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219화
17. 증거(證據)(3)
사건 자료를 담은 박스를 가지고 사무실로 돌아와 허해청 관련 보고서 마무리 중인 연주를 제외한 나머지 둘을 데리고 이번 사건에 대해 간단히 브리핑하자, 오진규가 턱을 괴고 있다 물었다.
“요지는 시신이 어디 있는가? 시신은 무슨 말을 남겼는가? 이 두 가지겠군요.”
경험 많은 오진규는 섣불리 남편 한정수를 범인으로 몰지 않는다.
이런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보통 어떻게 남편이 범인임을 증명할 것인지부터 생각하는 이가 많다. 하지만 경험 많은 형사라면 처음부터 누군가를 범인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습니다.”
오진규가 들고 있던 볼펜을 놓고 일어나며 말했다.
“KCSI에서 수거한 증거물 중에 힌트는 전혀 없습니까?”
“일단은 그렇다는데 현재도 계속 분석 중이랍니다.”
“음, 그럼 거기부터 가보죠. 증거 분석 전에 움직이는 건 에너지 낭비인 것 같으니.”
“그러죠.”
* * *
관우, 오진규와 함께 도착한 KCSI.
조금 전까지 경찰청에 있던 목 과장님이 먼저 돌아와 로비에 나와 계신다. 가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과장님이 눈인사를 하며 말했다.
“이쪽.”
보통 KCSI에 오면 부검 결과를 듣기 위해 시신 보관실부터 가게 마련인데 시신이 없으니 검사실로 향하는 우리. 유리 벽 안쪽에서 고글을 쓰고 시약 테스트 중인 대원을 바라본 목 과장님이 입을 연다.
“미리 들었겠지만 현장은 야외였다. 증거물의 효력이 있을 만한 물건이 발견된 건 담배꽁초 두 점과 씹다 뱉은 껌 한 점. 안타깝게도 세 가지 증거물 모두에서 남편 한정수의 DNA는 나오지 않았어.”
관우가 손을 들자, 목 과장님이 질문하라는 눈짓을 보낸다.
“범인을 꼭 한정수로 지목할 수 없습니다. 물론 정황증거상 남편이 일 순위 용의자이긴 하지만요. 증거물 3점에서 나온 DNA는 혹시 몇 명의 유전자였습니까?”
목 과장님이 손가락 세 개를 들어 올리자, 관우가 입맛을 다신다. 담배꽁초 둘과 껌. 세 가지 모두 다른 이의 DNA가 나왔다는 건 용의자를 특정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진규가 팔짱을 끼고 있다 물었다.
“일단 DNA 결과표 주시죠. 전과자 데이터부터 돌려보겠습니다.”
목 과장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미 돌렸습니다. 셋 중 한 명에게 전과가 있었습니다.”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눈을 빛냈다.
“전과자가 있어요?”
목 과장님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직감상 이놈은 아니란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조사는 해봐. 절도 전과 3범이야.”
음, 절도 전과자. 그것도 3범. 하지만 절도 전과자가 살인자가 되려면 범죄의 발전기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절도만 저지르다 어느 순간부터 강도로 돌변하거나, 폭행치사 같은 중대 범죄로 발전하는 과도기를 말한다.
목 과장님이 저리 말씀하시는 이유는 이러한 범죄심리학을 기반한 것이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물었다.
“나머지 둘은 DNA 대조 샘플이 없습니까?”
“음, 없어.”
많은 사람들이 현장에서 DNA만 발견되면 사건이 끝난 줄 안다.
하지만 그건 사실과 다르다. 발견된 유전자 성분이 경찰청이 보유한 전과자 DNA와 일치한다면 일이 쉽게 풀리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용의선상에 오른 모든 인물의 DNA를 채취해 대조 작업을 거쳐야 한다.
용의선상의 인물 중 그 누구와도 DNA 샘플이 맞지 않을 경우는 다시 용의자를 찾아야 한다. 경찰청은 국민 모두의 DNA 샘플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DNA 구조가 일치한 용의자가 있었다면 춘천 경찰서 형사들이 벌써 만났겠군요?”
“음…… 당일 알리바이가 워낙 확실해. 용의자가 공원묘지를 찾은 건 사건 전날이었고 CCTV 기록도 남아 있어. 본인 어머니 묘가 근처에 있는 것도 확인됐고. 현재 덤프 트럭 운전을 하고 있는데 사건 당일 트럭의 블랙박스 영상 확인 결과 남양주의 공사 현장에서 오전 7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했던 것이 확인됐다. 공사 현장에 직접 가서 확인했는데 근무기록지도 다 정상이고.”
알리바이가 확실한 사람. 춘천 경찰서 형사들이 바보도 아니고 구멍이 숭숭 뚫린 알리바이를 인정했을 리가 없다. 그렇다는 건 이 사람은 용의선상에서 제외해도 된다는 뜻. 나머지 두 사람의 DNA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른 건 전혀 없습니까?”
“아까 말했던 혈흔들만 있어.”
“세 군데 나왔다고 하셨죠?”
“음, 정확히 말하면 사람이 흘린 것으로 보이는 출혈이 세 곳이라고 해야겠지.”
“무슨 뜻입니까?”
목 과장님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갤러리를 오픈한다. 영상 분석 전문인 관우가 과장님의 화면을 보다 인상을 찌푸린다.
“으…….”
오진규가 관우 표정을 보며 손을 내민다.
“왜? 나도 좀 보자.”
관우가 핸드폰을 내밀자, 오진규 표정도 비슷해진다. 뭐 불쾌한 장면이라도 담긴 걸까? 오진규는 의문스러운 얼굴을 한 내게 화면을 내밀며 말했다.
“현장이 야외이니 별게 다 생겼군요.”
오진규가 내민 화면 속. 인근의 바위 위에 찍힌 새의 발자국이 보인다. 헌데 그 발자국이 핏빛이다. 목 과장님이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피 내음을 맡고 까마귀들이 온 것 같다. 핏속을 걸어 다니던 까마귀들이 인근 바위에 앉으며 생긴 혈흔들이야.”
“…….”
영화에서나 볼 듯한 참혹한 광경이다.
“모두 몇 군데나 나왔습니까?”
“189개.”
“…….”
도대체 까마귀가 몇 마리나 몰려든 걸까? 나는 핸드폰을 돌려주며 팀원들에게 말했다.
“바로 현장으로 가보죠.”
* * *
잠시 뒤 춘천 묘산 추모공원.
평일이고 명절도 아직 멀었기에 공원을 찾는 이는 거의 없는 이곳. 사건 현장이었기에 증거 훼손을 막기 위해 이곳을 지키는 순경들 몇이 보인다.
오진규가 차에서 내린 후 손짓으로 순경을 부르자, 멀뚱멀뚱 다가오는 순경. 오진규가 신분증을 내보이자 그대로 굳어버린 젊은 순경은 급히 경례를 붙인다.
“충성.”
“어, 현장 어디야?”
“이쪽입니다.”
순경은 제일 나이가 많은 오진규 옆에 딱 붙어 폴리스라인으로 막힌 부분들을 뚫어주며 현장으로 안내한다. 은색 승용차가 그대로 남아 있는 현장에 도착한 순경이 말했다.
“신고일은 1월 8일. 사건이 벌어진 날은 하루 전날인 7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오진규가 차를 살피며 말했다. 운전석 유리 쪽에 피가 튀어 있다.
“너 이쪽 지구대야?”
“예, 경감님.”
“신고받고 초기 출동한 팀 소속이냐고.”
“예, 맞습니다. 제가 제일 처음 도착한 대원이었습니다.”
“당시 상황 말해봐.”
순경은 긴장한 듯한 말투로 말했다.
“주변을 순찰 중에 지구대에서 무전이 왔습니다. 묘산 추모공원에서 신고가 접수되었으니 즉시 출동하라고 해서 같이 순찰 돌던 후배와 같이 왔습니다.”
나는 말없이 순경의 말에 집중하고 있다. 순경은 자신을 뚫어지게 보는 날 힐끔 보고는 다시 오진규 쪽을 보며 말했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묘지 관리인이 나와 있었습니다. 61세 남성이었고 당일 들어올 유골함을 묻을 땅을 파러 인부들과 새벽부터 묘지에 갔다가 안쪽에서 혈흔이 튄 자국이 있는 차를 발견하고 신고했다고 했습니다.”
오진규는 잠자코 순경의 말을 듣다가 그의 어깨를 붙잡고 내 쪽으로 돌려세웠다.
“내 쪽 말고, 이쪽 보고 보고해.”
“예?”
“저쪽. 저기 키 크신 분이 상관이다.”
순간 헉하는 표정을 짓는 순경. 나이로 오진규의 계급이 제일 높다고 짐작했던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나는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 됐습니다. 수색대는 아직 수색 중입니까?”
순경이 내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잔뜩 굳은 몸짓으로 말했다.
“예, 의경 10개 중대가 동원됐습니다.”
관우가 휘파람을 분다.
“오, 10개 중대면 몇 명이야? 1개 중대가 120명쯤 되니까 1,200명이네.”
나는 주변을 보며 물었다.
“수색대 현 위치는?”
순경이 산 너머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제 이 산 수색을 마치고 지금은 뒤로 넘어가 민가 근처에 도착했을 겁니다.”
“아직 소식은 없고요?”
“예, 없습니다.”
관우는 이야기를 들으며 혈흔을 살피다 까마귀가 찍어놓은 바윗돌 위의 발자국들을 보곤 인상을 찌푸린다. 고개를 들어 높은 나무들을 보며 볼을 긁은 관우가 중얼거린다.
“나무 위에도 혈흔이 엄청 찍혀 있겠네.”
관우는 위를 살피다 가로등에 CCTV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물었다.
“CCTV 설치 현황표 어디 있습니까?”
“공원 사무실에 있습니다.”
관우가 먼저 움직인다. 오진규는 차 옆에 쪼그리고 앉아 앞바퀴 주변을 살피고 있다. 나는 다시 순경에게 물었다.
“묘지 관리인의 진술 중에 특이점은?”
“없습니다, 차밖에 못 봤고, 같이 올라온 인부들이 아무래도 신고를 해야 할 것 같다고 해서 그냥 한 거랍니다. 이른 새벽 시간이고 공원 개장하기 전이라 일반 손님도 없는 시간이어서 딱히 사람을 목격한 적도 없고 말입니다.”
순경이 난감한 얼굴로 말한다. 이러니 춘천 경찰서 형사들도 답답할 수밖에. 나는 차 바퀴를 살피는 오진규 곁에 쪼그리고 앉아 물었다.
“뭘 그리 보십니까?”
오진규가 장갑을 끼고 바닥을 만져보며 말했다.
“보고서를 보면 치명적인 출혈이 일어난 곳은 차 속입니다. 유리창 안쪽을 보면 육안으로 보기에도 다량의 피가 보이죠. 그런데 발견된 혈흔 중 세 점이 차 밖에 있습니다. 이건 안에 있던 부상자가 밖으로 나왔거나, 혹은 안에 있던 범인이 밖으로 나오며 흘렸다고 봐야겠죠.”
“음…….”
나는 다시 차 속을 보았다. 저 정도로 피를 많이 흘리려면 큰 부상을 당했다고 봐야 하는데. 그 몸으로 차 밖으로 나올 수 있었을까? 오진규가 턱을 쓸며 말했다.
“외부에 있는 혈흔은 위에서 아래로 튄 모양이었습니다. 이런 부상을 입은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면 비틀거리며 차를 붙잡았거나, 쓰러지기라도 했을 겁니다. 그럼 혈흔이 남았겠죠. 하지만 이 현장에는 그런 점이 없습니다. 고로, 외부에서 발견된 혈흔은 범인이 흘린 것이라고 봐야죠. 그리고 혈흔의 방향은…….”
3점의 혈흔. 그것은 삼각형 모양으로 흩어져 있다. 그중 차에서 가장 먼 쪽에 있는 혈흔을 가만히 노려본 오진규가 말했다.
“가장 먼 쪽에 있는 혈흔이 가장 나중에 흘린 혈액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범인은.”
오진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혈흔이 나 있는 방향을 바라본다.
“주차장 쪽으로 갔겠군요.”
오진규의 시선이 닿는 곳. 거기에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골목길이 보인다.
우리는 한참 주차장을 바라보다 멀리서 하드를 챙겨 돌아오는 관우를 보았다. 관우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과장님! 뭐 하나 건진 것 같습니다.”
응? 좀 전에 하드 가지러 간 녀석이 벌써? 관우가 다가오며 백 팩에서 노트북을 꺼내 하드를 연결한다. 저걸 전부 걸어오면서 할 수 있다는 것도 능력인 것 같다.
관우는 은색 승용차 위에 노트북을 올린 후 영상 하나를 재생한다.
공원 사무국 화장실 앞에서 찍힌 CCTV 화면이다. 관우가 씩 웃으며 말했다.
“하드 가져오며 혹시나 해서 사건 당일 전체 지역 CCTV를 빠르게 돌려보다 발견했습니다.”
관우가 보여주는 영상 속. 화장실을 갔다가 나온 한정수가 여자 화장실 앞을 서성이며 기다리다, 잠시 후 나온 아내 김주연을 보고는 인상을 쓰며 뭐라 말하는 것이 보인다.
음성이 없는 영상이라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표정을 보니 감정이 좋지 않은 것 같다.
김주연 역시 지지 않고 남편을 노려보며 뭐라 말을 한다. 그러자 한정수가 손을 번쩍 들어 아내를 때리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결국 아내를 때리지는 않고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려 먼저 사무국을 빠져나가 버린다.
오진규가 턱을 만지며 영상을 보다 말했다.
“사건 당일에 두 사람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 이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