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197화
15. 기묘한 시신(19)
나는 노트북을 백승현 쪽으로 돌려준 후 다시 한번 최영현이 쓴 사건 보고서를 보았다.
그 안에 백승현이 사건 전후로 움직였던 시간과 행위가 기재되어 있다.
사건 전날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자격시험 1차 시험을 보고 담당 교수를 찾아가 인사함 – 대학교 CCTV 확인.
사건 전날 오후 4시 15분.
서울 서대문구에서 담당 교수와 저녁 식사 – 식당 CCTV 확인.
사건 전날 오후 5시 48분.
귀가한 후 아내와 시험 결과에 대해 이야기한 뒤 식사 – 오피스텔 CCTV로 귀가 시간 확인.
사건 전날 오후 7시 39분부터 사건 당일 새벽 3시 2분까지.
인터넷에서 인터넷 커뮤니티, 판타지 소설, 게임 사이트에 접속 기록 확인.
사건 당일 아침 6시 41분.
출근 - 오피스텔 CCTV 확인.
사건 당일 아침 7시 14분.
병원 도착, 8시 첫 진료까지 본인 사무실에 있었음 – 병원 CCTV 확인.
사건 당일 아침 8시 55분.
장모와 통화 (시험이 매우 어려웠다는 내용의 통화) – 장모에게 확인 완료.
사건 당일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8시간 동안 핸드폰이 꺼져 있었음. 백승현의 휴대폰에 동료 의사와 장모에게 온 부재중 전화가 총 49통 있었음 – 급한 볼일이 있어 잠시 외출하였는데, 휴대폰을 놓고 나왔다고 진술. 확인 불가.
사건 당일 오후 5시 9분.
집으로 돌아와 아내를 발견하고 장모에게 전화로 알림 – 통화 기록, 오피스텔 CCTV 확인 완료.
사건 당일 오후 5시 11분.
장모와 함께 119와 112에 신고해 아내의 사망을 알림 – 통화 기록 확인 완료.
기록으로 볼 때 가장 의심스러운 것은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연락이 두절된 때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백승현을 범인으로 몰아갈 수 없었던 것은 해당 시간의 오피스텔 CCTV에서 백승현의 모습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백승현은 출근 후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밖에 있다가 장모에게 아내 죽음을 알리기 직전에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는 그때 무얼 하고 있었을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병원에 출근은 했는데 이마와 몸 여러 군데에 상처가 나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자 아지트에 가서 치료를 하고 돌아왔을 것이다.
직장에서 아지트까지의 거리는 택시로 이동했을 경우 약 10분. 치료 시간까지 한 시간이면 됐을 것이다.
휴대폰을 놓고 외출했다는 건 어느 정도 맞는 말일 거다. 일부러 그랬는지, 혹은 진짜 잊어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 필요한 시간은 한 시간이면 충분했으니까.
나는 노트북의 영상 재생 버튼을 누른 후 말했다.
“잘 봐.”
백승현은 이미 이 영상을 알고 있다는 투로 말했다.
“장난 영상 파일에 사고 영상이 찍혔다는 건 이미 들었습니다. 제가 겪은 일인데 굳이 다시 볼 필요가 있겠습니까?”
“잔소리 말고 봐.”
경어를 쓰다 갑자기 반말로 밀고 나가는 날 노려보는 백승현이 으르렁거린다.
“당신. 지금 내게 보이는 태도에 대해 반드시 문제 삼을 겁니다.”
나는 턱을 괴고 놈을 노려보았다.
“그건 네가 무고했을 때 이야기지. 뭐 해? 화면 봐.”
백승현은 날 좀 더 노려보다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그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내가 모르는 곳에 설치한 카메라. 하지만 영상 속의 아내는 카메라를 직시하고 있었다. 정확히 카메라 위치를 알고 보는 듯한 시선이다.
초췌한 얼굴의 아내는 마른세수를 한 뒤 앵글을 보며 말했다.
-여보, 미안해. 당장 말해야 되는데 내가 용기가 없어. 사실 진짜 내가 그런 것인지도 잘 모르겠고. 미안해, 정말. 당신과 우리 아기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너무너무 걱정이 되지만 그래도 나부터 확인하고 싶어. 며칠 안에 꼭 이야기해 줄게. 미안해, 미안해.
화면을 보던 백승현의 눈이 커진다.
“이게 무슨…….”
나는 의문스러운 얼굴의 백승현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설치한 카메라는 곰 인형의 눈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카메라는 곰 인형의 머리 위에 있던 붙박이 에어컨 안쪽에서 발견되었다.”
“…….”
백승현이 말을 잃는다. 나는 노트북을 눈짓하며 말했다.
“네놈의 그 구역질 나는 장난은 아내에게 자책감을 만들었다. 모든 것이 자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해 스스로를 촬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내는 자신이 자는 틈에 네놈이 어떤 짓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
나는 다시 새로운 영상을 재생했다. 백승현의 아지트에서 발견된 영상과 같은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다른 건 이번엔 소리가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영상 속의 아내가 백승현을 마구 때리며 외쳤다.
-당신!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내가 얼마나 괴로웠는지 지켜봤으면서! 재미있었어? 내가 괴로워하는 모습 보면서 히죽거린 거야? 그런 거야?
옷을 입고 있던 백승현이 귀찮다는 얼굴로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출근해야 되니 나중에 이야기하지?”
-다 봤어! 나 다 안다고!
-아, 젠장. 도대체 뭘 안다는 거야?
-이 나쁜 새끼!
아내가 백승현을 밀어버리고, 벽에 부딪힌 백승현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돌아본다.
-새끼? 남편한테 새끼?
-그래, 이 개새끼야! 배 속의 아이에게 미안하지도 않아?
-이 씨X년이!
백승현이 만삭의 아내를 침대로 밀어버린다. 아내는 침대 위를 굴러 반대편으로 떨어진다. 귀찮은 파리를 쫓는 듯이 손사래를 친 백승현이 혀를 차며 욕실로 간다.
-가뜩이나 요즘 시험 때문에 정신없는데 별.
쓰러졌던 아내가 벌떡 일어나 욕실로 달려가 백승현을 마구 때린다.
-넌 사람도 아니야! 네가 어떻게 나한테!
-아씨, 좀!
백승현이 아내를 벽으로 밀고, 수건걸이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아내는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 백승현의 이마를 할퀸다.
-개새끼!
-아, 씨X! 저리 가, 미친년아!
백승현이 아내의 목을 붙잡고 몸을 돌린 후 욕조 방향으로 밀어버리자, 샤워 커튼이 몸에 휘감긴 아내의 목이 꺾이며 욕조 속에 이상자세로 틀어박힌다.
-끄…… 끄으…….
백승현은 아내를 힐끔 보곤 다시 거울을 보며 옷을 정리한다.
-씨X, 아침부터 재수 없게. 네 친정이 돈 없는 집안이었으면 너 같은 년은 거들떠도 안 봤어. 알아?
욕조에 쓰러진 아내는 답이 없다. 백승현은 아내는 보지도 않고 거울만 보며 자신을 정리한 뒤 안방에 놓인 가방을 들고 방을 벗어난다.
내가 영상 정지 버튼을 누르자, 백승현의 표정이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음성까지 들어 있는 파일이 나오자 당황한 것이다.
“이, 이건! 아! 아까 말씀드렸지만 다툼이 있었습니다. 제가 거짓말을 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아침에 이렇게 다툰 건 맞습니다. 그리고 전 출근을 했습니다. 쓰러진 아내가 곧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괜히 일어나서 또 덤비면 아침 첫 진료에 늦을 것 같아서 그냥 간 것뿐이라고요!”
당연히 이리 나올 줄 알았다. 백승현은 이미 이 영상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발견되지 않는 것이 가장 베스트이겠지만, 만약 발견된다고 했을 때를 가정해 어떤 거짓말을 할지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말없이 턱을 괴며 말했다.
“그렇지, 그렇게 나와야지.”
얼굴이 붉어진 백승현이 멈칫하며 물었다.
“무슨 말입니까?”
나는 취조 영상을 녹화 중인 카메라를 눈짓했다.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진술. 전부 녹화되고 있다. 이건 법정에서 판결을 내리는 재판장님도 보게 되시지.”
“그런데요?”
“똑똑한 놈이니 잘 알겠지만 본인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발뺌을 하는 놈의 형량이 더 많아지거든.”
“…….”
“영상 아직 안 끝났다.”
백승현의 얼굴에 불안이 스쳐간다. 자신이 알고 있는 영상은 여기까지. 하지만 이 영상은 자신이 찍은 영상과 비슷한 구도이지만 아내가 찍은 영상이다.
나는 말없이 영상을 다시 재생시켰다.
화면 속에 발만 보이는 아내.
잠시 후 나갔던 백승현이 다시 돌아온다. 욕실로 가 아내를 우두커니 내려보던 백승현은 손가락 두 개로 아내 맥을 짚은 후 나지막한 욕설을 뱉는다.
-씨X…….
잠깐 욕조에 앉아 생각에 잠기는 백승현. 그의 표정에 곤란함이 머물고 있지만, 아내의 죽음에 대한 미안한 감정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다시 욕실에서 나와 잠시 사라진 후 다시 나타났고 그의 손에는 구급약 통이 들려 있다.
알코올 병을 꺼내 거즈를 적신 그는 아내의 손톱과 상처들을 모두 닦아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백승현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며 종국에는 욕을 내뱉고 만다.
“씨X X됐네. 의사 되느라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고작 이런 년 때문에 내 인생이…… 하.”
아직까지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 없는 백승현.
백승현은 아내의 죽음 직후 의사의 지식을 동원해 그녀가 사망한 상태임을 알았다. 그리고 즉시 알코올 솜으로 증거를 지우는 치밀함을 보인 후 출근을 해 알리바이를 쌓았다. 아내가 남긴 이 영상이 죽음에 대한 모든 것을 밝힌 것이다.
백승현은 맥이 풀린 표정을 짓다 천천히 의자에 등을 기댄다. 가만히 날 바라보던 백승현이 말했다.
“이제 끝이네. 네가 이겼어.”
“…….”
그게 할 말이냐? 모든 것이 밝혀졌으면 왜 그랬는지, 내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먼저 설명해야 되는 거 아니야? 너에게 이 모든 것은 게임이었던 건가? 자연스러운 어투로 ‘네가 이겼다’고 말할 거리밖에 안 되는 일이냐 말이다.
백승현이 수갑 찬 손으로 테이블을 툭툭 치며 말했다.
“증거도 다 나온 마당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이제 나도 지치니 그만들 하지?”
나는 짐승 같은 백승현을 가만히 노려보다 물었다.
“아내를 죽였다는 것을 인정하나?”
백승현이 어깨를 으쓱한다.
“영상 증거는 어떤 것보다 강력하지. 내가 인정하든 말든 이제 그건 중요하지 않아.”
차라리 난 억울하다. 어쩔 수 없는 사고였다고 말했다면 덜 미웠을까? 나는 이 순간 백승현의 얼굴에 주먹을 먹여주고 싶다. 하지만 모니터링실에 검사까지 앉아 있는 마당에 그럴 순 없다.
“하나만 묻자.”
백승현이 귀찮다는 얼굴로 말했다.
“승자의 여유 같은 건가? 좋아, 패배자는 말이 없는 법이지. 질문 하나 하고 그만 꺼져라. 네 얼굴 보기 구역질 나니까.”
구역질 나는 얼굴은 너겠지, 개 같은 새끼야. 나는 욕지거리를 참으며 말했다.
“너는 사건 당일 여덟 시간 동안 연락이 두절됐었다. 이마와 몸에 난 상처를 치료할 시간이 필요했을 테니 넌 아지트에 갔을 것이다. 그러니 거기서 혈흔이 묻은 거즈가 발견된 것이고.”
“그런데?”
“치료를 하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맥시멈으로 잡아도 한 시간 반이다. 나머지 시간에 뭘 했지?”
백승현은 내 질문에 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날 바라본다. 그러다 윙크를 하며 말했다.
“영상편집.”
“뭐…….?”
백승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좋은 스너프 필름은 실력가의 편집술이 필요한 법이지. 발견되어도 사고로 위장할 수 있는 수준으로 영상을 편집했다.”
“도대체 왜? 영상이 발견되면 너만 불리해진다는 걸 모르나?”
“알지.”
“아지트까지 갔으면서 왜 영상을 지우지 않았지?”
백승현이 턱을 괸다. 잠시 생각을 하던 백승현이 실소를 짓는다.
“대한민국 형사들이 바보도 아니고. 어떡하든 날 범인으로 엮을 증거를 가져오겠지. 그때 내 영상이 불의의 사고라는 증거가 되어줄 테니까.”
“정말 그 이유인가?”
백승현이 몸을 내밀며 씩 웃는다.
“그리고 하나 더.”
“뭐지?”
백승현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깝잖아? 이런 영상을 어디 가서 보겠어? 나 같은 취향을 가진 놈은 세상에 많다고. 녀석들의 영상을 볼 때마다 부러웠어. 나는 언제 저런 걸 찍어보나 하고 말이야. 이제 나도 가졌는데. 가지고 싶은 걸 손에 쥐니 쉽게 포기가 안 되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