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인의 기억-220화 (219/328)

살인의 기억 220화

17. 증거(證據)(4)

관우가 가져온 CCTV 자료를 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전화기가 울린다. 액정을 보니 연주 번호가 찍혀 있다. 허해청 마무리 보고서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어, 연주야.”

-과장님, 혹시나 해서 법원에 등록된 기록을 확인했는데 두 부부가 최근 이혼소송을 했답니다.

나는 실소를 흘렸다. 이 사건은 우리가 맡을 테니 기존 사건 마무리만 잘 부탁한다고 했는데 그새를 못 참고 또 사건을 건드렸구나.

“그래? 언제야?”

-사건 발생 한 달 전입니다. 저 보고서 다 했는데. 저도 움직여도 될까요?

“검찰에 연락은?”

-좀 전에 마지막 보고서 보내고 담당 수사관에게 연락했어요. 1차 검토 후 다시 연락 주신다고 하는데. 어차피 저 멍때리고 기다려야 되는데 탐문이라도 하면 안 돼요?

“좀 쉬지.”

-이게 쉬는 겁니다. 전 사건 수사할 때가 제일 좋아요.

“하하, 알았어. 그럼 두 사람 집에 가보고, 이웃들 탐문 좀 해봐. 이혼을 할 만큼 사이가 안 좋았다면 주변 사람들이 뭔가 알고 있었을 확률이 높아. 가끔씩 가정폭력도 있었던 것 같다니까 혹시 아내가 맞는 걸 봤거나, 멍이 든 걸 본 적 있는 사람 있는지 확인하고.”

-네! 과장님! 감사합니다!

웃음이 나온다. 일 주는 게 뭐 좋다고. 출근하자마자 퇴근 시간만 기다리는 사람도 많다는데. 우리 팀엔 그런 사람이 없는 모양이다.

전화를 끊고 미소 짓는 날 본 오진규가 바지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이혼 소송이라. 그럼 남편 한정수 쪽을 좀 파보겠습니다.”

“어떻게요?”

오진규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 나이 먹고 이혼을 생각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성격 차이로 헤어지는 경우였다면 좀 더 일찍 헤어졌겠죠. 하나는 남편 사업의 실패. 남편 한정수는 전에 사원 수 15명쯤 되는 작은 유통업체를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일 년 전에 사업을 정리했는데 그때 빚이 남아 있다면 대출 때문에 허덕였겠죠. 그게 다툼의 발단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음, 일리 있는 말이다. 관우가 노트북을 닫으며 말했다.

“나머지 하나는 뭔데요?”

오진규가 관우 뒷목을 슬쩍 주무르며 말했다.

“외도.”

“아, 바람?”

“그래, 내연 관계에 있는 여자가 있다면 한정수가 범인일 확률이 더 높아진다. 어쩌면 둘이 공범일 수도 있고.”

“호, 그런 전례가 있었죠.”

오진규가 날 보며 말했다.

“저는 한정수 쪽을 따로 조사해 보겠습니다.”

“그러세요.”

오진규가 현장을 떠나고 나는 관우와 함께 사무실로 돌아왔다.

연주가 어찌나 신이 나서 나갔는지 자리에 슬리퍼가 뒤집어져 있다. 나는 씩 웃으며 연주 슬리퍼를 바로 놓은 뒤 관우에게 말했다.

“CCTV 분석해서 뭔가 나오면 바로 알려줘.”

“예, 과장님.”

조금 여유를 가져도 될 시간. 나는 커피 한 잔을 타서 내 자리로 왔다. 사건 보고서 중 내가 빠뜨린 것이 있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다 문득 강혁 아저씨 생각이 났다.

그리고 아저씨가 주고 간 양자 입적 신청서 생각도 난다. 빙그레 웃으며 아저씨 얼굴을 떠올리다 문득 목소리가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전화할까, 말까? 볼일도 없는데 괜히 전화해 본 적이 없어 좀 어색하다. 그래도 한번 해볼까?

나는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전화를 걸었다. 아저씨는 항상 전화 벨이 세 번 울리기 전에 전화를 받는 분이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지 꽤 오랫동안 신호가 간다.

열 번쯤 신호가 울린 후에 약간 갈라진 아저씨 목소리가 들린다.

-어…… 도경아. 무슨 일이냐?

아저씨 목소리가 왜 이렇지?

“무슨 일 있어요? 목소리가 왜 이래요?”

-어…… 아냐. 그냥 말을 오래 안 하고 있어서 그랬나 보다.

“사무실에 계세요?”

-아니, 잠깐 볼일 있어서 나왔다.

“아, 그냥 이따 밥이나 먹을까 해서.”

-……오늘은 좀 늦을 것 같은데. 내일 먹자.

“아, 뭐. 중요한 것도 아니니 나중에 시간 되면 먹어요. 근데 늦게 오실 정도면 지방 가신 건가요?”

-응.

“어디 가셨는데요?”

-춘천에 있다.

“어? 저 방금 거기서 왔는데.”

-그래? 아 영훈이가 새 사건 할당했다고 하더니. 그게 춘천에서 발생한 사건인가?

경찰청장에게 보고가 올라가는 사건은 수천 개이다. 모든 사건을 기억할 수는 없으니 당연히 모를 수 있다.

“네, 춘천 경찰서 쪽에서 이관받은 사건이 있어서요.”

-그래, 병원은 언제 가고?

“이번 주에 또 가야죠.”

-알았다. 늦지 않게 가고.

“예, 아저씨. 나중에 밥 먹어요.”

-오냐.

아저씨와의 짧은 통화를 끝내고 나는 물끄러미 액정을 보았다.

아저씨 목소리가 이상하다. 꼭 울다가 전화를 받은 것 같은 목소리.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아저씨의 풀 죽은 목소리가 자꾸 마음에 걸린다.

‘춘천? 거긴 왜 가신 거지?’

에이, 몰라. 아저씨가 발이 좀 넓어야 말이지. 또 누군가 만나러 가신 거겠지. 나는 병원 사이트에 들어가 이번 주 상담 예약을 신청한 뒤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몇 분 후, 드디어 관우가 손을 들며 날 부른다.

“과장님. 여기 좀 보세요.”

드디어 시작된 모양이다. 나는 얼른 일어나 관우 옆자리에 의자를 끌고 가 앉아 손바닥을 비볐다.

“자, 보자.”

당연히 공원묘지 관련 영상일 거라 생각하고 화면을 본 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뭐야, 이거 국도 CCTV 아니야?”

“예, 여기 날짜 보세요.”

나는 CCTV 우측 하단의 날짜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1월 1일?”

“예, 사건 발생 7일 전입니다.”

화면 속을 질주하는 차들. 관우는 어느 순간 화면을 정지시킨다.

“여기.”

화면 속에 한정수의 검은색 승용차가 보인다. 넘버를 확인한 나는 관우를 보며 물었다.

“한정수가 사건 발생 일주일 전에도 여길 왔다고?”

“혹시나 해서 열흘 전까지만 확인하려고 했는데 공원묘지 주차장에 한정수 차량이 들어온 걸 발견했습니다. 후에 국가 소유 CCTV로 추적을 해보니 묘지에 들렀다가 홍천 시내로 가는 걸 확인했고요.”

나는 턱을 만지다 습관적으로 말했다.

“연주야, 한정수 친척 중에 홍천 사는…….”

아, 연주 나갔지. 나는 다시 화면을 바라보다 말했다.

“계속 추적해.”

“예, 과장님.”

한정수의 차량이 국도를 달리다 시내로 접어든 후 은행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서울 사는 사람이 홍천까지 내려가서 은행에 갔다…….”

관우가 턱을 괴고 어깨를 으쓱한다.

“1월 1일이면 신정이니까. 이 동네 친척이나 친구가 산다면 어린이들 세뱃돈 주려고 찾았을 수도 있죠.”

“음.”

합리적인 생각이다. 관우 말처럼 한정수는 차에서 내려 은행 내부 CCTV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ATM기기에서 돈을 찾는 모습을 본 관우가 다른 PC로 한정수의 은행 계좌를 확인한 뒤 말했다.

“1월 1일 오후 2시 39분. 조안 은행 홍천 결운 지점에서 40만 원을 찾았습니다. 5만 원권 6장, 만 원권 10장.”

한정수는 다시 은행을 나섰다. 관우는 화면에서 한정수가 사라지자 다시 주차장 쪽 CCTV를 확인한다.

“어?”

관우가 주차장 CCTV를 바라보다 빠르게 돌린다. 하지만 한정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의 차량도 그대로 있다. 관우가 의자를 바싹 끌어 앉으며 중얼거린다.

“자자, 어디로 갔냐, 왜 집에 안 가고 또 딴 데 가고 그래. 은행 주차장 비싸다고, 이 아저씨야.”

관우는 은행 앞 국가 CCTV 데이터에 접속해 몇 분 만에 한정수를 찾아냈다.

“여기.”

한정수는 아무렇지 않게 걸어 주변을 살피더니 지나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묻는다. 길을 물어본 모양인지 행인이 한쪽을 가리키는 것이 보인다.

그에게 꾸벅 인사를 한 한정수가 다시 행인이 가리킨 방향으로 가다가 어느 순간 옆의 건물로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저기 어디야?”

“잠깐만요. 국가 CCTV는 아무래도 간격이 좀 있어서.”

국가에서 관리하는 CCTV는 이렇게 바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만 사설 CCTV로 확인해야 되는 곳은 직접 가서 영장을 보여주고 하드를 복사해야 한다.

관우는 여러 각도의 영상을 분석한 뒤 말했다.

“여기네요, 철산 철물점.”

철물점? 거긴 왜 갔을까?

“해당 시간에 카드 이용 내역은?”

관우가 아까 은행 계좌를 확인했던 PC를 두들긴 후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현금 쓴 모양인데.”

철물점에 왜 갔지? 나는 화면을 노려보며 말했다.

“나오는 영상 찾아봐.”

“예.”

관우가 화면을 빠르게 돌린 후 어느 지점에서 멈춘다. 뭔가 크고 하얀 사각형의 물건이 비닐에 싸여 한정수의 손에 들려 있는 모습이 보인다. 관우가 화면을 확대했지만 화질이 좋지 않아 확실히 확인이 불가하다.

“이거…… 말 통 같은데.”

“말 통?”

“예, 기름 살 때 쓰는 거 있잖아요.”

하얀색 사각형. 관우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다. 한정수는 그것을 들고 다시 차로 돌아와 트렁크에 실은 후 주차장을 나간다. 나는 영상을 가만히 바라보다 말했다.

“이날 한정수 동선 계속 추적해 봐.”

“예.”

나는 전화를 들어 목 과장님께 연락을 했다.

“과장님, 접니다.”

-어, 도경아.

“한정수 소유 검은색 승용차도 검사하셨습니까?”

-춘천 경찰서 요청으로 검사했다. 피해자 혈흔은 안 나왔고.

“그거 말고. 혹시 트렁크에서 하얀색 기름통 안 나왔습니까?”

-기름통?

“예, 액체를 담을 수 있는 하얀 통 있잖아요.”

-잠깐만.

보고서 들춰보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목 과장님이 말했다.

-그런 건 없었다. 왜?

음, 굳이 홍천 시내까지 가서 기름통을 샀는데…… 그게 없다?

“조사해 봐야 할 게 생겨서요.”

-음, 그래. 내가 도와줄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

“예, 과장님. 끊습니다.”

직감적으로 기름통이 사건에 관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다시 연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연주야. 한정수 자택 근처에서 탐문 중이지?”

-네, 과장님.

“혹시 한정수 씨 집에 있어?”

-어, 집에는 아직 안 가봤는데.

“이웃 탐문 중이구나?”

-네, 앞집 사람과 놀이터에서 이야기 중인데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얼굴에 멍이 든 김주연 씨를 본 적이 있대요. 그리고 한번은 손가락이 부러졌는지 깁스를 한 것도 봤고.

깁스를 했다고? 설마 아무리 그래도 아내 손가락을 부러뜨리는 놈이 있단 말인가? 아니겠지. 그냥 어디서 다친 것일 수도 있다.

“지금 거기로 갈 테니까 대기해.”

-네, 과장님. 한정수 씨 자택에 가실 건가요? 지하 주차장에 차 있나 봐둘까요?

“어, 그럼 좋고.”

-알겠습니다, 확인해 볼게요.

나는 외투를 입으며 관우를 보았다.

“한정수 차량. 바로 서울 방향 고속도로 탄 거야?”

관우가 날 보며 고개를 저었다.

“시내에서 한 군데 더 들렀습니다.”

“어디?”

“정육점이요.”

응? 갑자기 무슨 정육점? 외투를 바로 입으며 관우의 화면을 보니 검은색 승용차가 비상등을 켜고 정육점 앞에 정차된 것이 보인다.

가게 안에서 봉투에 든 묵직한 뭔가를 가지고 나온 한정수가 조수석 문을 열고 그것을 넣은 후 차를 빙 돌아 운전석에 올라타는 것이 보인다.

관우가 화면을 눈짓하며 말했다.

“이번에는 카드 기록이 있습니다. 홍천 한우 3㎏ 샀고요. 안심, 꽃등심, 국거리, 불고기. 골고루 샀습니다.”

이번에는 카드 기록이 있다? 큰돈이라 그랬던 걸까? 한우 3㎏이면 꽤 비쌀 것이다. 별로 의심스러운 부분은 아니니 이건 넘어가도 되겠다.

“계속 추적해 줘. 부탁한다.”

“옛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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