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229화
17. 증거(證據)(13)
됐다.
한정수는 지금 흔들리고 있다. 차분하게 자신의 세상 안에서 지어낸 거짓말들을 일목요연하게 늘어놓는 거짓말쟁이에 비해 이리 흔들리는 자를 상대하는 건 비교적 쉬운 일이다.
하지만 상대를 한번 흔들었다고 바로 멱살 잡기부터 하는 건 경험 없는 형사들이나 하는 짓이다.
보드게임 중에 젠가라는 놀이가 있다. 네모난 나무를 직사각형으로 쌓아두고 하나씩 빼는 게임이다.
우리가 범죄자들을 상대할 때는 논리라는 손가락으로 알리바이라는 나무토막을 하나씩 빼는 것과 같이 접근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견고한 탑이 와르르 무너지게 마련이다.
이미 홍천 경찰서에서 한정수에 대한 1차 취조를 마쳤기에 기본 조서를 다시 꾸밀 이유는 없다. 나는 데이터 베이스를 통해 전달받은 그의 신상명세를 보며 물었다.
“이름 한정수, 3년 전에 아내 김주연 씨와 재혼. 전처와는 자식이 없고 초기 자본 5억, 자산 규모 20억의 유통회사 운영 경험. 1년 전에 경영 악화로 회사 매도를 요청하였으나, 매수자를 찾지 못해 8개월간 적자. 4개월 전에 7억에 최종 매도.”
한정수는 아내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말에 아직 혼이 나간 얼굴이다. 나는 그에게 잠시 숨을 돌릴 틈을 주기로 했다.
“한정수 씨.”
“…….”
“한정수 씨?”
“예?”
“제 말 못 들으셨습니까?”
“…….”
한정수는 자신을 빤히 보는 내 눈빛을 바라보지 못하고 눈을 돌린다.
“예…… 그게…… 맞습니다.”
“사업을 접으신 후에 은행 대출금 2억을 모두 상환하고 남은 것이 5억. 은행 계좌를 확인하니 4억 5천만 원이 남아 있던데.”
한정수가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인다.
“새, 생활비로 썼습니다.”
“현재 연세가 51세. 남은 돈으로 놀면서 살기는 어려운 액수이니 다른 길을 알아보셨겠군요?”
한정수가 눈을 굴린다.
“그게, 아직 뭘 할지 정한 게 없어서…….”
나는 턱을 괴고 한정수의 눈을 바라보았다.
“좀 전에도 말했지만 당신 아내 시신이 나왔습니다.”
“…….”
“내가 당신이 앞으로 뭘 하며 살지 몰라서 물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
“당신이 뭘 하고 살려고 했는지 아니까 시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한정수의 얼굴이 굳는다. 이미 내가 부동산 업자들과 만났음을 직감한 것이다. 한정수가 얼른 변명을 한다.
“그, 그것이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펜션을 하려고 했습니다. 홍천 쪽에 몇 개월 전부터 드나들면서 부지를 좀 알아봤는데 마땅한 매물이 없어서 할지 말지 아직 안 정했다는 뜻입니다.”
나는 가만히 놈을 노려보다 다시 노트북을 보았다.
“그렇군요.”
그리고 나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노트북을 보고 있는 척하고 있지만 사실 나는 온몸의 감각을 활성화시켜 놈의 반응을 체크하고 있었다.
놈의 입장에서는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의 시간. 결국 놈은 견디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아, 아내 시신이 어떻게 나온 겁니까?”
나는 노트북에서 시선을 돌려 한정수를 지그시 보았다. 내 눈빛을 받은 놈이 움찔 놀라며 눈을 피한다.
“한정수 씨.”
“예?”
나는 검지로 테이블을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실종된 줄 알았던 아내가 시신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직 살아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무너진 순간에 고작 한다는 질문이 어떻게 나왔냐? 이게 상식적인 질문인가요?”
“…….”
“왜, 다 태웠는데 어떻게 시신이 나올 수 있냐 그게 궁금한 겁니까?”
한정수의 눈이 커진다.
“그, 그런.”
나는 말없이 한정수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당황한 놈이 벌떡 일어난다. 그 바람에 의자가 쓰러져 큰 소리가 났지만 한정수는 손을 마구 흔든다.
“저는 아닙니다! 제가 그런 게 아닙니다! 어떻게 인두겁을 쓰고 자기 아내를 죽이고 시신을 태운다는 말입니까!”
“…….”
나는 그저 턱을 괴고 가만히 놈을 바라보았다. 한정수는 내 반응에 자신을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있음을 직감하고 스스로를 변호하는 데 여념이 없다.
“정말 전 아닙니다! 제, 제가 그랬다는 증거 있습니까?”
나는 노트북을 한정수 방향으로 돌려주었다. 노트북 화면 속에 철물점에서 기름통을 사는 모습과, 주유소에서 등유를 구매 중인 놈의 모습이 담겨 있다.
한정수는 눈을 크게 뜨고 화면 속에 그려진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놈의 모습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래도 모르십니까?”
한정수가 비틀거린다. 모두 끝났다는 것을 알고 체념한 것일까? 놈의 다리에 힘이 풀리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나는 노트북을 돌려, 은행 계좌 목록을 확인한 뒤 다시 보여주었다.
“회사를 매도하고 대출금을 갚은 후 남은 돈에서 비는 5천만 원. 당신은 그걸 생활비로 사용했다고 했습니다. 4개월간 5천만 원을 생활비로 쓴다?”
한정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할 상태이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놈의 손이 파르르 떨린다. 나는 계좌 기록 중 현금을 찾은 기록들을 보여주었다.
“월 500만 원씩 정확히 네 번. 당신은 4개월간 네 번에 걸쳐 500만 원을 인출했습니다. 총액 2천만 원.”
한정수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내 쪽을 향한다. 나는 다시 턱을 괴고 말했다.
“성현주 씨 알죠?”
“…….”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 한정수의 고개가 툭 떨궈진다. 나는 성현주의 사진을 꺼내 놓으며 말했다.
“매달 500만 원씩 벌써 몇 년간 생활비를 대주고 있더군요. 대신에 룸살롱은 그만두는 조건으로.”
“…….”
“매월 친구와 낚시여행을 간다고 하던데. 정말 낚시 가신 것 맞습니까?”
“…….”
“알아보니 한정수 씨는 낚시 장비도 없던데. 아내와 딸에게는 매번 친구에게 빌려서 낚시하신다고 했다던데, 정말 그렇습니까?”
한정수의 고개가 툭 떨어진다.
“아니요, 낚시는 안 갔습니다.”
“성현주 씨 댁에 가셨죠?”
“예…….”
이건 이걸로 됐다. 난 바람피우는 남자 뒷조사를 하러 다니는 심부름 센터 직원이 아니니까. 이건 단지 내 정보력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굳이 그녀와의 관계에 대해 실토하게 한 것은 그다음 질문을 위해서이다.
나는 가만히 한정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날도, 성현주 씨 집으로 갔죠?”
“…….”
“온몸에서 탄 냄새를 풍기며 말입니다, 아닙니까?”
“…….”
이게 사람 새끼일까? 지 마누라 죽인 직후에 내연 관계의 여자를 만나러 그 집엘 기어들어 가? 사람 탈을 쓰고 어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걸까?
나는 죽일 듯한 눈빛으로 놈을 노려보다 김주연 씨의 시신 중 겨우 발견된 다 타버린 뼛조각 사진을 내밀었다.
“봐요.”
한정수 눈앞에 사진을 들이밀었다. 놈은 물끄러미 시커먼 뼛조각을 바라보았다.
“아궁이에서 발견된 뼛조각입니다.”
한정수의 시선이 사진에서 떨어질 줄 모른다.
“당신이 논두렁에 버린 증거물 중에 나온 대퇴부 뼈에서는 단백질이 검출되지 않아 DNA 추출이 불가능했지만 아궁에서 발견된 뼛조각에서는 남은 단백질 성분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 시신이 당신의 아내인 김주연 씨의 시신임을 알게 되었죠.”
한정수는 가만히 사진만 바라보고 있다. 나는 한정수를 충분히 흔들었다 생각하고 천천히 물었다.
“먹고살 길이 막막한 상황에 오빠 묏자리 이장하자고 하니 그렇게 화가 났습니까?”
한정수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싸우다 죽일 만큼 그렇게 미웠습니까?”
“…….”
“죽인 후에 시신을 이토록 참혹하게 유기할 만큼 그리 큰 죄를 지었습니까, 아내분이?”
“…….”
“재혼이라도 당신은 결혼한 유부남입니다. 그런 인간이 다른 여자 생활비를 몇 년이나 대주며 바람을 피운 것은 죽을죄가 아닌가 봅니다? 당신은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는걸 보니.”
한정수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린다. 나는 그의 변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말하세요, 이미 끝났습니다.”
한정수는 내 말에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증거들을 찬찬히 바라보기 시작한다.
기름통과 등유를 구매하고 있는 CCTV 사진, 성현주의 사진과 은행 계좌 기록들. 당일 자신의 차량이 이동했던 동선들을 기록한 지도를 찬찬히 바라보던 한정수는 어느 순간 나를 바라보았다.
눈에 천 가지 말을 담을 수 있다면 바로 저런 눈빛일 것이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눈동자를 흔드는 동안 수많은 질문과 답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하는 듯하다. 이러면 안 된다. 이놈이 너무 오래 생각할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된다.
나는 일부러 테이블을 강하게 내려치며 외쳤다.
“그만 말하라고! 당신 묵비권 행사하면 법정에서 더 불리해. 알아?”
한정수는 날 가만히 바라보다 자기 손목을 바라본다. 천천히 양손을 들어 보인 한정수. 나는 놈이 자기 손목을 보는 순간 일이 틀어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한정수가 지 손목을 내게 보여주며 말했다.
“내 손목에 수갑이 없네.”
“…….”
이번엔 내 말문이 막혀 버렸다. 한정수는 자신이 아직 용의자 신분이라 수갑을 채우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한정수는 말을 잃은 날 보며 입술을 뒤튼다. 악마가 미소를 지으면 저런 얼굴일까?
한정수가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내 아내가 죽었다.”
“…….”
“그런데 네가 내 앞에 가져온 증거라는 건 내가 기름통과 등유를 샀다는 것과 바람피우던 상대의 사진.”
“…….”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내의 시신이라 생각되는 뼛조각 사진.”
제길, 내가 빼낸 나뭇조각들이 놈이 치밀하게 쌓은 블록들의 균형을 무너뜨리지 못한 모양이다. 한정수가 날 가만히 바라보며 씩 웃는다.
“내가 죽였다는 증거가 없구나?”
최악의 상황이 왔다. 이놈이 눈치를 챈 것이다. 하지만 놈의 말에 당황하는 기색을 보여선 안 된다. 나는 회전의자를 빙글 돌리며 말했다.
“시신이 나온 이상, 증거 찾는 건 시간문제다. 한정수.”
기세 좋게 협박했지만 몸을 돌리는 순간 나는 내가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범죄자에게서 먼저 눈을 돌려 버린 것이다. 그것은 곧 그로 하여금 내가 자신을 완벽히 잡을 명분을 만들지 못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꼴이 되어버렸다.
한정수는 미소를 감추며 CCTV를 힐끔 본다. 순식간에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온 놈이 일부러 화면에 자기 얼굴이 잡히도록 몸을 비틀며 불쌍한 말투로 말했다.
“진짜! 난 진짜 아니라고! 믿어줘, 내가 죽인 게 아니야!”
가증스러운 모습에 얼굴을 한 대 갈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내가 놈을 때리면 나는 폭행으로 수갑을 차게 될 것이다.
물론 놈도 절대 반항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CCTV를 의식해 표정 연기를 하고 있는 놈이니 어쩌면 그런 상황으로 치닫는 것을 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분노한 눈빛으로 놈을 노려보았다.
“내가 꼭 찾는다. 그리고 그때 네놈 표정이 어떨지 옆에서 감상해 줄게. 약속한다.”
한정수는 고개를 마구 저으며 말했다.
“믿어줘! 난 진짜 아니라고!”
한정수가 벌떡 일어나 내 어깨를 와락 붙잡는다.
“진짜! 난 아니라고!”
한정수가 내 어깨를 흔들다 바싹 붙어 CCTV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속삭인다.
“없는 걸 어떻게 찾아? 낄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