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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기억-204화 (203/328)

살인의 기억 204화

16. Journey to crime(6)

피해자 이영주 34세. 그녀는 대형마트의 점원이며 퇴근길에 습격을 당했다고 진술했다.

나는 생존자를 안심시키기도 전에 다짜고짜 질문을 던진 스스로를 질책하며 숨을 돌렸다.

“괜찮습니다, 여기는 안전합니다, 이영주 씨.”

“…….”

이영주는 상당히 불안한 기색이다. 그때의 사건이 큰 트라우마로 남은 모양이다. 나는 밖에 대기 중인 순경을 불렀다.

“여기 잠깐만.”

문이 열리고 순경이 고개를 내민다.

“미안하지만 따뜻한 커피 한 잔만 주시겠습니까?”

“네, 과장님.”

잠시 후 순경이 뜨거운 커피를 가져온다. 자판기에서 막 뽑은 커피를 받은 나는 이영주에게 잔을 내밀며 말했다.

“자, 한잔 드세요.”

“…….”

이영주는 커피도 의심스러운지 나를 바라본다. 나는 최대한의 믿음직한 얼굴로 말했다.

“여기 경찰서입니다. 여기서는 안심해도 좋습니다.”

이영주는 다시 한번 커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숙인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커피를 붙잡기만 하고 마시지는 않는 이영주. 어지간히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진술 후에 순찰차가 댁까지 모셔 드릴 겁니다. 안심하시고 진술해 주세요.”

이영주의 불안한 기색이 조금 가라앉는다. 그래도 경찰이 집까지 호위해 준다고 하니 마음이 좀 놓이는 모양이다. 나는 그녀에게 잠시 진정할 시간을 준 뒤에 물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

이영주는 움찔 놀라며 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고작 두 평 남짓한 취조실에 뭘 살필 것이 있겠느냐마는 그녀의 반응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영주는 다시 한번 자신이 경찰서에 와 있다는 것을 상기한 뒤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그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날이었어요.”

“특별히 약속이 있거나 하지는 않으셨고요?”

“네, 열 시에 마트 일 끝내고 퇴근 중이었어요.”

“공중 화장실에서 공격을 당하셨던데.”

“네…… 퇴근 전에 같이 일하는 언니가 캔 커피를 줘서 마시고 퇴근했는데 집 다 와서 화장실이 가고 싶어서…….”

“원곡공원에 있는 공중화장실을 이용하셨다고 써 있군요.”

“네…… 저희 집이 그 공원을 지나야 되거든요.”

“정확한 위치가 어디입니까?”

“공원 뒤에…… 장례식장이 있어요. 거기 가기 전에 좌측 빌라 4층이요.”

지도를 다시 확인해 보니 그녀가 일하는 대형 마트와 집까지의 거리는 약 3㎞. 충분히 걸어 다닐 수 있는 곳이다. 공원 바로 옆이 집인데 굳이 거길 들어간 것을 보니 꽤 급했던 모양이다. 상대가 여성이다 보니 이런 것까지 자세히 묻기는 그렇다.

“화장실에 아무도 없었습니까?”

“네, 처음에는 저만 있었어요.”

처음에는? 생존자의 기억은 혼미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인터뷰를 하는 자는 생존자가 사용하는 단어 선택에도 민감해야 한다. 그들의 기억 속에 반드시 단서가 있기 때문이다.

“중간에 누가 들어온 겁니까?”

이영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화장실에 앉아 있는데 누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어요. 세면대 거울 앞에 있는 인기척이 났고요.”

“화장실을 이용하진 않았고요?”

“네…….”

“혹시 화장실이 한 칸만 있는 곳이었습니까?”

“아뇨, 양쪽으로 세 칸씩 마주 보고 있는 곳이었어요.”

“화장실에 들어온 사람이 거울 앞에만 있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진 않으셨습니까?”

“아뇨…… 원래 거울만 보러 들어오는 사람도 있거든요.”

음, 남자들은 거울만 보러 화장실에 들어오는 경우가 거의 없다 보니 좀 더 이성 간의 이해를 할 필요가 있겠다.

“화장을 고치러 들어오는 것인가요?”

“네, 보통 그래요. 바람에 날린 머리도 좀 바로 하고.”

“네, 그리고요?”

“그리고…….”

이영주가 울 듯한 얼굴로 말했다.

“손을 씻으려고 밖으로 나갔는데…… 검은 모자에 마스크를 쓴 남자가…… 세면대 앞에 있었어요.”

“어떤 자세로 있었나요?”

“제 쪽을 보고, 화장실이 늘어선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어요. 오른손에 망치를 들고 있었고.”

“어떻게 생긴 망치였습니까?”

“그냥…… 나무에 쇠 달린 보통 망치인데.”

“사용감이 있는 망치였습니까?”

“무슨 의미인지 잘.”

“오래 사용한 것처럼 보이는 망치였나요?”

“아, 네. 맞아요.”

젠장, 차라리 새 망치였다면 망치를 파는 철물점이라도 조사해 볼 텐데. 나는 신상명세를 다시 보며 물었다.

“현금 9만 8천 원을 빼앗기셨다고 진술하셨는데. 본인이 직접 주신 겁니까?”

“네…….”

“상황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이영주가 잘게 떨며 한 손을 들고 망치를 든 시늉을 한다.

“이, 이렇게…… 망치 든 손으로 핸드백을 가리켰어요. 저는 너무 놀라서 비명을 질렀고요.”

“비명을 지르니 상대가 어떻게 했습니까?”

“망치를 휘두르려고 하면서 검지로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어요. 전 너무 무서워서 입을 막았고…….”

“그랬더니 다시 망치로 핸드백을 가리켰나요?”

“네…… 돈 달라는 소리인 걸 눈치채고 얼른 지갑을 꺼내서 있는 돈을 다 꺼내줬어요.”

“그리고요?”

이영주가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도, 돈을 내줄 때도 이 사람이 왠지 그냥 갈 것 같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 사람이 돈을 받자마자 망치를 휘둘렀어요.”

1차 진술과 같은 내용이다. 그녀는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 화장실 문들을 방패 삼았다. 이영주의 말이 점점 빨라진다. 흥분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 그, 그래서! 제가 미리 봐둔 화장실 문을 열어서 그 사람 쪽으로 밀었고…… 제가 막 비명을…… 비, 비명을 지르고 다른 화장실 문도 마구 열어서 그, 그 사람이 모, 못 오게!”

지나치게 흥분했다. 잠시 쉬게 해야 될 것 같다.

“자자, 이영주 씨. 흥분하지 마시고. 잠시 호흡을 해볼까요?”

“후우, 후우…….”

나는 이영주에게 잠시 시간을 준 뒤 물었다.

“화장실 문으로 범인의 진입을 막고, 소리를 질러 주변에 도움을 청하신 거죠?”

이영주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후 범인은 도주했고요?”

“네, 맞아요.”

“혹시 범인이 돌 같은 건 안 들고 있었습니까?”

“돌…… 아뇨, 안 들었어요. 근데 제가 못 봤을 수도 있어요. 너무 경황이 없고 겁이 나서.”

“범인의 얼굴은 못 보셨을 것이고…… 키는 어땠습니까?”

“어…… 저보다 이 정도 더 컸어요.”

이영주가 자기 머리 위에서 손바닥 하나 위를 가리킨다.

“실례지만 신장이 어떻게 되십니까?”

“160이요.”

160에서 손바닥 하나 크기. 약 10㎝가 더 크다고 가정하면 170쯤이다. 이선희의 진술에 나온 범인과 일치한다. 나는 이영주에게 명함을 주며 말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혹시 더 생각나시는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 부탁드립니다.”

“네……. 저기, 형사님. 꼭 좀 잡아주세요. 부, 불안해서 출근하기 너무 힘들어요.”

나는 이영주의 겁먹은 얼굴을 보았다. 죄를 지은 인간이 법이 두려워 겁을 먹어야 될 판에 피해자들이 겁을 먹고 본업에 충실하지 못하는 상황. 나는 아이러니한 현실에 혀를 차며 말했다.

“반드시 잡아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시도록 해드리겠습니다.”

* * *

잠시 후 안산단원경찰서의 빈 사무실.

정선규의 배려로 국수본의 임시 수사본부로 쓰일 사무실에 둘러앉은 우리는 각자 진술받은 내용을 하나로 합치는 중이다. 연주가 각자의 진술서를 파일로 받아 공통점을 찾고 있다.

오진규는 연주가 정리 중인 문서를 물끄러미 보며 팔짱을 끼고 있다 말했다.

“여길 봐. 진술로 보면 아홉 명이 전부 키 170㎝에 피부가 하얀 편이고 날렵해 보이는 마른 체격의 남성이라고 진술했어. 그런데 말이야, 진짜 이상한 게 흉기라는 말이지. 연주야, 사건이 일어난 순서대로 정렬 좀 해줄래?”

연주가 엑셀을 조작해 데이터를 정렬시키자 사건의 순서별로 진술 내용이 변경된다. 오진규가 사건 몇 개를 가리키며 말했다.

“9월 28일의 살인사건이 1차 사건이다. 이때는 흉기가 돌이었고. 마지막 사건인 11월 24일의 사건에서도 흉기는 돌이었다. 그런데 중간에 7차, 8차, 9차 사건의 흉기는 망치야. 이거 이상하지 않아?”

관우가 목 깍지를 끼고 말했다.

“혹시 범인이 두 명이 아닐까 생각을 했는데 신장도 같고 체형도 비슷한 두 명의 범인이 동시에 같은 지역에서 활동할 가능성은 낮죠. 아, 이 새끼 도대체 뭐지?”

나도 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수많은 범죄 사례 중에 연쇄사건의 범인이 중간에 흉기를 바꾸는 사례는 있었다. 하지만 다시 처음 사용했던 무기로 돌아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범인이 흉기를 바꾸는 것은 손에 더 착 감기는 새로운 흉기를 찾았기 때문이다.

굳이 바꾼 무기에서 다시 처음 무기로 바꾼 이유가 무엇일까?

나와 관우, 오진규는 진술 내용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무엇이라도 찾아내려 애썼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결국 나는 내 기억에 의지해야 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일단 피해자들이 공격당한 곳으로 가보자 제안하려 했다. 거기 가면 어떤 기억이라도 읽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한참 전부터 우리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PC로 뭔가 사부작사부작하던 연주가 손을 번쩍 든다.

“발견!”

관우와 오진규가 움찔 놀라며 물었다.

“뭘?”

같은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연주만 뭘 발견한 걸까?

“잠깐만요. 5분만 주세요.”

연주가 빠른 손놀림으로 문서를 만들기 시작한다. 아니, 문서는 아니고 이미지 파일 같다. 금세 파일 하나를 뚝딱 만든 연주가 빔 프로젝트를 연결하며 말했다.

“빨리 만든다고 가독성을 고려하지 못했으니 양해해 주세요.”

그런 건 상관없다. 프레젠테이션하는 자리도 아닌데 뭘. 연주가 빔으로 띄우는 이미지 파일. 그것은 안산시의 지도였다. 관우가 이게 뭐? 하는 얼굴로 묻는다.

“이게 왜? 그냥 지도인데.”

연주가 빙긋 웃으며 스페이스 바를 누르자, 지도 한 곳에 붉은 점이 그려지며 선 하나가 생긴다. 선은 쭉 위로 올라가 어느 지점에 멈춘다. 오진규가 지도를 멀뚱히 보며 물었다.

“이거 내가 인터뷰한 사람 이동 구간 같은데?”

연주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 계속 보세요.”

연주가 또다시 스페이스 바를 누르자 또 지도 한편에서 붉은 점이 생기고 다시 선이 어딘가로 이동한다. 어느 지점에 도착한 선이 점을 이루자 이번에는 관우가 말했다.

“내가 인터뷰한 김정희 씨 이동 동선인데?”

연주가 다시 스페이스 바를 누른다. 이번에 나온 건 이영주 씨의 이동 동선이다. 연주가 뭘 하고 있는 걸까?

지도상에 떠오르는 점들의 시작점은 생존자들이 출발한 곳이고 도착점은 변을 당한 곳이지만 서로 전혀 공통점이 없다. 비슷한 안산이긴 하지만 각기 모두 다른 동네이고 도보로 이동했을 경우 먼 곳은 한 시간 거리이기도 하다.

연주는 사망자의 이동 동선까지 총 11개의 선을 긋고 22개의 점이 생성된 지도를 눈짓하며 말했다.

“다시 자세히 보세요.”

나는 무작위로 그려진 점과 선들을 가만히 보다 어느 순간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거…….”

연주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역시 과장님은 눈치채셨네요.”

나 다음으로 오진규가 눈을 크게 뜬다.

“오, 이거?”

관우만 눈치를 못 채고 방 탈출 카페에서 혼자 못 나온 대학생 같은 얼굴로 지도를 보며 조바심을 낸다.

“왜, 왜? 나만 모르는 거야, 이거?”

연주가 혼자 눈치채지 못한 관우를 위해 지도의 선들 중 한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점과 점은 공통점이 없어 보이지만 이 모든 선은 한 동네를 지나가고 있어.”

연주 말에 관우가 다시 선들을 보며 중얼거린다.

“원곡동?”

연주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범인 새끼가 여기서 사냥감을 물색하고 있는 거야. 원곡로 다문화 거리.”

“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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