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인의 기억-223화 (222/328)

살인의 기억 223화

17. 증거(證據)(7)

한정수는 집에 한우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 아내의 사고 때문에 못 가져온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집에 가져올 생각으로 구입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정육점 주인에게 아내가 한우를 좋아한다고 했던 말은 무엇일까?

‘외도의 대상이 있었다. 한우를 좋아하는 건 그녀이겠지.’

나는 냉동실을 가만히 바라보다 지연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가 평소에 소고기를 아예 안 드셨니?”

지연이는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의문스러운 얼굴로 답한다.

“네, 엄마가 소고기 먹는 거 평생 두 번인가 본 거 같아요. 그때마다 설사를 하고 밤새 배 아파서 잠도 못 자고 그랬어요.”

“아빠도 알아?”

지연이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네, 알죠.”

같은 집에 사는 사람인데 모르는 쪽이 이상하다. 나는 냉장고를 닫으며 물었다.

“엄마가 묘지에 간 날. 아빠가 집에 몇 시쯤 돌아왔어?”

“어…… 저 학원 끝나고 오니까 이미 계셨어요.”

“집에 몇 시에 왔니?”

“열두 시 좀 넘어서요.”

“학원이 그때 끝나?”

“네, 학원 버스가 데려다줘요.”

한정수는 홍천 군청 앞을 밤 열 시경에 지났다. 홍천에서 서울까지 두 시간 만에 주파했다는 것이다.

핸드폰 내비게이션으로 확인해 보니 이 집에서 홍천 군청까지는 102㎞. 밤 시간임을 감안했을 때 한 시간 반이면 올 수 있는 거리이다.

나는 연주에게 눈짓하며 말했다.

“경비실 가서 사건 당일 아파트 CCTV 확보해.”

“네, 과장님.”

“돌아간다.”

한정수. 색안경을 쓰지 않고 보려 노력해도 너무나 수상한 인간이다.

* * *

사무실로 돌아가는 차 안.

조수석에 앉은 연주가 수첩으로 사건들을 정리하며 물었다.

“한정수가 구입했다는 기름통은 어디 있을까요?”

“글쎄.”

어디에 쓴 걸까? 그건 왜 산 걸까? 나는 운전을 하며 생각에 잠겼다. 기름통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살해의 도구로 부적합하다. 하지만 그것은 2차 범행, 즉 시신의 은닉을 위해 사용되기에는 적합한 물건이다.

‘시신을 태웠다.’

만약 그렇다면? 시신이 불에 타 재만 남았고, 겨울바람에 날려갔다면? 어쩌면 사망 추정자 김주연 씨는 영원히 실종 상태로 남을지도 모른다. 머리가 복잡해진다.

사무실에 다다르고 연주가 안전벨트를 푸는 그 순간. 관우에게 전화가 온다.

“어, 관우야.”

-과장님, 사건 당일 한정수 차량의 동선을 역추적하고 있는데, 이 사람이 오래 머무른 곳이 있습니다.

“오래 머물러? 어디를?”

-CCTV에서 봤던 철물점을 지나 300미터쯤 가다 좌측으로 꺾었습니다. 거기는 그냥 논두렁이 있는 곳인데 거기 들어갔다가 세 시간 후에 철정터널을 통과해 돌아가는 모습이 찍혔습니다. 해당 지역에는 국가 관리 CCTV가 없고요.

논두렁? 타겟이 좁혀졌다.

“알았다. 수색대 연락해서 위치 알려주고, 거기 집중 수색하라고 지시해.”

-예, 알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고 연주에게 말했다.

“사무실 들어가. 난 다시 현장 내려가 볼게.”

“이 시간에 가시게요? 지금 내려가시면 밤인데. 그냥 내일 가시지.”

“아냐, 가만있는 쪽이 더 힘들어. 내려.”

“쯧, 알겠습니다.”

“탐문한 거 정리 끝나면 퇴근하고.”

“에이, 과장님이 현장 도시는데 제가 어떻게 퇴근해요. 어차피 관우도 밤새울 것 같던데 같이 있죠, 뭐.”

“안 그래도 돼.”

“알아서 하겠습니다, 다녀오세요. 안전운전!”

나는 연주를 내려주고 곧장 홍천으로 향했다.

한 시간이 조금 넘게 걸려 내려가 홍천 시내를 가로질러 철물점과 정육점을 지난 나는 관우가 말한 논두렁이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속도를 줄였다.

여기서 좌측으로 꺾으면…… 관우 말대로 논밭밖에 보이지 않는 평야 지대이다. 가끔 가뭄에 콩 나듯 민가가 보이는 아주 조용한 곳이다.

나는 핸들을 좌측으로 돌리다 문득 우편에 주유소가 있는 것을 보았다. 연료 게이지를 보니 지금은 괜찮지만 서울로 다시 올라갈 기름은 안 되는 것 같다. 리터당 얼마지?

나는 창문을 열고 리터 표기 가격을 확인 후 적당한 가격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주유소로 들어갔다. 셀프 주유소였기에 차에서 내려 기름을 넣으며 주유소를 살피던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차에 기름이 없으면 채운다. 한정수가 구입한 기름통은 비어 있었다.’

당연하다. 철물점에서 휘발유를 취급하지는 않으니까. 기름통에 무엇을 채웠는지 알 수 없지만 굳이 다른 용기를 두고 기름통을 구매했다면 그 안에 휘발성 물질을 담았을 확률이 높다.

나는 빠르게 올라가는 리터 게이지를 바라보다 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관우야.”

-예, 과장님.

“홍천 시내, 아니, 정육점 지나서 네가 말한 논두렁 진입로 사이에 주유소가 몇 개야?”

-잠시만요.

키보드 두들기는 소리가 나고 금세 관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납니다. 홍익 주유소라는 곳이고.

나는 전화기를 붙잡고 주유소 간판을 보았다. 관우가 말한 바로 그 주유소이다.

“알았다, 고마워.”

기름을 모두 채우고 차를 움직여 한편에 세우자, 사무실에 있던 직원이 나오며 손짓한다.

“손님? 거기 주차하시면 안 됩니다.”

나는 차에서 내리며 신분증을 꺼냈다. 약간 놀란 얼굴의 직원이 뒷걸음질을 친다.

“어? 무슨 일로…….”

나는 핸드폰을 꺼내 한정수의 사진과 차량을 보여주며 물었다.

“1월 7일에 왔던 손님입니다,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1월 7일이면…… 꽤 오래전인데. 기억 못 하죠. 하루에 오는 손님이 몇인데.”

당연한 말이다. 검정색 승용차가 얼마나 많은데 그걸 다 기억하겠는가? 나는 핸드폰을 품에 넣으며 말했다.

“CCTV 있죠?”

“예, 있긴 한데.”

“1월 7일 영상 좀 봅시다.”

“잠깐만…… 사장님 요 앞에 나가셨는데 금방 오실 겁니다. 제가 아르바이트생이라 CCTV 있는 사무실에 못 들어가요.”

“얼마나 걸릴까요?”

“편의점 가셨으니 금방 오세요. 잠깐 들어오세요.”

나는 아르바이트생의 안내를 받아 주유소 사무실로 들어갔다. 생각해 보니 살면서 주유소 사무실에 들어가 본 일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딱 한 번 여주 주유소 강도 사건 때 와보고 이번이 두 번째이다.

나는 커피 한잔을 내어주고 PC 앞에 앉아 전표 정리 중인 직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숫자가 가득한 화면을 보며 영수증을 맞춰보고 있는 직원. 나는 커피를 들고 직원 옆에 서며 물었다.

“이게 뭡니까?”

직원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예, 이거 실제 주유된 양과 매출전표 기록된 문서인데요.”

그런 게 있어? 나는 몸을 내밀며 물었다.

“차량 넘버는 안 나옵니까?”

“그런 건 안 나와요. 대신 신용카드 번호는 알아볼 수 있는데.”

나는 얼른 말했다.

“1월 7일 기록 좀 봅시다.”

직원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에이, 이거 봐도 모르세요. 사람 이름 찍히는 게 아니라 신용카드 번호로 찍히니까. 혹시 번호 알고 계세요?”

“아뇨.”

“음, 그럼 봐도 모르실 텐데. 일단 뽑아볼까요?”

“예.”

“보기 좋게 엑셀로 뽑아드릴까요?”

“그럼 좋고요.”

“잠시만요.”

직원이 엑셀로 자료를 옮긴 후 프린트를 시작한다. 시골 주유소였기에 손님이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하루 치 매출 전표가 무려 여섯 페이지나 나온다.

한 페이지에 50줄이 있으니 300명가량의 손님이 다녀간 모양이다. 이러니 사람을 기억 못 하지. 사장이 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주유소의 매출 전표. 직원의 말처럼 주유된 시간이 맨 앞에 기록되어 있고, 다음 줄에 신용카드 승인이 떨어진 시간이 나오며, 실제 얼마의 기름을 넣었는지 리터와 가격으로 표기되어 있다. 신용카드 번호는 중간 네 자리가 지워진 기록이다.

직원이 날 보며 말했다.

“그걸로 사람 찾아내긴 어려울 겁니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300명분의 매출 기록을 천천히 확인했다. 3만 원, 5만 원, 7만 원. 가끔 가득 채운 사람이 있는지 10만 원도 찍혀 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이걸로는 한정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그때 방울 소리가 들리며 사무실 문이 열린다.

“어, 춥다.”

직원 말처럼 편의점에 다녀왔는지 먹을 것이 든 봉투를 손목에 건 중년 남자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들어온다. 그는 날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직원에게 눈짓한다.

“누구?”

직원이 사장에게 귓속말을 하자, 사장이 날 보며 물었다.

“경찰에서 나오셨다고.”

나는 다시 신분증과 핸드폰 사진을 내밀었다.

“예, 이 사람을 기억하시는지 확인하려고 왔습니다. 기억 안 나시면 CCTV 좀 볼 수 있을까요?”

사장은 핸드폰 사진을 한참 보다 입술을 쭉 내밀며 돌려준다.

“기억 안 나네요. CCTV 보죠. 며칠 날짜로 보면 돼요?”

“1월 7일입니다.”

“1월 7일이라…… 어디 보자…….”

사장은 사무실 한쪽에 있는 방문에 비밀번호를 누른 후 들어간다. 아주 작은 방에 컴퓨터 한 대만 덜렁 놓여 있는 곳. 사장은 의자에 앉아 1월 7일분의 영상을 찾은 후 말했다.

“몇 시쯤일까요?”

“저녁 여섯 시부터 열 시 사이 영상으로 부탁합니다.”

“여섯 시부터…… 열 시. 여기 있습니다.”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가 들고 있는 매출 전표를 힐끔 본다.

“그것도 직원에게 요청하신 거예요?”

괜히 나 때문에 직원이 혼나겠다 싶다.

“아, 예. 안 된다고 하셨는데 제가 꼭 확인해야 된다고 요청한 겁니다.”

사장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건 신용카드 기록만 있는 건데.”

그건 나도 안다. 컴퓨터 의자에 앉으며 잠시만 확인하고 가겠다고 말하려는 그 순간. 나는 사장의 말을 듣고 내가 놓쳤던 부분이 있었음을 알았다.

‘현금으로 결제했다면?’

나는 의자에 앉아 사장을 보았다.

“사장님.”

“예?”

“요만한 기름통 아시죠?”

“한 말 들어가는 통이요?”

“예, 거기 기름 꽉 채우면 얼마나 들어갑니까?”

“그거…… 한 20리터 들어가죠.”

“그럼 가격이 얼마입니까?”

“한 삼만 원?”

“혹시 기름통에 직접 기름 받아가는 사람이 많습니까?”

“에? 가정용 보일러가 가스보일러로 바뀐 후에는 거의 없죠.”

“1월 7일에 검은 승용차를 탄 사람이 기름통을 가져와서 기름을 샀을 겁니다. 혹시 기억하십니까?”

사장이 잠시 기억을 더듬다 눈을 번쩍 뜬다.

“아! 그런 사람 있었죠!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하시지. 얼굴과 차는 보여줘도 기억 못 하죠.”

“휘발유를 얼마나 구입했습니까?”

“어…… 그 사람 등유 사갔어요.”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등유를 샀다? 왜? 한정수의 집에는 등유가 필요한 가전제품이 없었다. 그런 사람이 왜 등유를 샀을까? 나는 점점 그가 증거를 태웠다는 확신을 가졌다.

사장은 대략적인 시간이 기억나는지 내 옆으로 와 마우스로 시간을 돌려준다.

“그때가…… 직원이 밥 먹으러 가고 저 혼자 있었을 때니까 여기네. 저녁 7시 40분. 여기부터 보세요.”

사장이 물러나자, 화면 속에 주유소로 들어오는 검은 승용차가 보인다. 화질이 별로지만 차량 안이 대충 확인되는 화질이다.

차 속에는 한 명만 있다. 주유하는 곳이 아닌 사무실 앞에 차를 댄 한정수가 뒷좌석에서 기름통을 꺼내 사무실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이후 사장과 다시 나와 일반적인 주유 기기가 아닌, 따로 떨어진 기기에서 등유를 받아 현금을 건네는 모습도 보인다.

다시 뒷좌석에 가득 채운 기름통을 실은 한정수가 차를 출발시켜 주유소를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차가 사라진 화면을 가만히 노려보다 턱을 쓸었다.

“기름 냄새가 나는 통을 트렁크가 아닌 뒷좌석에 실었다?”

새 통을 사왔을 때는 그렇다 치고, 기름을 채운 통을 뒷좌석에 싣는 것이 일반적인가? 왜 그랬을까? 나는 가만히 화면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트렁크에 다른 게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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