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222화
17. 증거(證據)(6)
나는 우두커니 묘비를 바라보다 그 옆에 국화꽃을 놓았다. 꽃이 예쁘게 보이도록 잘 여민 나는 다시 묘비 앞에 서서 양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마음속에서 짙은 슬픔과 후회 같은 감정들이 밀려 올라온다.
도대체 누구 묘비일까?
이름을 봐서는 여성이다. 성명은 하나은. 아리따울 나, 은혜 은 자를 쓴 예쁜 이름이다. 1960년생이 2023년에 사망했으면 64세. 꽤 일찍 유명을 달리하신 분 같다.
내가 조사해야 할 사람들 중에 이런 이름을 가진 여성은 없었는데. 도대체 누구지?
잠시 후 눈을 뜬 나는 약간 떨리는 손으로 묘비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그리고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정성스럽게 닦는다. 내 손길에 반짝반짝 광이 나는 묘비.
하지만 그 깨끗한 묘비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나는 지금 울고 있다.
‘흑…… 흑흑…….’
도대체 넌 누구야? 왜 그렇게 슬피 울고 있는 거야?
나는 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서서히 울음을 그쳤다. 다시 한번 묘비를 쓰다듬은 나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다시 주차장 방향으로 내려가기 시작하는 나. 에이씨, 도대체 이게 뭐냐고!
아까 들어왔던 사잇길로 내려와 내리막길을 걷는 나. 그때, 저 아래에서 트럭 한 대가 올라오는 것이 보인다.
좁은 길이라 옆으로 비켜서는 나. 트럭이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트럭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이 보인다.
“저기, 괜찮으십니까?”
누군가의 목소리. 그것이 들리자마자 흑백의 세계가 깨지기 시작했다. 야구공을 맞은 유리창처럼 와장창 깨져 버리는 기억.
나는 벤치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나로 다시 돌아왔다. 옆에 있던 순경 목소리가 들려온다.
“혹시 어디 안 좋으시면…….”
나는 순경을 올려 보았다. 그러자 그가 흠칫 놀라며 물러난다. 내 표정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방해 때문에 기억을 읽는 작업에 실패해서 화가 난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무척 놀란 상태이다.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로 자신을 보니 물러나는 순경.
“죄, 죄송합니다.”
뭘 잘못했는지 모르고 일단 사과부터 하는 순경.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트럭이 스쳐 가며 유리창에 비쳤던 그 얼굴.
‘강혁 아저씨!’
나는 조금 전에 강혁 아저씨의 기억을 읽었다. 아저씨가 여기 왔었다. 아까 전화로 춘천에 있다고 했었는데 여길 온 것이구나. 아마 나는 아저씨가 주차장에 다다르기 전에 전화를 했을 것이다. 조금 전까지 울고 있다 전화를 받았으니 목소리가 그랬던 것이고.
나는 급히 일어나 5구역으로 달렸다. 내가 갑자기 뛰기 시작하자 순경이 얼떨결에 따라 뛴다.
“저, 저기!”
시끄러, 지금 일일이 설명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고.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아저씨가 간 사잇길로 뛰어들어 5구역에 진입한 나는 묘비 사이를 뛰어다니며 중얼거렸다.
“5-438, 5-438. 5-438…….”
조금 떨어진 곳에 5-400번이 보인다. 나는 몸을 틀어 400번에서 큰 숫자가 보이는 쪽으로 냅다 뛰었다. 그리고 결국 5-438 묘비를 발견했다.
“하아, 하아.”
뛰어와 숨이 찬 나는 허리를 숙이고 묘비를 노려보았다. 아저씨의 기억에서 보았던 그 사람. 하나은이란 사람의 묘비이다.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일까? 아저씨의 아내?
10년 전에 이혼한 아내가 있다고 했다. 지금은 해가 바뀌어 2026년. 이 사람은 3년 전에 죽었다.
만약 이 사람이 아저씨 아내라면 이혼 후 7년이 지난 시점에 사망했다는 건데. 아니 잠깐만. 나이가 좀 이상하다. 아저씨는 올해 59세다. 이 사람이 지금 살아 있다면 67세. 아저씨보다 여덟 살이나 많다. 그럼 아저씨 아내가 아닌가? 그럼 누구지? 친척인가?
아저씨는 강씨이니 하씨인 친척이 있으려면 외가 쪽 친척일 거다. 만약 아내라면 혹시 연상과 결혼했던 것일 수도 있다. 오랜만에 묘를 찾아 눈물지을 친척이 도대체 누구일까? 그리고 나는 왜 아저씨의 기억을 읽게 된 걸까?
나는 하나은 씨의 묘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누구십니까? 당신은.”
묘비에 대고 물었지만 죽은 이는 당연하게도 말이 없다.
왜 내가 아저씨의 기억을 읽은 걸까? 그리고 또 하나.
왜 나는 또 어지러움을 남기지 않는 기억을 읽게 된 걸까?
* * *
다음 날 아침 회의 중 관우가 손을 들며 말했다.
“사건 당일 한정수의 행적을 추적 결과, 공원묘지에서 나온 뒤 홍천 시내로 간 후에 동선이 좀 이상합니다.”
오진규가 펜을 놓으며 물었다.
“왜?”
관우가 일어나 앞으로 나서며 노트북을 조작하자, 홍천 인근 지도가 빔 프로젝터로 출력된다. 도로에 시간들이 표기되어 있는 지도이다. 관우가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한정수가 공원묘지에서 나온 건 오후 3시 25분. 이후 인제 방면 철정터널을 통과하는 영상이 찍혔습니다. 다시 홍천 시내로 들어가 철물점과 정육점이 있는 길을 지납니다. 그리고 다시 목격된 건 철정터널 홍천읍 방면입니다. 이후 홍천읍 만남의 광장을 통과해 홍천 군청 앞에서 CCTV에 찍혔습니다.”
지도를 가만히 보던 연주가 말했다.
“홍천 시내에서 중앙 고속도로 타려면 군청 앞 지나야 되잖아.”
관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선 자체는 문제가 없는데 시간이 문제야.”
“시간?”
“응.”
관우가 키보드를 누르자, CCTV에서 목격된 지점이 표기된 곳 옆에 시간이 표기된다. 나는 시간들을 보자마자 이상한 점을 느꼈다.
“3시 25분에 묘지에서 나온 사람이 서울로 돌아가는 길목에 있는 홍천 군청 앞을 밤 여덟 시에 지났다?”
관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약 6시간 35분 동안 홍천에 있었습니다.”
“뭘 했는지 아직 파악 중이고?”
“네, 국가 관리 CCTV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미리 예상 동선 지정한 뒤에 내려가서 사설 CCTV를 회수해야 될 것 같습니다.”
“사건 당일 동선이니 확실하게 파악해 줘.”
“예, 과장님.”
관우가 중요한 단서를 잡아냈다. 한정수는 사건 발생일에 무려 6시간 35분간의 알리바이가 없는 것이다. 관우는 능력 있는 녀석이니 어떡하든 추적해 낼 것이다.
나는 연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탐문 쪽은 진전 없어?”
연주가 수첩을 보며 말했다.
“이웃 사람들 말로는 두 사람이 자주 싸우긴 했다고 합니다. 가끔 고성도 오갔고,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폭행을 당한 것 같은 김주연 씨의 모습을 본 목격자도 있습니다.”
“음.”
“오늘 김주연 씨의 딸이자, 실종 신고를 한 오지연 학생을 인터뷰할 생각입니다.”
“어디서?”
“자택입니다.”
“한정수는?”
“매일 아침에 나간답니다. 밤이 늦어야 돌아온다고 하니 한정수가 없을 때 인터뷰할 수 있을 겁니다. 간 김에 집 수색도 좀 해보고.”
“같이 가자.”
“예, 과장님.”
나는 오진규 쪽을 바라보며 눈짓했다. 눈치 빠른 그가 먼저 입을 연다.
“일단 김주연 씨 주변 인물 중에 원한 관계가 있을 만한 사람부터 찾았습니다만,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재산 상황을 파악했는데 부모님께 물려받은 상가 한 채가 전부였고, 공원묘지에 안치되어 있는 이는 그녀의 친오빠 김상현 씨였습니다.”
그러니까, 부부가 김주연 씨의 친오빠 묘지에 갔다가 일을 당한 것이로구나.
“내연 관계 수사는 어떻게 되어갑니까?”
오진규가 볼펜을 똑딱거리며 말했다.
“한정수가 운영하던 전 회사의 직원을 수소문 중입니다. 아마 그쪽에서 뭔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알겠습니다, 계속 진행해 주세요. 회의는 여기까지. 모두 각자 일합시다.”
팀원들이 흩어지고 나는 연주와 함께 한정수가 사는 아파트로 왔다.
그의 집은 22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벨을 누르자,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난다.
“누구세요…….”
연주가 얼른 현관문 카메라 앞에 서며 말했다.
“안녕, 지연아. 아까 통화했던 경찰 언니야.”
“네…… 잠시만요.”
잠시 후 현관문이 열리고 입술이 말라 갈라진 여고생이 나온다. 많이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다.
“안녕하세요…….”
“어, 귀찮게 해서 미안해. 이쪽은 우리 과장님.”
지연이가 날 보며 고개를 꾸벅 숙인다. 상대가 여고생이다 보니 직접 인터뷰하기보다는 연주에게 맡기고 질문할 거리가 생겼을 때만 나설 작정이다.
아이를 따라 거실로 들어오니 보통의 집과 다를 바 없는 전경이 보인다. 엄마가 오래 집을 비운 전형적인 집. 치운다고 치웠지만 먼지까지 털지는 않아 약간 지저분해 보인다. 지연이가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앉으세요.”
우리에게 소파를 권한 지연이는 바닥에 앉는다. 연주가 아이와 함께 바닥에 앉는 것을 본 나는 일부러 약간 떨어져 소파에 앉아 집안을 살폈다.
한정수와 김주연이 여행 가서 찍은 사진들이 보이고, 큰 그림 한 폭도 걸려 있는 보통의 거실이다.
연주가 아이를 보며 말했다.
“많이 힘들지? 이런 때 미안해. 이해해 줄래? 엄마 그렇게 만든 범인 꼭 잡아야지.”
지연이가 마른세수를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네…….”
“녹음 괜찮지?”
“네…….”
연주가 녹음기를 세팅 후에 질문을 한다.
“이웃 주민들 말로는 엄마, 아빠가 자주 싸우셨다고 하는데. 맞니?”
“음…… 그런 것 같아요.”
“그런 것 같아? 같이 사는데 몰라?”
“제 앞에서는 싸운 적 없어요. 학원 끝나고 집에 왔을 때 분위기 냉랭하면 또 싸웠구나 했죠.”
“엄마가 맞은 적도 있다고 하던데.”
“…….”
“괜찮아, 지연아. 경찰에서도 꼭 알고 있어야 할 정보라 그래.”
“……두 번 정도 그랬어요.”
“싸우다가 그랬어?”
“잘 모르겠어요. 학원 다녀와서 보니까 엄마 얼굴에 멍이 있었는데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운동하다가 다쳤다고 괜찮다고 했어요. 맞은 게 아닌가 의심이 가서 계속 물어봤는데 절대 아니라고 하셨고.”
음, 그래도 아이 앞에서까지 몹쓸 걸 보여주는 사람은 아니었구나. 연주가 잠시 고민하다 어렵게 말문을 연다.
“저기 지연아. 오해하지 말고. 혹시나 해서 묻는 거야.”
“네?”
“음…… 지금 아빠가…… 지연이 친아빠가 아니잖아?”
“…….”
“이런 질문 불편하니?”
“아뇨…… 괜찮아요. 계속하세요.”
“응…… 정말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아빠가 혹시 널 때리기도 했니?”
“아뇨.”
후, 다행이다. 애는 괜찮구나. 지연이가 말을 잇는다.
“살갑게 구는 분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한테 막 대하진 않았어요. 진짜 아빠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뭐 얼굴 맞대고 살기 불편하지 않은 정도.”
“그랬구나, 정말 다행이다.”
연주는 진심으로 안도한 표정을 지으며 다음 질문을 한다.
“최근 부모님 사이가 나빠진 일은 없었어?”
지연이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있어요.”
“무슨 일인데?”
“삼촌 묘지 이장하는 일 때문에 크게 싸웠어요.”
“삼촌 묘지를 이장해?”
“네, 원래 추모공원에 있는 건데, 엄마가 터가 안 좋다고 땅을 사서 이장하자고 했어요. 아빠는 반대했고.”
“그래? 왜 반대하셨을까?”
“그건 저도 모르는데 그것 때문에 며칠간 얼굴만 보면 싸웠어요.”
“언제부터?”
“그러니까…… 엄마 일 생기기 한 달 전쯤부터. 같이 밥도 안 먹었어요. 싸우느라.”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나는 소파에 앉아 지연이의 말을 들으며 얼굴을 굳혔다. 한 달 전부터 싸우느라 같이 밥도 안 먹었다고? 나는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내가 갑자기 움직이자 놀란 얼굴로 날 바라보는 지연이. 나는 냉장고 문을 붙잡고 지연이를 바라보았다.
“잠깐 봐도 될까?”
“네? 네…….”
냉장고 문을 열고 고기 비슷한 것들을 찾았다. 냉장실에는 없고, 냉동고에서 고기를 찾아낸 나는 비닐로 쌓인 포장지를 뜯었다.
“돼지고기?”
나는 얼어 있는 돼지고기를 들고 지연이를 보았다.
“최근에 한우 먹은 적 있어?”
“네?”
“아빠가 집에 한우 안 사왔어?”
지연이는 영문 모를 표정을 짓다 고개를 젓는다.
“아뇨…… 엄마가 소기름 싫어해요. 그거 먹으면 설사한다고 우리 집은 소고기 안 먹는데요.”
뭐야? 그럼 한정수가 고기 사갈 때 말했던 한우 좋아하는 아내는 도대체 누구야? 나는 지연이 말을 듣자마자 오진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님 예상이 맞는 것 같습니다.”
한정수가 외도를 저지르고 있었던 것 같다는 말을 하려던 나는 순간적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지연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직 고등학생밖에 되지 않은 아이 앞에서 할 말이 아니다.
“수사에 좀 더 속도를 내주세요, 그쪽에 답이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