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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기억-213화 (212/328)

살인의 기억 213화

16. Journey to crime(15)

도정학은 서슬 퍼런 내 기색에 찔끔하며 말했다.

“그게…… 전남 목포 방직공장에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언제?”

“그건 모르고…… 사장이 자꾸 때려서 그만뒀다고만…….”

됐다, 버퍼 존 에어리어 안에 사는 외국인 중에 전남 목포 방직공장 출신의 외국인을 찾으면 된다. 한국에 입국 시 정식 취업비자를 발급받았을 테니 바로 신상을 파악할 수 있다.

나는 즉시 오진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님, 접니다. 외국인 취조 중단해 주시고, 리스트에 있는 놈들 중에 전남 목포 방직공장에서 일했던 기록이 있는 놈을 찾아주세요. 빨리 부탁합니다.”

할 말만 끝내고 전화를 끊은 나는 두 녀석이 타고 다니는 스쿠터를 힐끔 보았다.

도정학은 스쿠터를 타고 다니다 범인과 대화를 나눴다. 그것은 범인이 이 동네에서 배달하고 다니는 오토바이에 대한 경계가 느슨하다는 뜻이다.

“스쿠터 또 있어?”

도정학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다.

“예?”

“스쿠터 말이다. 노는 놈 있냐고.”

“어…… 그게, 가게 가면 배달용 있기는 한데.”

“잠깐 빌려 타자.”

“……사장님께 허락을 받아야 되는데.”

“그건 내가 알아서 한다.”

나는 도정학의 스쿠터를 얻어 타고 그가 일하는 가게로 향했다. 백만 원의 벌금이 아까운 것인지 경찰 자체에 면역이 없는 것인지 모를 마지헌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가게 사장님은 중국인이었다. 도정학의 통역을 받아 경찰임을 증명하고 잠시 스쿠터를 빌렸다.

도정학이 헬멧을 챙겨주며 물었다.

“탈 줄 아십니까?”

“나 원동기 면허 소지자다.”

“아, 그럼…….”

“중앙공원 말고 또 그놈 본 곳 있어?”

“음, 다문화 거리 초입에 있을 때도 있고, 원곡 공원이나 관산 공원 쪽에 있을 때도 있습니다.”

나는 핸드폰 내비게이션을 켜고 중앙공원을 기점으로 네 개의 점을 찍었다. 네 지점을 모두 찍으며 한 바퀴 도는 데 30분. 시동을 건 나는 연료 게이지를 보며 물었다.

“이거 연비 얼마나 나와?”

“한 40㎞는 나옵니다.”

“워, 많이도 나오네.”

“만 원 넣고 타면 하루 종일 배달하고 남습니다.”

기름 모자라서 주유소 갈 걱정은 없겠구나. 나는 지갑을 뒤져 만 원을 꺼내주며 말했다.

“내가 기름 채워놓고 반납할 정신이 있으면 다행인데 혹시 그냥 반납하면 내 대신 기름 좀 채워줘라.”

“예…….”

주섬주섬 돈을 받는 도정학을 뒤로 하고 헬멧을 쓴 나는 스로틀을 당겼다.

꽤 괜찮은 바이크 같다. 스쿠터라고 무시했는데 꽤나 부드럽게 잘 나가는구나. 물론 경찰대 재학 시절에 잠시 교육받았던 커다란 바이크와 비교할 순 없겠지만 동네 돌아다닐 때 큰 바이크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 딱 이 정도 사이즈가 좁은 골목길도 잘 다닐 것이다.

중앙공원, 다문화 거리 입구, 원산 공원, 관산 공원. 네 개의 포인트를 한 번 찍고 돌아와 시간을 보니 오후 네 시가 좀 넘은 시간이다.

범인이 가장 빠른 시간에 CCTV에 찍힌 건 오후 다섯 시. 곧 녀석이 활동할 시간이다. 나는 브레이크를 잡고 잠시 중앙공원을 노려보았다.

만약 가로등 아래에 범인이 나타났을 때 어떤 도주로를 어떻게 막아야 할지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는 도중 오진규에게서 전화가 왔다.

-과장님, 접니다.

“예, 선배님. 찾았습니까?”

-예, 찾았습니다. 전입신고가 되어 있는 놈 중에는 비슷한 놈이 없어서 방직공장 측에 최근 사라진 외국인 노동자를 확인했습니다. 이름 쉬하이칭(許海清), 한국식 이름으로는 허해청입니다. 2024년에 방직공장에 취업했습니다. 취업비자 발급처는 대한민국과 지린성 퉁화시입니다.”

도정학의 말이 맞았다. 오진규가 말을 이었다.

-공장장이 쇠파이프로 때린다고 수차례 상부에 고발했지만 고용주가 무시했다고 합니다. 경찰에도 신고기록이 있는데 유야무야 그냥 넘어간 모양입니다.

외국인 노동자는 법적 보호의 테두리 바깥에 있다. 불법 근로자가 아닌 합법적 근로자 역시 불합리한 대우에 노출되는 일이 많다. 아마 이 일도 고용주와 경찰의 유착 관계에 의해 그냥 넘어갔을 가능성이 있다.

“허해청의 비자는 산업연수생 비자였습니까?”

-예.

“산업연수생은 지정된 공장에서 일을 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계약 기간 동안에 이직이 불가능해서 이탈 시 불법체류자가 된다고 알고 있는데.”

-맞습니다. 현재 불법체류자입니다.

불법체류자. 전입신고를 하고 다닐 리가 없는 인간 부류다. 만약 우연히 배달하는 녀석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신나게 엄한 땅을 파고 있었겠구나.

오진규가 말했다.

-조선족인 것까지는 확인했는데 현재 주소가 파악되지 않습니다. 외국인이라 핸드폰이나 신용카드도 사용하지 않고 있어 생활반응이 제로입니다.

음, 골치 아프게 됐구나. 결국 진짜 스쿠터를 타고 다니며 잠복하다 잡는 수밖에 없는 걸까? 하지만 오진규는 내 고민을 한 방에 해결해 준다.

-하지만 범위를 좁힐 수는 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부동산 계약서를 쓰지 않고 현금결제로 얻을 수 있는 공간을 생각해 보면 됩니다.

역시 이 사람의 경험은 대단하다.

“모텔이나 여인숙 같은 숙박업소 말입니까?”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만, 거긴 아닐 겁니다.

“왜요?”

-생각해 보세요. 이놈 이거 돈이 없는 놈입니다. 돈 벌겠다고 퍽치기를 하고 다니긴 하는데 생각보다 돈이 잘 안 모이죠. 모텔이나 여인숙은 생각보다 싸지 않습니다. 게다가 저렴한 곳을 찾았다고 해도 여인숙 들어가면 더러운 공동화장실을 같이 써야 할 때도 있는데 그럼 얼굴이 노출되니 피하려 했을 겁니다.

“음, 그럼 어디일까요?”

-고시원.

머릿속에 전등불이 켜지는 듯하다. 나도 고시원에 산다. 사실 고시원 계약을 할 때 사장님이 이런 말을 했었다. 현금으로 결제하면 얼마 할인해 주고, 한꺼번에 몇 개월 치를 계산하면 얼마를 더 까준다. 대신 현금영수증은 못 써주고, 전입신고도 안 된다.

물론 할인을 받을지 말지는 본인이 결정하는 것이지만 충분히 방법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조선족 말투이긴 하지만 허해청은 엄연히 한국어 소통도 되는 사람이니 흥정도 가능했을 것이다.

“버퍼 존 내의 고시원이 몇 개입니까?”

-두 곳입니다.

“바로 형사들 지원받아 출동시켜 주세요. 사진 있습니까?”

-예, 여권 사진 입수했습니다.

“언제 사진입니까?”

-4년 전 사진인데 감안해서 보겠습니다.

“부탁합니다.”

찾아낼 수 있을까? 허해청이 과연 고시원에 살며 가명이 아닌 본명을 사용했을까?

고시원 주인의 허락을 받아 조선족이 사는 고시원 방을 뒤진다고 쳐도, 이곳에 사는 조선족은 꽤 많다. 그중에 허해청을 구분해 내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이제 곧 어두워지는 시간. 놈은 분명히 고시원 밖으로 나올 것이다. 사람이 있는 방을 찾는 것도 어려운데, 사람까지 없는 빈방을 찾아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스쿠터 받침대를 올리며 중얼거렸다.

“결국 몸으로 뛰어야지, 뭐.”

같은 시각 안산단원경찰서 임시 수사본부.

도경의 지시로 잠복할 형사들을 지원받고, 몽타주를 뿌린 연주가 사무실로 돌아왔다. 사무실에는 언제나 그랬듯 관우가 CCTV를 분석 중이다.

연주를 본 관우가 손을 들며 말했다.

“고생 많네.”

연주가 수첩을 테이블에 던진 후 관우 옆에 털썩 앉았다.

“하, 뭐 좀 나왔어?”

“어, 범인 새끼 잔뜩 나왔지.”

“어디?”

“봐.”

관우가 찾아낸 범인의 모습들. 하나같이 얼굴을 구분할 수 없지만 30일간 엄청나게 많은 곳에서 찍혔다. 관우가 보기 좋게 편집해 놓은 영상의 숫자만 이미 백 개가 넘어간다.

연주가 머리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미치겠네. 지가 홍길동도 아니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관우가 씩 웃으며 말했다.

“범인들 원래 다 이래.”

연주가 벽에 걸린 지도를 바라보며 한숨을 쉰다.

“버퍼 존이 있다는 것도 알아냈고, 장물아비 전당포에서 반경 270m 안에 범인이 있다는 것도 알아냈는데. 더 진전이 없네.”

그때 연주의 핸드폰이 울린다.

“어? 오 선배다. 네, 선배님! 네? 고시원이요? 네, 네! 알겠습니다. 범인 이름은요? 허해청? 네, 네. 받아 적을게요.”

연주가 메모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관우가 물었다.

“범인 누구인지 알아낸 거야?”

연주가 전화를 끊고 일어났다.

“어, 나 고시원 수색 간다. 뭐 나오는 거 있으면 바로 연락 주고.”

“야, 범인 누군데?”

“허해청.”

“그게 누구…….”

연주가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다. 혼자 남은 관우가 입맛을 다시며 분석 중인 CCTV 화면을 보다 실소를 짓는다.

“난 지금까지 뭘 한 거냐…… 아무 도움도 안 됐네, 제길.”

자책하며 한숨을 쉬던 관우. 지금까지 몇 시간이나 뚫어지게 화면만 보던 관우는 의자에 눕듯이 앉아 목 뒤로 깍지를 낀다. 피로한 눈을 깜빡이며 사무실을 바라보던 관우는 연주가 체크해 둔 지도에 눈이 간다.

“이렇게 프로파일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놈은 처음 봤네. 대가리가 나쁜 거야, 아님 자기 방법에 충실한 거야?”

관우는 연주가 찍어둔 압정과 서로의 점을 잇는 실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범인은 자신의 행동반경을 철저히 제한하고 있다. 머리는 나쁠지 몰라도 조심성 하나는 끝내주는 놈이다. 게다가 모든 CCTV의 위치도 파악하고 있는지 하나같이 사각으로 고개를 돌린 영상들만 나왔다.

“강박이 있는 놈이 확실해. 뭐, 잡아보면 알겠지.”

범인 윤곽이 나왔다는 소식에 배가 고파진 관우가 옆에 둔 햄버거 포장지를 까 입에 문다. 지금까지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느낌에 멍하게 초점 잃은 눈으로 모니터를 보던 관우는 햄버거를 한입 깨물다 멈칫한다.

초점을 잃었던 눈빛이 서서히 돌아온다.

“잠깐만. 강박이 있다고?”

관우는 햄버거를 던져 버리고 CCTV 파일의 이름을 날짜와 장소별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백 개가 넘는 영상 파일의 제목을 정리한 관우가 데이터 정렬을 한 뒤 눈을 크게 뜬다.

“이 새끼 이거!”

관우가 급히 전화를 건다.

“과장님! 관우입니다! 어디 계십니까?”

-나, 지금 스쿠터 타고 중앙공원에서 다문화 거리 초입으로 가는 길이야. 왜?

“과장님! 거기가 아닙니다! 이 새끼 오늘 관산 공원으로 갈 겁니다!”

스쿠터가 급히 멈추는 소리가 나고, 시동을 끄는 소리도 들린다. 잠시 후 도경이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말이야?

“연주와 대화하다 이 새끼가 버퍼 존도 딱딱 지키고, 머리는 나쁜 것 같은데 조심성은 더럽게 많은 놈이라고 중얼거리다 보니 이놈에게 강박이 있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CCTV에 찍힌 놈의 모습을 날짜와 장소별로 정리했는데…….”

관우가 모니터 속 파일 이름들을 보며 침을 삼킨다.

“이 새끼…… 요일별로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요일에는 항상 같은 곳을 다녔습니다.”

-뭐?

관우가 책상 위에 있는 탁상 달력을 낚아채며 요일을 체크한다.

“오늘은 목요일. 지난주 목요일에 관산 공원에 있었습니다.”

-2주 전에는?

“관산 공원에서 찍혔습니다. 3주 전도 마찬가지입니다.”

도경은 잠시 말이 없다. 판단에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다. 잠시 후 도경의 목소리가 들린다.

-바로 관산 공원으로 간다. 연주와 오 선배에게 연락해서 관산 공원으로 출동해 달라고 해.

“예, 과장님! 다른 잠복 형사들은 어떻게 할까요?”

-일단 확신이 설 때까지는 우리만 움직인다. 범인은 한 명이니 충분해.

“알겠습니다, 과장님.”

-관우야.

“예?”

-수고 많았다.

“…….”

-끊는다.

끊어진 전화. 빈 액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관우가 빙긋 웃으며 주변을 보다 아까 던져 버린 햄버거가 바닥을 구르고 있는 것을 보고 벌떡 일어난다.

“젠장! 내 햄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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