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195화
15. 기묘한 시신(17)
이제는 하도 봐서 익숙한 침실. 이곳은 백승현의 집 침실이다. 나는 외출을 하고 왔는지 손에 들고 있는 박스 두 개를 화장대 위에 올려놓고 의자에 앉아 거울을 보았다.
‘죽은 백승현의 아내다.’
나는 백승현의 아내가 되어 있다. 외출하고 온 것이 분명한데 얼굴에 눈물 얼룩이 있다.
나는 거울을 보다 화장대 서랍을 열어 토너 패드를 꺼내 얼굴을 깨끗하게 닦았다. 하지만 얼굴을 닦으면서도 또 눈물이 나온다.
‘하…….’
한숨을 쉰 나는 불룩한 배를 잠시 내려보며 소중하게 안는다.
나는 한참 배를 바라보다 화장대 위에 둔 박스를 바라보았다. 내키지 않는 손길로 박스를 연 나는 아주 조그마한 기계를 들었다. 완제품이라 따로 설명서를 볼 필요는 없지만 SD카드를 넣는 곳을 찾지 못해 결국 설명서를 찾았다.
카드를 넣는 구멍을 찾아 다른 박스에서 SD카드를 꺼내 넣은 후 배터리를 넣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나. 손에 쥔 작은 기계를 설치할 곳을 찾던 나는 화장대 거울 위의 에어컨을 물끄러미 보았다.
이제 곧 11월이니 에어컨 켤 날씨는 지났다. 아마 한동안 저곳에 손을 대는 일은 없겠지.
나는 화장대 의자 위에 올라가 에어컨 뚜껑을 열고 안에 장비를 넣어 각도를 맞췄다. 그리고 스위치를 켠 뒤 다시 의자에 앉아 위를 올려보며 말했다.
‘흠, 흠…….’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걸까? 나는 에어컨 쪽을 보며 말했다.
‘2025년 10월 23일의 기록.’
기록? 이게 무슨 말일까? 나는 에어컨 쪽을 보며 혼잣말을 시작한다.
‘나는 지금 임신 9개월 차입니다. 오늘 병원에 다녀왔는데 아이는 건강하답니다.’
나는 볼록한 배를 소중하게 만지다 다시 중얼거린다.
‘나는 아마도 몽유병을 앓고 있는 모양입니다.’
나는 그제야 이 사람이 무얼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남편이 친 장난 중 자신이 자는 사이에 벌어진 모든 일을 스스로 수면 중에 움직여 벌인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마른세수를 한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고양이를 죽였습니다. 아니 죽인 것 같습니다.’
‘나는 수면 중에 거실로 나가 화분을 깼습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혼자 하는 고백. 눈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진다. 배를 껴안은 나는 거울 쪽을 보며 말했다.
‘산부인과에 가는 김에 정신건강의학과에 들러 진료를 보고 왔습니다. 몽유병 증세에 대한 확인차 의사 선생님이 수면 중에 모습을 촬영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카메라를 사와 기록을 남기려 합니다.’
나는 기억 속에서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아내 쪽에서도 촬영을 했다고? 이제 이해가 간다. 사건 당일 아내는 남편에게 잔뜩 화가 나 있었고, 귀찮은 표정으로 출근하려던 남편을 끝까지 잡고 따지다 변을 당했다.
아내는 자기 스스로를 촬영하려고 카메라를 숨겼다가 이 모든 것이 남편의 짓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을까? 얼마나 큰 실망을 느꼈을까?
눈물을 훔친 나는 거울을 보며 말했다.
‘아직 남편에게 내 병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확실해지면 그때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배 속에 우리 아기가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 꼭 상의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비밀로 할 생각입니다. 자신이 자는 모습이 촬영된다고 생각하면 가뜩이나 피곤한 남편이 잠까지 제대로 자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일단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침대 위에 있는 시계를 확인한다. 햇빛의 강도를 보았을 때 오후 늦은 시간으로 보이는 시간. 시계는 오후 6시 30분을 가리키고 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설명서를 다시 보았다. 국산 제품인지 설명서가 한글로 되어 있다.
‘총 36시간 연속 촬영. 36시간마다 리셋 필요. 리셋하지 않을 경우 전에 영상만 보관. 새 영상이 저장되지 않으니 주의.’
나는 설명서를 다시 읽어본 뒤 카메라를 힐끗 보고는 주방 쪽으로 가 저녁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주방으로 걸어가는 동안 극심한 어지러움과 함께 세상이 부서지고 깨지기 시작한다.
나는 오랜 경험으로 이것이 기억에서 빠져나오는 순간의 현상임을 눈치채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몸에 감각들이 돌아오고 현실의 소리들이 귀를 파고든다. 달칵달칵하는 소리, 찰칵찰칵 사진을 찍는 소리. 목 과장님의 조용한 지시 내용들이 들어온다.
“hypopharynx(하인두) 출혈점 3D로 돌리고, 여기 사진 찍어둬.”
나는 눈을 감은 채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경험상 눈을 뜨면 이석증 환자처럼 어지러움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움직이자, 목 과장님의 음성이 들린다.
“나 때문에 깬 거야?”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기억을 읽기 전에 있었던 부검실 구석 자리의 벤치에 앉은 그대로다. 부검 중이었던 목 과장님의 모습이 보인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목 과장님이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
“잠이 부족했구나? 하긴, 사건 해결 전에 편하게 자는 형사가 어디 있겠냐.”
“…….”
목 과장님이 백승현의 아내 시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숨을 쉰다.
“뭐 좀 주세요. 이대로 가면 당신 죽음이 억울하게 끝나 버릴 겁니다. 예? 뭐가 됐든 좋으니 증거 하나만 줘요.”
시신에게 말을 거는 목 과장님. 나는 천천히 일어나 아내의 시신 옆에 서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미 주셨습니다.”
목 과장님이 날 돌아본다.
“응?”
“그만 가 보겠습니다, 과장님.”
“더 안 보고?”
“가야 할 곳이 있어서.”
나는 다시 한번 그녀의 시신을 바라본 뒤 슬쩍 고개를 숙였다.
“제가 꼭 밝혀 드리겠습니다.”
부검실을 나온 나는 바로 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관우야.”
-예, 과장님.
“바로 백승현 집으로 와.”
-지금이요?
“어. 주 검사님 쪽에서 연락 왔어?”
-아뇨, 그쪽 말고 최 선배님이 연락 왔었습니다.
“전달 사항은?”
-과장님 추측이 맞았습니다. 증거 영상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백승현이 태도를 바꿨습니다. 살인의 의도는 없었으며 가벼운 싸움 끝에 그냥 출근을 했고, 돌아와 보니 아내가 죽어 있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마이클 박사 측은?”
-특별히 코멘트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백승현의 사주로 법정에 설 것 같긴 합니다.
“알았다. 백승현의 집에서 보자.”
-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KCSI에서 차를 몰고 백승현의 집으로 가는 내내 마음이 좋지 않다.
백승현의 아내는 자신보다 남편과 아기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자기 병증을 정확히 진단하기 위해 설치했던 카메라에서 남편이 하는 짓을 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동안 느꼈던 상실감과 불안감의 근원이 남편에게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그녀는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을까?
“짐승 같은 새끼…….”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잘못을 하고 난 뒤의 행동이 그의 인성을 결정한다. 깨끗하게 인정하고 반성하면 잠깐은 손가락질당해도 사회는 다시 기회를 준다.
하지만 내 실수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빠져나가기 위해 발악하는 인간에게는 일말의 기회도 주어서는 안 된다. 백승현 같은 놈이 다시 세상으로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운전을 하고 있던 나는 연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주야.”
-네, 과장님.
“지금 바빠?”
-아뇨, 오늘 일은 거의 끝냈어요. 휴, 과장님과 함께 일할 때가 훨씬 좋네요. 이건 뭐 잡무만 잔뜩 있어서 보람도 없어요.
“부탁 하나만 하자.”
-네, 과장님.
“지금 PC 앞이야?”
-네.
“너 최영현 팀장 쪽 사건 알지?”
-네, 들었어요. 지금 그쪽에 도움을 주고 계신다고 하던데.
“그래, 백승현의 아내가 정신의학과에서 치료받은 기록이 있을 거야.”
-네, 바로 확인해 볼게요.
잠시 키보드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온다.
-네, 있어요.
“그래, 치료 기록 따로 보관해. 증거자료로 제출해야 되니까.”
-네, 알겠습니다.
“주치의도 나와 있지?”
-네, 최예림 선생이라고 써 있어요.
“…….”
뭐라고? 누구라고?
“최……예림?”
-네, 어? 이 이름…… 황지영 사건 때 법정 증언하신 그 선생님 아닌가요? 동명이인인가?
“병원 이름은?”
-명륜동 좋은 생각 정신건강의학과요. 어……? 여기 맞는 것 같은데. 그때 그 병원.
“…….”
주치의가 최예림 선생이라고? 황지영 사건에 이어 백승현 사건에도 이 사람이 연관되었다. 물론 범인과 접점이 없으니 범행 모의에 의심점은 없지만 자꾸만 엮인다. 게다가…….
‘그때. 치료실에서 읽었던 그 기억.’
어떤 여인이 아기를 버리는 장면이었다. 아니, 버렸다고 하기보다는 잠시 놓아두었다고 해야 될지도 모른다. 분명 아기에게 금방 돌아오겠다고 했으니까.
“연주야.”
-네, 과장님.
“최예림 선생에 대해 좀 알아봐.”
-어떤 부분을 보면 될까요?
“출산 기록.”
-예?
“출산 기록이 있을 거야. 확인해서 알려줘.”
-아, 네. 알겠습니다.
최예림 선생. 어떤 사람일까? 겉으로 보기에 전혀 의심할 부분이 없는 사람이다. 나와 엮인 것도 강혁 아저씨가 추천해서 간 병원의 의사였기 때문이다. 그녀와의 만남은 하나같이 우연이었다. 일부러 나와 엮이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녀의 치료실에서 읽었던 이상한 기억이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생각에 빠져 운전을 하다 어느새 백승현의 오피스텔로 도착하자, 1층에 관우 녀석의 차가 보인다. 이미 올라가 있는 모양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복도에 쪼그리고 앉아 졸고 있는 관우가 보인다.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짠하고 미안해진다. 나 때문에 며칠이나 못 잤을 녀석을 생각하니 괜히 또 불러냈나 싶기도 하다.
“관우야…….”
“어!! 아? 아아…… 과장님 오셨네요.”
흠칫 놀라며 깨는 관우. 눈을 비비며 일어난 관우가 말했다.
“일단 장비는 가져왔는데. 무슨 일로 부르신 거예요?”
녀석. 생각해 보니 무슨 일이냐 묻지도 않고 달려왔구나. 나에 대해 보여주는 연주, 관우의 믿음이 솔직히 부담스러우면서도 무척 고맙다.
감사하다, 고맙다는 말은 가슴에 묻고 오피스텔 입구를 눈짓한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백승현의 아내가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었다.”
“에? 왜요?”
“몽유병 증세였던 모양이야.”
“어구, 그거 무지 무섭던데. 영화도 있잖아요. 파라노멀 엑티비티인가? 엄청 무서운 영화. 거기서 막 자기 자는 거 촬영한 사람이 영상 보고 기겁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저도 그 장면에서 엄청 놀라서 오줌 쌀 뻔했죠.”
나는 폴리스라인이 붙은 오피스텔 문을 보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래. 백승현의 아내도 그랬던 모양이다.”
“…….”
관우는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뻐끔거린다.
“그, 그러니까…… 백승현만 침실을 촬영한 게 아니라 아내 쪽에서도…….”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진짜 진실을 확인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