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199화
16. Journey to crime(1)
국가수사본부 중대범죄 수사과 사무실.
나는 내 자리에 앉아 연주의 보고를 듣고 있다. 연주는 수첩을 꺼내 볼펜 끝을 입에 물고 설명했다.
“한국 이름 최예림, 미국 이름 캐서린 초이. 나이 46세입니다. 1999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학사학위 취득 후 MCAT(의과대학 입학시험)를 보고 시카고 프리츠커 스쿨 오브 메디신 대학에 들어갔으며, 레지던트를 거쳐 펠로우 재직 시절에 만난 한국인 정형외과 의사 김준원 씨와 결혼했습니다.”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의사다. 나는 기억 속의 아이 엄마를 떠올리며 물었다.
“결혼은 몇 년도에 했지?”
“2011년도입니다.”
음, 그녀는 8년 전에 한국에 입국했다고 했다. 아이들이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다고 했으니, 대략적인 시간의 흐름이 맞아떨어진다.
“1999년에 미국에 나간 뒤 한국에 돌아온 적이 없어?”
“공항 입국 기록으로 보면 총 7회를 다녀갔습니다.”
“모두 가족을 만나러 온 건가?”
“네, 대구에 가족이 있었습니다. 외동딸이라 현재는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혼자입니다.”
“부모님 쪽 친지도 없고?”
“네, 없습니다. 입국 후 일 년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으로 보아서는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한국 입국을 결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모친은?”
“모친은 입국 후 5년 후에 돌아가셨습니다.”
“사망 원인은?”
“부친은 간암, 모친은 당뇨 합병증이었습니다. 둘 다 병원 치료 기록이 있고 사망에 의심점은 없습니다.”
“음…….”
기록상으로는 아무 의심할 바가 없는 사람이다. 아니, 사실 치료센터에서 읽은 이상한 기억이 아니라면 그녀의 행동, 말도 이상한 점이 전혀 없다.
“남편은?”
“현재 영산대학병원 부원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남편도 대학병원의 부원장. 너무나 완벽한 가정이다.
“딸들은 뭘 하지?”
“둘 다 국제학교를 다니고 있으며, 첫째는 디자인을 전공하고 싶어 해서 따로 학원을 다니고 있고, 둘째는 회화를 전공하고 싶어 해서 따로 선생님을 불러 개인수업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나는 깍지를 끼고 생각에 잠겼다. 그 기억은 도대체 뭐였을까? 왜 하필 선생의 치료센터에서 기억이 보였던 걸까?
지금까지 내가 읽은 기억들을 살펴보면 물건, 혹은 사람이나 생명체에 남은 기억을 읽었었다. 그 방에 있던 사람은 나와 선생 둘이다.
만약 그 기억이 최예림 선생 본인의 기억이 아니라면 그 방에 있던 어떤 물건이 내가 읽은 기억과 연관되었을 확률이 높다.
나는 현재 시간을 확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연주가 물었다.
“병원 예약 시간이죠?”
“음? 어떻게 알았어?”
연주가 웃으며 시간을 본다.
“청장님이 앞으로 30분 뒤에도 과장님이 사무실에 있으면 바로 보고하라고 하셨거든요, 하하.”
“…….”
젠장, 이 영감이 이제 내 부하 직원을 부려 날 감시하기까지 하네. 나는 인상을 찌푸린 뒤 고개를 저었다.
“병원 갔다고 보고해 줘.”
“예, 과장님. 근데 이 사람에 대해 계속 조사해 볼까요?”
“음, 일단은 멈춰. 이상한 점이 더 발견되면 다시 말할게.”
“네, 과장님.”
나는 구석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보고 있는 오진규에게 말했다.
“오 선배님.”
오진규가 자세를 바로 하며 답한다.
“네, 과장님.”
“혹시 저 없을 때 사건 배당 전화 오면 선배님이 좀 받아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관우는 며칠간 너무 피곤했는지 자리에 앉은 채로 고개를 꺾고 잠이 들어 있다. 나는 괜히 피곤한 녀석을 깨우기 싫어 조용히 사무실을 벗어났다.
잠시 후, 관우가 입가의 침을 닦으며 눈을 뜬다. 쌍꺼풀이 깊게 잡힌 눈으로 주변을 보다 여기가 사무실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관우가 눈을 비비며 두리번거린다.
“어? 과장님은?”
연주가 시계를 힐끔 보며 말했다.
“병원 가셨다.”
“아, 나 좀 깨워주지.”
“과장님이 깨우지 말라고 했어. 더 자라, 잘 수 있을 때.”
관우가 오진규의 눈치를 본다. 하지만 오진규는 힘든 일정을 소화한 형사의 짧은 휴식을 방해할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 자기 일만 열심히 하는 중이다.
그때 오진규의 핸드폰이 울린다. 액정을 보니 평소에 별로 연락을 주고받지 않던 후배의 전화다. 무슨 일인가 싶은 표정으로 전화를 받는 오진규.
“여, 너 웬일이냐?”
-선배님, 오랜만입니다. 잘 계십니까?
“나야 뭐. 그냥저냥 지내지.”
-저기, 갑자기 죄송하지만 아직 국수본에 계시는 겁니까?
“어, 왜?”
-아, 누가 선배님이 좌천……되셨다는 이야기를 해서.
“하하, 그래. 그랬었다. 지금은 다시 국수본에 들어와 있고.”
-휴, 다행입니다. 그래도 끈이 하나는 있었네요.
“음? 무슨 일 있어?”
조용한 사무실이라 통화 내용이 다 들린다. 관우와 연주가 제 일을 하다 귀를 쫑긋거리는 것이 보인 오진규가 웃음을 짓다가 후배의 말에 표정을 굳힌다.
“뭐……?”
오진규의 표정이 달라지자 관우와 연주가 돌아본다. 오진규는 심각한 얼굴로 전화를 받다가 말했다.
“알았다. 혹시 우리 쪽으로 배정되면 특별히 더 신경 쓰마. 그래, 미리 알려줘서 고맙다. 미안하긴. 어차피 국수본의 업무가 이런 식인데. 그래, 나중에 한잔하자. 끊는다.”
오진규가 전화를 끊고 난 뒤 잠시 액정을 바라본다. 궁금한 얼굴의 관우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선배님. 무슨 일 있어요?”
연주도 먼저 묻진 않지만 궁금한 눈치다. 오진규가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2025년 09월 28일 밤 9시 30분경에 안산시 선부1동 주택 골목길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었다.”
연주가 달력을 보며 물었다.
“두 달 전이네요?”
연주의 말에 달력을 확인한 오진규. 오늘은 11월 25일이다.
관우가 물었다.
“설마 두 달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못 잡았대요?”
오진규가 달력을 뚫어지게 보다 말했다.
“음, 보통 퍽치기 사건이었다고 하는데 아직 못 잡았다고 하네.”
관우가 목 뒤로 깍지를 끼며 한숨을 쉰다.
“이야, 안산경찰서장님 똥줄 좀 타시겠네. 밑에 형사님들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겠는데요?”
사건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경찰은 사건이 났을 때 빠르게 해결해야 한다. 경찰이 빨리 움직이지 못하면 또 다른 피해자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쇄 사건일 경우 첫 사건이 발생하면 그다음 사건부터는 책임 소재가 경찰로 향하게 마련이다.
연주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선배님. 퍽치기는 보통 한 번으로 안 끝나는데. 그동안 관할에서 비슷한 범죄가 없었나요?”
“총 10건이 발생했다고 하네.”
관우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니, 총 10건이 일어났는데 아직도 범인을 못 잡았다고요? 설마 사람이 10명 죽은 건 아니죠?”
같은 경찰 입장에서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분명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오진규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저께까지 집계된 사망자는 1명이야. 나머지 10건은 피해자가 심각한 폭행을 당했지만 사망하진 않았다.”
연주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그런데 왜 못 잡고 있는 거래요?”
“목격자 진술은 하나같이 키 175㎝ 이하의 날렵한 20대 남성을 지목하고 있어. 하지만 범인은 얼굴을 가리고, 단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말을 안 해요? 그럼 어떻게 돈 내놓으라고 했어요?”
오진규가 칼을 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이렇게 칼로 위협해서 손짓으로 가방을 달라고 했다는 것 같아.”
“음, 음성은 못 들었다…… CCTV 분석을 안 해봤을 리는 없고. 결국 안 걸렸다는 뜻인데.”
오진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테이블을 짚는다.
“문제는 어제 또다시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이는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거야.”
연주와 관우의 움직임이 멈춘다.
“또……요?”
“그럼…….”
오진규가 시계를 본 뒤 말했다.
“후배 말이 안산경찰서장이 청장님께 직접 보고드렸다고 한다. 총 11건의 사건 중 2건의 살인사건을 더 이상 수사기밀로 분류할 수 없어 언론에 발표할 예정이라고 해.”
관우가 꺼져 있는 TV를 보며 말했다.
“그렇다는 건…….”
오진규가 핸드폰을 힐끔 보며 말했다.
“사건이 우리 쪽으로 넘어올 수도 있으니 미리 준비하라는 전화야.”
연주가 혀를 차며 리모컨을 든다.
* * *
명륜동 좋은 생각 정신건강의학과.
두 번째 방문이라 그런지 로비의 간호사들이 내 얼굴을 알아보고 이름도 말하지 않았는데 먼저 말한다.
“안녕하세요, 현도경 환자님.”
환자님? 그렇게 부르니까 기분이 좀 그런데.
“아, 예.”
“예약 시간에 정확히 오셨네요. 선생님께 인터폰만 드리고 바로 안내드리겠습니다.”
“예, 고맙습니다.”
나는 잠시 대기했다가 바로 간호사의 안내를 받으며 최예림 선생의 방으로 들어갔다. 안경을 쓰고 뭔가를 보고 있던 선생이 안경을 벗으며 웃는다.
“오셨어요?”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이 방에 있는 물건 중 무엇이 내게 그런 기억을 보여준 걸까?
최예림 선생이 자리에서 일어나 지난번 치료할 때 앉았던 1인용 소파로 안내한다. 네팔이나 인도에서 많이 사용한다는 스틱 향을 피우고 차를 내온 최예림 선생이 내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청장님 말씀으로는 쉬라고 사건을 안 주니 다른 팀 사건까지 들쑤시고 다니셨다고 하던데.”
“…….”
이 영감이 도대체 어디까지 내 이야기를 떠들고 다니는 거야? 나는 불편한 기색으로 말했다.
“청장님과 친하십니까?”
최예림 선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뇨, 이번에 과장님을 맡으며 알게 된 사이인데. 자주 전화하세요. 상태를 묻기도 하시고, 현재 과장님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도 말씀하시죠.”
“아저씨도 참.”
“호호, 왜요? 전 너무 좋아 보이던데.”
“뭐가 좋습니까? 제 허락도 없이 남에게 제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데.”
최예림 선생이 생긋 웃는다.
“자식 걱정하느라 여념이 없는 부모님 같아 보여서요.”
“…….”
“좋은 분 같아요.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잘 해주세요.”
음, 강혁 아저씨가 좋은 사람이란 건 나도 아는데. 그래도 내가 세 살 먹은 애도 아닌데 과잉보호가 너무 심하다.
나는 소파에 앉으며 다시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선생의 방에는 의학서적들과 추억이 담긴 사진, 최면 치료 등에 쓰이는 요상한 물건들 외에 특별히 의심스러운 건 없었다.
최예림 선생이 내 옆에 의자를 끌고 와 앉으며 말했다.
“자, 오늘도 잠시 쉰다고 생각하시고. 눈을 감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세요.”
나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눈을 감고 편하게 앉았다. 내 귓가로 듣기 좋은 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눈앞에는 초록 대지가 펼쳐져 있어요. 멀리 하얀 양들이 뛰어놀고, 보기 좋은 구름들이 떠다니고 있네요. 들려요? 아주 작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도 있네요.”
“……뭐 하시는 겁니까?”
“하하, 걱정 마세요. 최면 거는 거 아니니까. 그냥 그런 상상을 해보세요. 그럼 마음이 편안해진답니다.”
“음.”
그래, 뭐 한번 해보지. 최면도 아닌데. 나는 그녀가 말하는 대로 상상의 초원을 그렸다. 다시 내 귓가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싱그러운 초지를 걷다가 나무로 만든 계단을 하나 만납니다. 계단은 모두 열 칸. 계단 위에는 아주 포근하게 생긴 나무 문이 있네요.”
그녀의 말처럼 상상을 해보았다. 이게 도대체 뭔 짓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상상 속에서 이런 여행을 하는 시간을 갖는 건 휴식이라 생각해도 될 것 같다. 그녀가 말한 포근한 나무 문. 나는 천천히 계단을 향해 발을 뻗었다.
듣기 좋은 최예림 선생의 목소리가 울린다.
“계단을 오릅니다. 하나, 둘, 셋…….”
열에 가까운 수가 들려올수록 정신이 점점 혼미해진다. 나는 1인용 소파 의자로 몸이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이제 문을 열어보겠습니다.”
그녀의 지시에 따라 내 손이 계단 위의 나무 문을 천천히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