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인의 기억-224화 (223/328)

살인의 기억 224화

17. 증거(證據)(8)

주유소 사장에게 CCTV 영상을 받아 그 자리에서 관우에게 메일로 파일을 첨부해 보낸 후 나온 나는 다시 차를 몰고 논두렁으로 향했다.

관우가 지시를 해 이동했는지 의경 버스에서 경찰 인력들이 뛰어내리고 있는 현장. 야밤에 고생들이 많다.

나는 어깨에 초록색 견장을 차고 있는 의경을 붙잡았다.

“중대장님 어디 계셔?”

의경이 내게 뒤로 물러나라 손짓하며 말했다.

“현장 통제 중입니다, 민간인 출입금지이니 물러나 주세요.”

내가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자 눈이 왕방울만 해진 의경이 큰 소리로 경례를 한다.

“충!! 성!!”

신분증에 찍힌 계급. 의경이면 자기 중대장이 하늘 같을 텐데 그가 고작 경감이다. 총경 계급을 마주하는 건 난생처음인 듯 잔뜩 긴장한 의경이 침을 꿀꺽 삼킨다.

“죄, 죄송합니다!”

“아냐, 너 수 하나야?”

“예!”

의경에서 수 하나는 중대 수경(병장) 중 통신 및 지휘를 맡는 베테랑 군인이다. 같은 동기 중에서도 제일 똘똘하고 일 잘하는 사람이 맡는 직책인 것이다.

나는 버스에서 뛰어내리다 큰 경례 소리에 놀라 이쪽을 주목하고 있는 의경들을 보며 물었다.

“몇 개 중대 왔어?”

“저는 잘…… 무전상으로 파악하기에는 다섯 개 중대로 알고 있습니다만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섯 개 중대. 무려 600명에 달하는 인원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나는 수 하나의 옆구리에 있는 무전기를 눈짓하며 말했다.

“중대장님들께 내가 좀 보자고 한다고 전해줘.”

“예! 알겠습니다.”

수 하나가 무전기를 들었다가 머뭇거린다.

“저기…….”

“왜?”

“어디서 나오신 분이라고 해야…….”

음, 감히 중대장들 모이라고 하는 건데 총경이라고만 하면 좀 그렇긴 하지. 나는 현장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국가수사본부 중대범죄 수사과장, 현도경이다.”

“헙! 아, 알겠습니다!”

수 하나가 무전기를 들고 뛴다. 혹시 내게 무전 내용이 들릴까 싶어 그런 모양이다.

오 분 정도 기다리자 검은색 기동복을 입은 중대장들이 헐레벌떡 뛰어오는 것이 보인다. 다들 나보다 연세도 많으신 분들인데 저렇게 뛰게 만드니 마음이 별로 좋지 않다.

중대장 다섯 명이 내 앞에 일렬로 도열해 경례를 하자, 주변 의경들이 얼어붙는 것이 보인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인사는 됐습니다. 수색 관련해서 부탁드릴 게 있어서 불렀습니다. 오라 가라 해서 죄송합니다, 선배님들.”

중대장들은 국가수사본부의 이름에 놀라 뛰어왔는데 생각보다 젊은 사람이 자신들에게 선배님이라고 부르자, 약간 당황하며 서로를 바라본다. 제일 나이가 많아 보이는 중대장이 대표로 물었다.

“그냥…… 지시하시면 됩니다, 송구스럽게 부탁이라고 하시면…….”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지시라고 하죠, 그럼.”

“예, 어떤 지시입니까?”

나는 늦은 밤이라 조명들이 설치되고 있는 현장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용의자로 추정하는 사람이 사건 날에 등유 20리터를 구매한 정황이 포착됐습니다.”

중대장들이 서로를 바라보다 눈썹을 꿈틀거린다.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한 것이다.

“증거를 태웠을 수도 있고…… 시신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능성을 열어둬야 됩니다. 중대 의경들에게 수색 중에 불에 그을리거나 탄 자국을 발견하면 절대 손대지 말고 보고부터 하라고 지시해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부탁합니다.”

중대장들이 경례를 하고 각자의 중대로 흩어진다. 나는 자기 대원들을 모아 지시를 하고 있는 중대장들을 바라보다 품에서 진동이 울리는 것을 느끼고 핸드폰을 꺼냈다. 오진규에게서 온 전화이다. 기다렸던 소식을 전해주려는 걸까? 나는 얼른 전화를 받았다.

“선배님.”

-과장님, 찾았습니다.

“내연 관계에 있는 여성이 있었습니까?”

-네, 룸살롱에서 일하던 직업 여성으로 나이 34세, 이름 성현주입니다. 현재는 무직이고.

몇 번이나 든 생각이지만 오진규의 수완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어떻게 찾으신 겁니까?”

-하하, 한정수가 운영하던 회사에 다니던 사람들 중에 권고사직 당한 사람들 위주로 찾아다녔죠. 아무래도 악감정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말해줄 가능성이 높으니까.

옳은 말이다. 한정수와 좋은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알고도 입을 닫을 수 있는 문제이다. 오진규가 말했다.

-한정수와 성현주가 사귄 건 2년 전부터. 업체 로비를 위해 다니던 룸살롱에서 단골로 찾던 아가씨였다고 합니다.

“현재 무직이라면 한정수가 생활을 책임져 주고 있을 가능성이 있겠군요.”

-그렇죠.

“언제 만나러 가십니까?”

-이미 만나고 나오는 길입니다.

엄청 빠르게 진행했구나. 파악하자마자 바로 만나고 오다니. 그런데 성현주가 순순히 협력했을까?

“뭐랍니까? 쉽게 입을 열진 않을 것 같은데.”

공범이라면 당연한 것이고, 설사 관계가 없다고 해도 상대가 자신의 경제 사정을 후원하는 사람이다. 쉽게 협력할 상황이 아닌 것이다.

웃음기 있는 오진규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런 사람 한두 번 상대하는 것도 아니고. 상대가 살인 용의자라는 것과 공범 가능성에 대해 열어두고 있다고 협박하니, 겁을 먹고 순순히 말하더군요.

오, 협박을 했구나.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수사에 도움이 된다면 해야지.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혹시 그 집 냉장고 보셨습니까?”

오진규는 연주에게 내가 지연이의 집에서 한 행동을 미리 전해 들었는지 바로 말했다.

-예, 그것부터 확인했습니다. 먹다 남은 소고기가 냉동실에 있었습니다.

역시 한정수가 산 고기는 성현주에게 갔구나. 오진규가 말을 잇는다.

-성현주는 한정수의 범행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눈치였습니다. 그가 재혼을 해 가정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딱히 결혼을 할 생각도 아니라 이런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편했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는 건 상대를 제거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 되겠죠.

그건 그녀의 말이다. 그녀의 말만으로 용의선상에서 배제할 순 없다. 하지만 지금 이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오진규다. 경험 많은 형사이니 다각도로 고민해 본 뒤 결론을 말하는 것이리라.

-확인해 보니 성현주도 이혼 경력이 있었습니다. 경찰 기록에도 남아 있는데 당시 전 남편에게 심각한 폭행을 당했던 것 같습니다.

“폭행이요?”

-예, 룸살롱을 관리하던 조폭 새끼와 결혼을 한 것 같은데 수시로 맞았답니다. 3년을 버티다 결국 이혼을 했는데 그 후로도 전남편이 자꾸 찾아왔답니다. 정부 접근 금지 명령을 3회 어기고 또 폭행을 해서 현재 전남편은 감옥에 있고요.

음, 결혼을 했는데 남편에게 가정폭력을 당했다. 그런 사람이라면 다시는 결혼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 만하다. 오진규는 바로 이런 점을 들어 성현주의 말을 믿은 모양이다.

오진규가 서류 넘기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성현주의 핸드폰 이용 내역을 확인해 보니, 한정수 측에서 전화를 걸기 전에는 먼저 연락을 한 적이 없습니다. 흔한 문자 한 번 남긴 기록이 없네요. 이걸로 봐서 성현주는 한정수를 스폰서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됩니다.

“음, 알겠습니다. 뭔가 단서가 될 만한 진술은 없었나요?”

-사건 당일, 그러니까 1월 7일 밤 9시가 좀 넘은 시간에 한정수가 찾아왔답니다.

눈이 번쩍 뜨인다. 사건 당일에 성현주의 집에 갔다고? 그러니까 홍천 군청 앞을 지나 서울로 올라가다 그녀의 집에 들른 것이구나.

“뭘 했다고 합니까?”

-그냥 잠깐 얼굴 보러 왔다고 커피 한 잔 마시고 갔다는데. 특별한 말은 안 했고, 약간 초조한 기색만 보였답니다.

“그게 전부입니까?”

오진규가 잠시 뜸을 들인 후 말했다.

-그리고 또 하나…… 한정수의 몸에서 탄 냄새가 났답니다.

“…….”

탄 냄새. 이제 확실해졌다. 한정수는 주유소에서 산 등유를 철물점에서 산 기름통에 채워 무언가를 태웠다. 그것이 증거물이든, 시신이든 그가 이러한 행동을 했다는 확신이 생겼다.

“알겠습니다. 성현주 쪽에 형사 몇 붙여서 감시하게 해주세요. 한정수 지금 어디 있습니까?”

-24시간 밀착 감시 중인데 지금 집에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혹시 특이 사항 있으면 바로 알려주세요.”

-예, 과장님. 그런데 어디십…….

바로 그때 호루라기 소리가 나며,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들린다.

삑!! 삑!! 삐익!!!

“거기 밟지 마, 이 새끼야!”

“나와! 나오라고!”

“아무것도 만지지 마!! 전부 동작 그만!”

뭔가 나왔다. 나는 오진규에게 나중에 전화하겠다고 말하고 끊은 후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뛰었다.

의경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는 곳. 이곳은 한 농가의 논두렁 끄트머리다. 겨우내 얼어붙은 논두렁 위로 갈색으로 변한 죽은 풀들이 삐죽삐죽 솟아 있는 곳이다.

내가 다가가자, 의경들이 갈라져 비켜선다.

“뭐가 나온 겁니까?”

의경들이 홍해처럼 갈라지자, 논두렁 끄트머리에서 아래를 향해 플래시를 비추고 있는 중대장들이 보인다.

“과장님! 여기입니다!”

손을 흔드는 중대장을 보고 내리막길을 내려간 나는 플래시를 받아 들고 얼음을 비췄다.

“탄 자국?”

얼음 위에 그을림이 남아 있다. 한겨울 논두렁의 얼음 위에 왜 그을음이 남았을까? 이건 자연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다. 나는 플래시를 돌려주며 말했다.

“즉시 폴리스라인 두르고, KCSI에 출동 요청해 주세요. 중대는 이 근방 2㎞ 내에 또 그을림이 남은 곳이 없는지 수색합니다.”

“예!”

드디어 꼬리를 잡았다. 검은 재. 그리고 그 사이에 남은 검은 덩어리들. 너무 멀어 보이지 않지만 저것이 단서일 것이다. 아니, 꼭 그래야만 한다.

* * *

한 시간 후, 논두렁.

출동한 KCSI 대원들이 사진을 찍어가며 논두렁으로 진입하고 있다.

소식을 들은 목 과장님이 직접 출동한 현장. 장비를 갖춘 과장님이 조심스럽게 얼음을 밟고 진입 중이다.

핀셋으로 덩어리들을 주워 증거 봉투에 넣고, 붓으로 조심스럽게 긁어 재 하나도 허투루 다루지 않는 대원들.

나는 팔짱을 끼고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정수는 이곳에서 뭘 태웠을까? 범행에 쓰였던 물건들? 흉기일 수도 있다. 또 전례를 보았을 때 범행에 쓰인 장갑이나 옷가지를 태웠을 수도 있다.

잿더미 속에서 한정수를 특정할 뭔가가 나온다면. 한정수는 이제부터 유력한 용의자가 된다.

그때 목 과장님이 주먹을 번쩍 들어 올린다. 주변에서 움직이던 KCSI 대원들이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추고 정적이 흐른다.

목 과장님이 플래시를 얼음에 비추고 한참을 바라보더니, 허리를 펴고 말했다.

“기계 가져와, 얼음 깨야 된다.”

응? 얼음을 깨? 대원들이 움직이는 걸 보고 있던 내가 약간 큰 소리로 물었다.

“과장님! 거기 뭐 있습니까?”

목 과장님이 보호안경을 위로 들어 올리며 날 바라본다. 한참 날 바라보던 목 과장님이 천천히 자기 왼 허벅지를 툭툭 치는 게 보인다. 저게 무슨 소리지?

“예? 뭐라고요?”

목 과장님이 내 주변을 바라본다. 수많은 의경들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목 과장님은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꺼내 뭔가를 한다. 그러자 내 핸드폰이 울리는 것이 느껴진다. 목 과장님에게서 온 문자다. 뭐길래 이 거리에서 문자를 보내시는 걸까?

나는 주변에 훔쳐보는 이가 없는지 확인 후 핸드폰을 확인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얼음 아래 대퇴부 뼈로 추정되는 조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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