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인의 기억-221화 (220/328)

살인의 기억 221화

17. 증거(證據)(5)

본부에서 나온 나는 춘천으로 차를 몰고 갔다.

관우에게 철물점 주소를 받고, 당시 철물점에서 나오는 한 씨의 영상 캡처 사진까지 받은 나는 철물점 주변에서 주차할 곳을 찾았다.

하지만 철물점이 있는 상가 근처에는 마땅히 주차할 곳이 없다. 아주 옛날에 지어진 건물이라 그런지 지하 주차장도 없다.

결국 상가 주변을 빙글빙글 돌던 나는 한정수가 주차했던 은행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렸다. 잠시 CCTV 속에서 한정수의 차량이 주차되어 있던 곳을 바라본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정수는 처음부터 은행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도보로 철물점으로 이동했다. 어쩌면 그는 철물점 주변에 주차할 곳이 없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정수는 홍천을 잘 아는 사람일까? 나는 한정수의 동선을 따라가며 철물점으로 들어갔다. 외부에 용도를 알 수 없는 잡다한 부품들이 잔뜩 쌓여 있는 보통의 철물점.

천장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여러 공구들을 피해 허리를 숙이고 들어간 나는 주인부터 찾았다.

“계십니까?”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며 사람 목소리가 들린다.

“예, 갑니다.”

나이 지긋한 성인 남성의 목소리. 잠시 후 작업복을 입은 70대 초반의 할아버지가 안경을 고쳐 쓰며 나오는 것이 보인다.

“뭐 찾는 거 있어요?”

신분증을 보여주니 날 위아래로 훑어본 할아버지가 물었다.

“경찰이 왜? 뭐 물어보려고?”

“예, 혹시 이 사진 좀 봐주시겠습니까?”

한정수의 CCTV 사진을 보여주자, 할아버지는 쓰고 있던 안경을 들어 올리며 인상을 찌푸린다. 노안이 오셨는지 핸드폰을 멀리 떨어뜨리고 보던 할아버지가 말했다.

“이게 언제 사진이야?”

“1월 7일입니다.”

할아버지가 달력을 힐끔 보며 고개를 저었다.

“어제 일도 기억 안 나는 노인네가 열흘도 넘은 일을 어찌 기억해? 모르겠어.”

“저기, 여기 보면 하얀색 기름통을 구매한 것 같은데 다시 한번 봐주세요.”

“기름통?”

할아버지는 사진을 다시 본 뒤 안경을 다시 쓴다.

“옳거니. 기억이 나네. 한 50 먹어 보이는 양반이었는데.”

“기억하세요?”

“응, 저기 저거 사서 갔어. 만 원.”

할아버지가 가리키는 곳에 새것으로 보이는 기름통 세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화면상으로 보았기에 기름통이라는 추측만 했던 물건에 확신이 생겼다.

“다른 건 안 사갔습니까?”

“어…… 아, 그래. 목장갑 서비스로 하나 달라고 하길래 안 된다고 했더니 천 원 주고 샀어.”

“목장갑은 어떤 겁니까?”

“저기 저거.”

큰 비닐 봉투 속에 보통의 목장갑 뭉치가 가득 들어 있는 보인다. 손바닥에 빨간 휘발성 물질이 있는 보통의 목장갑이다.

저건 왜 필요했을까? 지문을 남기지 않으려고? 하지만 김주연 씨의 은색 승용차 안에서 한정수의 지문이 잔뜩 나왔다. 부부끼리 차에 지문이 남는 건 당연한 것이니 그것이 증거로 효력이 없을 뿐이다.

‘그렇다면 목장갑을 끼고 해야 할 다른 일이 있었다는 건데.’

한정수의 차량은 사건 일주일 전에 홍천 시내로 온 뒤 철물점과 정육점을 들른 후 서울로 돌아갔고, 사건 당일에는 묘지를 벗어난 후 다시 시내에 들렀지만 공원묘지 쪽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체 이 사람이 목장갑과 기름통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기름통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나는 물끄러미 날 바라보는 할아버지를 보며 물었다.

“혹시 이 사람이 다른 소리는 안 했습니까?”

“응? 뭐…… 별다른 말 없었는데?”

“감사했습니다. 혹시 뭐 생각나는 일이 더 있으시면 이쪽으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어, 그래. 고생하네. 살펴 가라고.”

명함을 넘기고 철물점을 나온 나는 차로 돌아간 뒤 정육점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그리고 한정수가 그랬던 것처럼 정육점 앞에 비상등을 켜두고 정차를 했다.

차에서 내린 나는 주변 도로 상황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홍천 시내와 달리 변두리인 이곳은 차량 통행량이 적다. 한정수는 정육점 앞 도로에 잠시 정차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거다.’

나는 정육점 간판을 올려 보았다. A4 용지에 오늘 할인하는 고기 부위가 써 붙어 있기도 하고, 소 잡는 날이 언제인지 표기되어 있기도 한 보통의 정육점이다.

정육점 문을 열자 딸랑 하는 방울 소리가 난다.

“실례합니다.”

구석에서 고기를 얇게 써는 기계를 돌리고 있던 남자 주인이 시끄러운 기계를 얼른 끈 후 손을 닦으며 다가온다.

“어서 오세요. 어느 부위 찾으세요?”

나는 다시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정육점 주인은 철물점 할아버지와 달리 썩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짓는다.

“무슨 일로?”

나는 다시 한정수의 사진을 보여주며 물었다.

“1월 7일에 여기 방문해서 홍천 한우 3kg 사간 남자 기억하십니까?”

정육점 주인은 철물점 주인아저씨와 반대로 구석에서 돋보기안경을 찾아와 쓰고 핸드폰을 본다.

“아, 아아. 이 사람 기억나네요. 가끔씩 오는 손님입니다.”

다행이다, 이 아저씨는 바로 기억하는구나. 정육점 주인이 핸드폰을 돌려주며 물었다.

“그런데 왜요? 이 사람이 범죄자라도 되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수사 기밀이라.”

“음, 그래. 뭘 물어보시게?”

“당시 상황에 대해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당시 상황이라면…… 정육점 문을 연다. 고기를 주문한다. 돈을 낸다. 고기를 받는다. 간다. 끝인데?”

“…….”

내 입장에서는 장난치는 것 같지만, 이 사람 입장도 이해는 간다. 정육점에 온 인간이 고기를 사간 건 당연한 거다. 정육점 와서 생선을 달라고 하진 않았겠지.

“혹시 고기 주문할 때 다른 말은 없었습니까?”

“다른 말이라면…… 요즘 고기 뭐가 맛있냐 이런 건데.”

“또 있습니까? 기억나시는 건 뭐든 좋습니다.”

정육점 주인장이 팔짱을 끼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냥…… 외지인 같길래 웃으면서 말 몇 마디 하긴 했는데…….”

“무슨 말이었습니까?”

“음, 홍천 좋죠? 여기가 물이 참 좋아요. 고기들이 맛있는 이유가 물이 좋아서 그런 겁니다. 뭐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였는데.”

음, 여기선 건질 게 없나?

나는 다시 명함을 건네며 철물점 아저씨에게 했던 말을 반복했다.

“더 기억나는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아, 뭐. 아차.”

주인이 뭔가 더 기억이 나는지 입을 열다가 머리를 긁는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내가 쓸데없는 소리만 하는 거 같아서 좀 그런데.”

“뭡니까? 괜찮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주인이 팔 바깥쪽을 긁으며 말했다.

“내가 한우 좋아하시냐고 물었더니 그 사람이.”

“예.”

“자기 말고 아내가 홍천 한우를 그렇게 좋아한다고. 그래서 가끔 사러 온다고 했어요. 그게 전부입니다.”

아내가 홍천 한우를 좋아한다? 그래서 여기 지리를 잘 알고 있던 거였나? 평소에도 가끔 한우를 사러 내려오는 거였어? 한정수가 정말 용의자가 맞을까?

나는 정육점 주인에게 인사를 한 뒤 다시 밖으로 나왔다.

마음이 좀 답답하다. 유력한 용의자인 한정수가 사건 일주일 전에 아내를 위해 홍천까지 내려와 한우를 사갔다. 그런 사람이 고작 일주일 뒤에 아내를 죽인다? 이게 말이 되는 걸까?

나는 잠시 차 주변에 서 있다가 뒤에서 차가 오는 것을 보고 얼른 차에 올라타 출발했다.

딱히 이 두 곳을 제외하고는 돌아볼 길이 없어 다시 공원묘지에 가보니 여전히 그곳을 지키고 있던 안면 있는 순경이 경례를 해온다.

“충성. 근무 중 이상무.”

“예, 수고하십니다.”

순경은 내 옆으로 따라붙으며 보고했다.

“수색대에서는 아직 별다른 연락이 없고, 현장에도 특이 사항 없었습니다.”

“그래요.”

그 짧은 시간에 무슨 일이 있겠냐? 막말로 KCSI가 휩쓸고 지나간 뒤인데 무슨 일이 일어났어도 크게 문제가 되진 않을 것이다.

나는 순경과 함께 터벅터벅 걸어 은색 승용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 묘지는 1구역부터 14번 구역까지 나누어져 있는 곳이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3번 구역. 산꼭대기에 가까운 곳이다.

“주차장이 요 아래인데. 굳이 차를 끌고 저 위까지 간 이유가 뭘까요?”

순경이 주차장 쪽을 내려보며 말했다.

“안 그래도 강력계 형사님이 그 질문을 하시더군요. 묘지 관리인 말이 명절 때는 차 못 올라가게 통제를 하는데 사람 없는 평소에는 차 몰고 올라가도 뭐라고 안 한다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걸어 올라가면 힘드니까. 몸 불편한 어르신들도 오시니 평소에는 차를 위쪽 도로에 대고 잠깐 참배하게 해주는 거죠.”

음, 1월 7일이면 신정이 지나고 난 후이다. 사람이 없는 날이란 뜻이다. 게다가 그날은 평일. 평소보다 더 사람이 없는 날일 것이다. 그래서 김주연 씨의 차량이 위쪽에서 발견된 것이구나.

밑에서부터 14번 구역이 시작된 묘지의 7번 구역에서 6번 구역 사이를 지날 때쯤. 나는 갑자기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게 뭐지?

어지러운 느낌에 걸음을 멈춘 나는 내 옆에서 함께 걷고 있던 순경의 모습이 흑백으로 물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세계가 돌기 시작한다.

뭐야, 이건 또 무슨 일이야? 나 악의를 가져야 뭔가 보는 거 아니었어? 뜬금없이 갑자기 여기서 왜?

그래, 뭐가 됐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범인을 잡을 힌트만 얻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나는 얼른 순경에게 말했다.

“힘드네요. 잠깐 요 벤치에서 쉬죠.”

나는 순경의 답을 듣기도 전에 벤치에 앉은 후 눈을 감았다. 빙글빙글 도는 세상 때문에 균형감각을 잃기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 * *

저벅저벅.

나는 익숙한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다. 조금 느린 걸음으로 아주 천천히.

나는 지금 혼자 있는 것 같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내 오른손에 들린 국화꽃 다발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익숙하게 느껴진 이유. 그것은 내가 방금 전까지 걷던 바로 그 길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마도 누군가를 참배하러 온 것 같다. 하얀 국화꽃이 생화 특유의 향기를 뿜고 있다.

푯말을 본 나는 우측으로 방향을 꺾었다. 저쪽으로 가면 5구역이다.

잠깐, 사건이 난 건 3구역인데. 그쪽은 3구역과 전혀 반대 방향이다. 3구역은 왼쪽 끝이고 5구역은 우측 끝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왜 5구역으로 가는 거지?

5구역에 도착한 나는 구역을 나눈 화단 사이에 난 사잇길로 들어갔다. 유골을 매장하는 곳이라 바닥에 납작하고 사각이 진 묘비들이 보인다. 남의 묘비들을 힐끔거리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는 나.

내가 밟고 있는 모든 곳의 지하에 사람의 시신이 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등골이 오싹하지만, 지금 내가 읽고 있는 기억의 주인은 오직 슬픈 감정만 가지고 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뭔가 북받쳐 오르는 느낌. 꼭 무척 슬픈 영화를 보고 울기 직전의 상태 같다. 나는 지금 무엇을 슬퍼하고 있는 걸까?

내 걸음이 천천히 느려진다. 나는 목표했던 곳에 거의 다다른 모양이다. 잠시 멈추고 물끄러미 하나의 묘비를 바라보던 나는 아주 천천히 걸어 뚫어지게 보던 묘비 앞에 섰다.

눈앞이 뿌옇게 변하는 것이 느껴진다. 눈물 때문에 가물가물해진 내 시야에 묘비에 기재된 이름이 보인다.

5-438

故人名 : 河娜恩

1960년 9월 13일 ~ 2023년 11월 10일

삼가 故人의 冥福을 빕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기억이야? 아니, 그전에 이건 누구의 기억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