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인의 기억-198화 (197/328)

살인의 기억 198화

15. 기묘한 시신(20)

고시원 뒤 언덕 포장마차.

시원한 소주를 한 번에 털어 넣은 나는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소주를 입안에서 굴리며 인상을 썼다. 백승현 놈의 말이 자꾸만 머리를 맴돈다.

‘아깝잖아? 이런 영상을 어디 가서 보겠어? 나 같은 취향을 가진 놈은 세상에 많다고. 녀석들의 영상을 볼 때마다 부러웠어. 나는 언제 저런 걸 찍어보나 하고 말이야. 이제 나도 가졌는데. 가지고 싶은 걸 손에 쥐니 쉽게 포기가 안 되더군.’

얼마 전에 발생한 N번 방 사건이 떠오른다. 이 사건은 미성년자 성착취물을 스트리밍하고 돈을 내고 들어온 이들에게 영상을 제공한 사건이었다.

단순 포르노 유포사건이 아닌, 성적인 착취, 강간 등의 영상이었기에 사건은 대서특필되었고, 한 번이라도 그 방에 들어간 남자는 사회에서 쓰레기 취급을 받았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곁에 그러한 곳이 많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런 영상을 찾아낼 수 있다. 성을 비즈니스로 생각하는 정식 사업체의 영상은 법적 문제가 없다지만 그러한 영상을 보고 자란 아이들 중 일부가 이상성애자가 된다.

백승현의 경우는 살인을 하는 스너프 필름이 취향이었고, N번 방에 입장한 남자들은 성을 착취하고 여성의 위에 군림하는 것으로 성적 쾌감을 느끼는 자들이었다.

최악의 경우, 그들 중 일부가 백승현처럼 자신도 그런 영상물을 소유하고 싶다는 강한 욕구에 사로잡혀 우리의 가족을 공격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

내 사건이 아니지만 참 씁쓸한 사건이다. 어묵탕 국물에 혼자 소주병을 기울이던 내 앞에 두부김치 접시가 놓인다.

고개를 들자 언제나 묵묵한 주인아저씨가 굵은 팔로 팔짱을 끼고 날 내려보고 계신다. 나는 슬프게 웃으며 물었다.

“서비스인가요?”

아저씨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뒤로 돌아 주방으로 간다. 나는 그런 아저씨를 보며 빙긋 웃었다.

“아저씨.”

아저씨가 다시 돌아본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소주 한 병만 더 주실래요?”

아저씨는 무뚝뚝한 얼굴로 날 바라보다 물었다.

“프래시?”

“아뇨, 빨간 걸로.”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으로 내 테이블을 훑는다. 얼마나 마셨는지 확인하는 모양이다. 아직 더 마셔도 될 것 같다고 판단했는지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 따서는 말없이 내 잔을 채워준 뒤 다시 주방으로 가는 아저씨.

말 없는 위로. 어설픈 위로는 오히려 상대에게 상처를 주곤 한다. 내가 네 마음을 다 이해한다는 듯이 하는 위로의 말.

하지만 생각해 보라. 세상에 어느 누가 상대를 완벽히 이해할 수 있을까? 위로하겠다고 내뱉은 말 중 어떤 말은 상대의 가슴에 비수처럼 파고들지도 모른다.

이럴 때에는 저 아저씨처럼 말없이 작은 마음 하나를 놓고 사라지는 위로 방법이 무척 도움이 된다. 단순히 두부김치 한 접시일 뿐이지만 조금 전보다 훨씬 기분이 나아졌다.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슬픈 미소를 지었다.

“너무 많은 어둠을 보고 있는 것 같네, 나.”

심연 속을 너무 깊게 보고 있다. 나는 심연에 잡아먹히지 않으려 사력을 다하고 있지만 점점 나는 사람에 대한 희망을 잃고 있다.

문득 TV에 나와 사람만이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하던 심리학자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과연 사람에게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그때 포장마차 비닐이 슬쩍 걷히며 익숙한 머리 하나가 쑥 들어온다.

“과장님!”

관우다. 너무 부려먹기만 하는 것 같아 일부러 불렀다. 관우가 불쑥 들어와 이미 소주를 세 병이나 까고 있는 날 놀란 눈으로 보며 말했다.

“술 사 주신다고 하더니 혼자 마시깁니까?”

“하하, 왔냐? 한잔 받아라.”

“저기.”

“음?”

“혼자 온 게 아닌데.”

관우가 슬쩍 돌아보자, 비닐 장막이 걷히며 연주 얼굴이 튀어나온다.

“와, 배신자. 혼자 마시는 거 봐.”

“…….”

연주만 온 것이 아니다. 연주 뒤에 오진규까지 와 있다. 오진규는 포장마차를 두 번째 와보는 것인데 올 때마다 분위기에 감탄하며 두리번거린다.

“이야, 여긴 언제 와도 멋진 곳이네요. 이런 날은 술 제대로 마셔야죠.”

나는 날 찾아와 준 팀원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언제나 모습처럼 서로 장난을 치고 있는 연주와 관우. 잔과 젓가락을 찾으러 간 오진규. 다시 사람만이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는 심리학자의 말이 떠오른다.

나는 빙긋 웃으며 잔을 들었다.

“그 사람 말이 맞는 거 같기도 하고.”

관우 목을 조르고 있던 연주가 내 말을 듣고 눈을 깜빡인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하하, 아니다, 마시자.”

오진규가 잔을 챙겨 와서는 팀원들 잔을 채워준 후 말했다.

“자, 수사과를 위하여!”

아재답게 건배사를 외치고 마셔야 술맛이 나는 모양이다. 다들 웃으며 잔을 입에 털어 넣으려는 그 순간 누군가 비닐 장막을 거칠게 젖히며 외친다.

“스톱!”

모두의 움직임이 멈춘다. 오진규가 인상을 쓰고 돌아보았다가 벌떡 일어난다.

“충성!”

강혁 아저씨다. 뒤에 목 과장님까지 와 있다. 강혁 아저씨는 관우와 연주가 경례를 하려는 걸 만류한 뒤 날 째려보며 플라스틱 의자를 질질 끌고 온다.

“배신자 새끼. 혼자 처먹으면 술맛이 나냐? 술자리가 있으면 날 불러야지, 인마.”

나는 강혁 아저씨를 보지도 않고 목 과장님에게 눈인사를 했다.

“오셨습니까?”

목 과장님이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린다.

“사건 이야기 들었다. 대한민국 법의학자를 대표할 깜냥은 안 되지만 그래도 나라도 대신 나서서 감사해야 하겠구나. 정말 잘했다.”

강혁 아저씨가 의자에 앉아 소주를 따르며 물었다.

“그 새끼가 다 인정했다고 하던데. 맞아?”

나 대신 목 과장님이 답한다.

“예, 도경이가 아내 쪽에서 찍은 영상물을 증거로 제시하니 더는 발뺌을 못 했죠. 아지트에서 발견된 법정 증거까지 더해지면 살인, 증거 은폐, 불법영상물 촬영, 소지까지 죄목이 줄줄이 붙을 겁니다.”

강혁 아저씨가 혀를 찬다.

“미친 새끼. 지 아내 죽이는 영상을 남겨? 지우지도 않고 보관하려고 했다고? 아니, 자랑하고 싶었다고 했나? 에라이, 미친놈. 이제라도 자백받았으니 다행이야.”

목 과장님이 웃으며 말했다.

“그것보다 토론토에서 온 마이클 박사가 똥 씹은 표정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사라지는 기분이었습니다, 하하!”

강혁 아저씨의 말을 들으니 다시 스트레스가 밀려온다.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은 기분이다.

다행히 내 표정을 읽은 강혁 아저씨는 사건에 대해 더 언급하지 않고 내 옆에 바싹 붙어 술을 따라준다.

“힘드냐?”

한 번도 힘들다고 말한 적 없는데. 오늘은 유난히 힘든 것 같다. 나는 한숨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금.”

강혁 아저씨는 내 표정을 살피다 싱긋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린다.

“새끼, 꼬랑지에 불붙은 망아지 같더니. 이제 형사 같은 얼굴이 됐네.”

목 과장님이 웃으며 말했다.

“도경이가 그랬습니까?”

강혁 아저씨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놈이 말이야, 순경 부임하고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

“오? 무슨 일 있었습니까?”

“이놈이 말이야. 조직 폭력배 놈이 상인 괴롭히는 거 보고 쫓아가서 흠씬 두들겨 팼단 말이야? 그런데 그놈들이 물러나면서 상인들에게 협박을 했어. 나중에 가만두지 않겠다고.”

강혁 아저씨의 말이 시작되자 모두가 귀를 기울인다. 얼굴이 벌게진 나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만해요. 순경 때 이야긴 뭐 하러 해요?”

“놔 봐, 인마. 다들 기대하고 있는데.”

강혁 아저씨는 입을 막으려는 내 손을 치우며 입에 침을 튀겨가며 말했다.

“이 자식이 상인들 지키겠다고 지 순찰 구역도 안 돌고 거기 상가 앞에서 한 달을 잠복한 거야. 결국 상인들 괴롭히러 온 조폭들을 다시 마주쳤지. 또 흠씬 팼어. 근데 그 새끼들이 또 비슷한 말을 하고 사라진 거야.”

관우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물었다.

“오! 그래서요? 그래서요?”

강혁 아저씨가 소주를 물처럼 들이키며 말했다.

“이 미친놈이 혼자 조폭 아지트에 쳐들어가서 전부 두들겨 패고 잡아온 거야.”

연주가 놀랍다는 얼굴로 물었다.

“몇 명이나 됐는데요?”

강혁 아저씨가 손가락 두 개를 펼치며 말했다.

“스무 명.”

“우와!! 근데 그건 진짜 잘한 거 아니에요?”

강혁 아저씨가 날 째려본다. 난 내가 한 짓이 있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잘하기는 미친놈. 경찰이 사람을 잡아올 거면 뭔 잘못이라도 한 놈을 잡아와야 되는 거 아니냐? 가만히 사무실에 있던 놈들 두들겨 패서 데리고 왔는데 무슨 명목으로 잡아넣냐? 다 풀어주고 이놈 징계 때린다는 거 막느라 내가 죽을 똥을 쌌지! 망할 망아지 새끼!”

사람들이 한꺼번에 웃음을 터뜨린다. 특히 오진규는 웃겨 죽겠다는 얼굴이다.

“푸하하! 그러니까 그냥 가만히 있는 조폭 사무실 털어서 잡아오긴 잡아왔는데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몰라서 송치를 못 했다는 겁니까? 크하하!! 진짜 웃기네요, 으하하!”

관우와 연주도 배를 잡고 웃는다. 이 자리에서 오직 나만 못 웃고 있다.

“그만 좀 해요, 아저씨.”

강혁 아저씨는 민망해하는 날 웃으며 바라보다 소주병을 든다. 내가 잔을 들자 소주를 채워주는 아저씨가 말했다.

“셰익스피어 알아?”

“갑자기 뭔.”

“알아, 몰라.”

“알아요.”

“셰익스피어 작품 중에 리차드 3세라는 작품이 있다. 거기 보면 이런 말이 나오지.”

갑자기 안 어울리게 뭔 셰익스피어? 잔을 채워준 아저씨가 병을 들고 말했다.

“선과 악을 택해야 할 때가 오면 악을 선택하고 선을 그리워하는 편이 좋다.”

“…….”

“단순한 대사가 아니다. 우리 세상에 사는 인간들 대부분이 그렇게 산다. 선한 것을 그리지만 정작 나의 삶은 이기심으로 뭉쳐 항상 악한 쪽을 택하는 것이 인간이다.”

“…….”

강혁 아저씨가 내 그릇에 김치를 놓아주며 말했다.

“전혀 실망할 것 없다. 너나 나도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니까. 우리는 인간이니 할 수 없는 거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도경아.”

아저씨가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인간에게 실망하지 마라. 네가 상대하는 것들은 인간의 범주 밖에 있는 것들이니까.”

“…….”

마치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아저씨의 말이 가슴을 후빈다.

나는 아저씨 말을 곱씹었다. 사람은 원래 그런 존재들이다. 나는 사람 자체에 대한 실망을 접어두고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들을 쫓아야 한다.

나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심연의 어둠을 너무나 가까이 두고 살다 보니 너무 당연한 것을 잊을 때가 많다.

아저씨가 내 곁에 계셔서 참 다행이다.

나는 소주 한잔에 마음속 시름을 털어버리고 병을 붙잡아 아저씨 잔을 채워주며 빙긋 웃었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아저씨는 내 표정을 보고 내면의 변화를 알아챘는지 더 잔소리를 하지 않고 목 과장님과 오진규를 술친구 삼아 술을 퍼마시기 시작한다.

사람이 늘었다고 하지만 술이 비워지는 속도가 엄청나다. 벌써 우리 주변에 소주병이 열다섯 병이나 굴러다니고 있다.

관우는 벌써 혼이 날아가 테이블 위에 코를 박고 있다. 연주가 그런 녀석을 한심하게 바라보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 과장님.”

“음?”

“그때 지시하신 거요.”

“어? 뭐였지?”

“최예림 선생이요.”

아, 잊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치료실에서 읽었던 기억이 다시 스쳐 지난다.

“아, 그래.”

연주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출산 기록이 있긴 한데 한국이 아니었어요.”

음, 그녀의 말과 맞아떨어진다. 미국에서 딸 둘을 낳았다고 했었지. 그럼 도대체 그 기억은 뭐였지? 이번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는 기억이었는데. 도대체 왜 내게 그런 기억을 보여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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