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228화
17. 증거(證據)(12)
장비를 부엌 앞에 갖다 놓고 세팅 중이던 KCSI 대원이 도경이 전화로 하는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한숨을 쉬고 한참 부엌을 노려보다 의경들에게 지시를 내리러 떠나는 도경의 뒷모습을 본 대원 한 명이 옆에 있던 선배에게 물었다.
“선배님.”
“빨리 장비 챙겨, 인마. 왜?”
“저 형사님 말인데.”
“누구?”
“방금 옆에서 전화하시던.”
“어, 왜?”
“높은 분입니까?”
“헐, 너 몰라? KCSI에서 저분 모르는 사람도 있었냐?”
“유명한 사람인가요?”
“미친, 경찰청 사상 최연소 총경! 국가수사본부 중대범죄 수사과 과장님.”
“헐…….”
“KCSI에서 저분 모르면 간첩이야. 목 과장님이 해결 못 한 사건까지 해결하는 사람이라고.”
“모, 목 과장님이 해결 못 하는 사건도 있어요?”
“목 과장님 슈퍼맨이냐? 당연히 못 하는 사건도 있지.”
“저분은 해결하신다고…….”
“저분은 슈퍼맨이니까.”
“하하…….”
“근데 왜?”
후배 대원이 도경의 뒷모습을 다시 한번 돌아보며 말했다.
“아니, 우리 방금 출동했는데. 현장에는 그을음밖에 안 보이고.”
“그런데?”
“방금 전화로 시신이 나왔다고 전달하시길래. 아직 아무것도 안 나왔습니다만.”
선배 대원이 부엌을 슬쩍 본 뒤 다시 장비를 챙긴다.
“야, 서울 목 과장님이 출동 지시할 때 뭐라고 하셨는지 아냐?”
“에이, 저같이 말단 대원이 목 과장님 지시를 직접 들을 수가 없죠.”
선배 대원이 장비를 어깨에 짊어지고 일어나며 도경을 돌아본다.
“범인 잡고 싶으면 현도경 과장이 시키는 대로만 해라. 이렇게 지시하셨다.”
“헐…… 그 정도예요?”
“루미놀이나 챙겨, 인마.”
후배 대원이 할 수 없다는 듯 분무기와 약품들을 챙긴다.
그사이 진입로를 확보하고 사진을 남겨둔 다른 대원들이 물러나고, 두 사람이 들어간다. 선배 대원이 아궁이를 보며 중얼거린다.
“아궁이 주변에서 시신이 나올 거라고 하셨지? 야, 여기다 약품 뿌려.”
“여기요?”
“어.”
후배 대원이 약품을 뿌리고 다니자, 선배 대원이 카메라를 들고 있던 대원들에게 말했다.
“입구에 암막 설치해.”
“예.”
순식간에 빛이 가려지고, 분무기를 들고 있던 후배 대원의 눈이 동그래진다.
“지, 진짜 나왔다.”
어둡고 을씨년스러운 폐가의 부엌. 두 개의 아궁이 주변에서 시약 반응이 나며 푸른빛을 내뿜고 있다.
선배 대원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혈액 반응 발견! 빨리 샘플 채취하고, 탄화물 부서지지 않게 조심해서 진행해! 여기서 발견 못 하면 우리 전부 목 과장님께 뒤지는 거다!”
KCSI 대원들이 바쁘게 장비를 챙기러 이동한다. 뭐에 홀린 사람처럼 분무기를 들고 우두커니 서 있던 후배 대원이 중얼거린다.
“아니, 우리도 시약 뿌려야 아는 걸 저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선배 대원이 그의 어깨를 밀며 외친다.
“나중에 중얼거리고 지금은 움직여, 인마!”
“아! 예!”
* * *
다섯 시간 뒤 서울 KCSI 본사.
회의실에 앉은 목 과장님이 날 바라보며 놀랍다는 표정을 짓는다.
“어떻게 찾았어?”
비상 소집으로 달려온 나머지 팀원들도 궁금한지 내 얼굴을 바라본다. 이런 일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젠 당황하지 않는다.
나는 미리 생각해 둔 답을 내어놓았다.
“관우야.”
답을 기다리던 관우가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란다.
“예?”
“CCTV 분석할 때 한정수의 이동이 어땠지?”
“예? 무슨 말씀인지.”
“너무 자연스럽지 않았어?”
관우는 잠시 생각해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예, 시내가 아주 익숙해 보였습니다. 헤매는 일도 없고 자기가 목표했던 곳에 한 번에 갔습니다. 대표적으로 은행 주차장에서 철물점에 갈 때 그랬습니다. 사실 철물점이란 것이 자주 가는 곳이 아니라 동네에 있는 철물점도 좀 헤매면서 가는 것이 보통인데. 한정수는 안 그랬어요. 주차장 나와서 사거리인데 정확히 철물점이 있는 쪽으로 갔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또한 주차장으로 돌아와 차를 타고 정육점으로 향하는 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중간에 육 거리가 나오는데 거기서도 한 번에 정육점 방향으로 갔습니다.”
연주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내비게이션이 있을 수도 있지 않나요?”
나는 다시 관우를 보았다. 그러자 녀석이 고개를 저었다.
“한정수의 통화기록 분석할 때 혹시 핸드폰에 증거가 남겨졌을까 해서 홍천 경찰들이 폰을 일시 압수해서 분석한 적이 있는데 내비게이션은 어플도 안 깔려 있었어. 그의 승용차 내비게이션에도 철물점이나 정육점 주소는 없었고.”
나는 다시 팀원들을 보며 말했다.
“이와 같은 정황을 보았을 때 유추할 수 있는 건 한정수가 홍천 시내를 매우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연주야?”
연주가 손을 든다.
“네, 과장님.”
“한정수 주변 인물이나, 친척, 지인 중에 홍천에 사는 사람이 있었니?”
“아뇨, 없었습니다.”
“그렇지, 한정수가 홍천을 잘 알고 있을 까닭이 없었어.”
오진규가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가 중얼거린다.
“홍천 시내를 잘 알고 있을 이유가 없는 인간이 동네를 잘 안다. 그건 최근에 이곳에 자주 왔었다는 건데.”
오진규는 뭔가 생각난 듯이 날 바라본다.
“혹시 최근에 사업을 접은 것과 관계있는 겁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오진규가 턱을 괴고 말했다.
“사업을 접은 50대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이 홍천에 있다. 가게를 하는데 굳이 서울 사는 인간이 홍천에 갔을 리는 없고. 주유소를 하려는 게 아니라면 말이지. 하지만 주유소 하려는 인간이 굳이 시내 지리를 잘 알 필요도 없어. 그렇다는 건…… 숙박업소라는 건데.”
역시 오진규다. 이것만 듣고 여기까지 유추해 낼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렇습니다. 한정수는 펜션 사업을 하기 위해 홍천을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연주가 이제 이해가 가는지 말했다.
“그래서 부동산 업자들 소집 명령을 내리신 거군요?”
“그래.”
“업자들에게 한정수에게 보여준 매물에 대해 물으셨고요?”
“그래, 사람 사는 집에서 그런 짓을 했을 리가 없으니 폐가 위주로 물었다. 매물은 총 네 군데였고.”
“아, 그렇구나. 그래서 금방 찾으신 거구나.”
미안, 네 군데가 아니라 한 군데를 바로 뒤진 거야. 목 과장님은 가만히 듣고 계시다 박수를 친다.
“대단하네, 현도경이.”
칭찬받으려고 설명한 게 아니라 자기변명을 한 거다.
“검사는 어떻게 됐습니까?”
목 과장님이 손톱으로 테이블을 긁으며 뜸을 들인다. 나는 목 과장님의 입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설마 여기서도 아무것도 안 나오는 건 아니겠지? 목 과장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조금 전에 단백질이 남아 있는 골반 뼛조각으로 신원을 확인했다. 친자인 딸과 DNA 분석 결과 김주연 씨의 시신일 확률이 99.98%이다.”
관우와 연주가 만세를 부른다. 하지만 오진규는 목 과장님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물었다.
“사망자는 알아냈는데, 살인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증거는 없는 겁니까?”
목 과장님이 팔짱을 끼며 한숨을 쉰다.
“음, 아직은.”
“젠장, 치밀한 새끼. 어떻게 털 하나를 안 남기냐, 하.”
다시 수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우리는 많은 진전을 이루었다. 시신조차 없어 실종 사건이 될 뻔한 사건을 살인사건으로 만들었다. 지금까지 해온 것도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룬 것이다. 하물며 시신이 발견되었으니 다음 스텝은 진짜 범인을 잡는 것으로 하면 될 일이다.
나는 오진규를 보며 물었다.
“한정수 신병 확보됐습니까?”
오진규가 골치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예, 지금 청 유치장에 있습니다.”
“변호사 불렀습니까?”
“아뇨, 뭔가 오해가 있을 거라고. 곧 나갈 건데 뭐 하러 변호사까지 부르냐고 하던데.”
한정수는 법을 꽤 안다. 잘 아는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시신이 없으면 살인사건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건 영화나 드라마깨나 봤다는 뜻이고 자신이 48시간 구류 후에 나갈 수 있다는 것도 알 확률이 높다.
하지만 착각이다. 그는 김주연 씨가 살해되던 시점에 그녀와 함께 있던 매우 유력한 중요 용의자이다. 이러한 사실을 들어 구류 시간을 더 늘릴 수 있다. 우리가 그가 범인임을 밝힐 증거를 찾을 때까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한정수를 만나보러 가겠습니다. 연주와 관우는 여기서 대기하다 뭐 더 나오면 바로 알려줘.”
“예, 과장님.”
나는 목 과장님께 부탁한다는 눈인사를 남긴 후 오진규와 함께 청으로 돌아왔다.
사무실에 앉아 잠시 쉬고 있자니 오진규가 문을 열며 들어와 말했다.
“취조실 준비됐습니다. 바로 들어가십니까?”
“예.”
취조실로 가는 길.
나는 한정수와 마주하는 것이 처음이다. 사건을 처음부터 수사한 것이 아닌, 중간부터 인계받았기에 처음 보는 것이다.
돈 때문에 자기 아내를 죽이는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사진은 봤는데 사진상으로는 그저 평범한 아저씨 같아 보였다. 실제로도 그럴까?
취조실 문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른 후 문을 열자, 아직 용의자 신분이라 수갑을 차지 않은 한정수가 자리에 앉아 있다 일어나 엉거주춤 허리를 숙인다. 그는 외견상으로 전혀 살인자 같지 않다.
“앉으세요, 한정수 씨.”
“저기, 형사님. 제가 왜 여기 있는지.”
“앉으세요.”
“저기, 우리 딸이 금방 학원에서 돌아올 시간인데.”
나는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두 시가 좀 넘은 시간. 나는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말했다.
“지연이는 열두 시에 집에 옵니다. 지금쯤 벌써 집에 와서 씻고 잘 겁니다. 앉으세요.”
“…….”
한정수는 내가 지연이를 만났다는 걸 모른다. 그의 놀란 표정을 가만히 노려본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세 번째 말합니다, 앉으세요.”
“…….”
한정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는다. 내가 노트북을 열자 그가 다시 입을 연다.
“저기, 형사님.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왜 여기 끌려 왔는지 도무지 모르겠는데요.”
나는 한정수의 뻔뻔한 모습을 노려보았다. 정말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가증스러운 표정. 저런 연기로 선량한 펜션 사장님을 연기하며 홍천을 누볐겠지. 자기 아내와 딸은 물론 내연 관계인 성현주도 그의 이런 면을 모르고 있을 확률이 크다.
나는 몸을 내밀며 물었다.
“한정수 씨.”
“예?”
“최근에 김주연 씨와 다툰 적이 있으시죠?”
한정수의 눈알이 뒤룩거린다.
“아, 뭐…… 보통 가정이 다 그렇죠. 부부싸움이란 게 워낙 자주 있는 거라. 크게 다툰 건 아닙니다.”
“무엇 때문에 싸우셨습니까?”
“…….”
“다시 물어야 됩니까?”
“그런 것까지 말씀드려야 됩니까? 이거 인권침해 아닙니까?”
“인권이 아니라 사생활 침해라면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거 살인사건입니다.”
“…….”
한정수의 눈이 커진다.
“예?”
“귀가 잘 안 들리십니까?”
“…….”
한정수의 울대가 꿀렁거린다.
“시신이…….”
아, 이 자식은 시신이 발견됐다는 걸 모르지? 나는 씩 웃으며 한정수의 떨리는 눈을 노려보았다.
“왜? 이제 좀 쫄리나?”
“…….”
한정수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