니면 그들이 자는 틈에 침입한 3자일까?
나는 곰 인형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낸 뒤 인형을 뒤집었다. 귀여운 엉덩이에 아주 작고 동그란 꼬리가 붙어 있다. 꼬리에 묻은 먼지도 털어내는 나. 그런데 꼬리 쪽에 작은 자수가 보인다.
‘Elle.’
엘르? 엘리? 곰 인형의 이름인 걸까? 나는 곰 인형을 다시 선반에 잘 올려두었다.
나는 다시 한번 침대에서 자는 사람을 바라보다, 천천히 거실로 나갔다. 이제부터 본론일 거다. 난 뭘 보게 되는 걸까?
바로 그때 누군가 뒤에서 날 발로 차는 충격이 느껴졌다.
“헉!”
정신을 집중해 읽고 있던 타인의 기억이 와장창 깨진다. 유리 파편처럼 흩어져 버리는 기억들. 나는 아쉬운 마음에 기억의 파편을 움켜쥐려 했지만 손안에 들어온 파편은 다시 여러 개로 쪼개져 버린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의 고함 소리가 들려온다.
“야이 싸가지 밥 말아 먹은 거지 새끼야! 일어나라고!”
나는 기억 속의 파편들을 잡으려 허우적거렸다. 그때 다시 한번 등에 발길질을 당한다.
퍽!
“야이 새끼야!”
나는 등을 활처럼 휘며 뒤를 돌아보았다. 더러운 몰골. 카키색 아우터를 입고 다 떨어진 바지를 입은 50대 초반의 남성이 화난 얼굴로 내 옆에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기억을 읽는 도중에 방해를 받아 잔뜩 화가 난 내 얼굴을 보고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 남자.
“어쭈? 이 새끼가 적반하장도 아니고. 너 이 새끼야. 누가 여기서 자라고 했어?”
나는 인상을 쓰고 주변을 보았다. 지하철 통로에 누워 있던 노숙자들이 소란을 듣고 이쪽을 보고 있다. 반대편을 보니 오진규가 팔자 좋게 잠들어 있는 것이 보인다.
나는 다시 날 때린 노숙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여기 자리가 정해져 있습니까?”
“하? 당연하지. 이쪽 세계에도 룰이란 게 있어. 너 언제부터 여기 왔어?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얼마 안 됐습니다.”
남자가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말하기도 귀찮으니 꺼져. 여기 내 자리야.”
남자가 발로 날 민다. 나는 남자에게 밀려 박스 밖으로 밀려났다. 몸을 일으켜 세워 앉은 나는 남자를 보며 물었다.
“여기 원래 빈자리였습니다.”
“어, 아냐. 여기 내 별장이야.”
별장? 미친 소리를 하고 자빠졌네. 아! 잠깐만. 나 지금 양 사장 기다리는 중이었지.
나는 남자의 행색을 물끄러미 보았다. 내가 얻어온 박스 위에 앉아 품에서 소주병을 꺼내 소중하게 옆에 두는 남자.
나는 슬쩍 말했다.
“양 사장?”
남자가 멈칫하더니 날 바라본다.
“뭐?”
“양 사장이라고 불리는 분 맞습니까?”
“너 뭐야?”
“별일 아닙니다. 소문을 들어서.”
“소문?”
“예, 이쪽에서 아주 대단한 분이라고. 혹시 만나게 되면 예의 있게 대하라고 들어서요.”
남자가 히죽 웃는다.
“허!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지?”
“공원 화단에 계신 선배님들께 들었습니다.”
“호, 그래?”
“맞습니까? 아, 이거 별거 아니지만.”
나는 옆에 둔 봉투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내 내밀었다. 그러자 남자의 얼굴이 확 밝아진다.
“오! 젊은 친구가 아주 예의가 있네.”
남자는 내 봉투에 아직 많은 병이 있는 것을 보고는 침을 꼴깍 삼킨다.
“그거 다 소주야?”
“예.”
“네 거야?”
“예.”
“나 줘.”
“이거 다 드시면 죽습니다.”
“누가 한 번에 먹는데? 아껴서 먹을 거다. 주기 싫어?”
나는 봉투를 꼭 쥐고 물었다.
“드리는 건 어렵지 않은데. 양 사장님 맞으신 겁니까?”
남자는 어서 달라는 듯 손을 내밀며 말했다.
“맞아, 내가 양 사장이다.”
“증명하실 수 있습니까?”
“내가 나를 어떻게 증명해, 인마. 설마 넌 아직도 신분증 같은 걸 들고 다니냐? 있으면 버려, 괜히 가지고 있다가 경찰한테 걸리면 괜히 파출소 간다.”
“양 사장님 드리려고 가지고 있던 거라서.”
“내가 양 사장이 맞다고 하잖아, 인마.”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
“성함 말입니다.”
“네가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물어?”
“그냥 묻는 겁니다. 진짜가 맞는지.”
“그러니까, 이 새끼야. 내 원래 이름을 모르는데 듣는다고 아냐 이 말이지.”
“그래도 들어볼 겁니다.”
“하, 이 새끼 고집 겁나 세네. 알았다, 알았어.”
남자가 자세를 고치며 앉아 한숨을 쉰다.
“씨X, 잊고 살고 싶은 이름인데.”
남자는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양진승이다. 됐지? 이제 내놔.”
양진승이다. 오진규의 말처럼 진짜 여기 이 사람이 있었다. 양진승이 내가 쥐고 있는 소주 봉투를 빼앗으려 손을 뻗는 것이 보인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목에 달칵 수갑이 채워진다. 자고 있는 줄 알았던 오진규가 대화를 엿듣다 그가 양진승이라는 것을 알아챈 것과 동시에 수갑을 채운 것이다.
양진승이 얼빠진 얼굴로 오진규를 본다.
“넌 또 뭐…….”
오진규가 일어나며 옷을 턴다.
“양진승 씨.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의거, 불법 성착취물 소지죄로 현장 체포합니다.”
양진승이 제 손에 걸린 수갑을 보며 눈을 크게 뜬다.
“무슨 죄라고?”
오진규가 날 힐끔 보며 씩 웃는다.
“이건 현재까지 밝혀진 죄고, 여죄는 서로 가서 확인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