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230화
17. 증거(證據)(14)
“젠장!!”
쾅! 와르르!
취조실을 벗어나 사무실에 온 나는 치솟는 분노에 애꿎은 책상 위 물건들을 집어 벽에 던져 버렸다.
오진규는 모니터링을 하며 이미 상황을 봤기에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댄 채 생각에 잠겨 있다. 보통 사람이 이렇게 화를 내면 말리게 마련인데 그는 가만히 자신만의 생각을 정리 중이다.
KCSI 측에 대기시켜 둔 연주와 관우가 돌아와 난장판이 된 사무실을 보고 놀라며 달려왔다.
“과, 과장님! 진정하세요!”
관우가 뒤에서 내 몸을 껴안는다. 하지만 녀석이 이렇게 말릴 정도로 흥분한 것은 아니다. 단지 화가 나 잠시 풀 것이 필요했을 뿐이다.
나는 호흡을 돌리며 관우의 손을 잡았다.
“이제 괜찮아.”
관우는 의외로 빠르게 가라앉는 날 관찰하며 슬며시 손을 놓는다.
“진짜 괜찮으시죠?”
“음.”
연주가 가만히 팔짱만 끼고 있는 오진규를 보며 핀잔을 준다.
“오 선배님은 과장님 저러고 계시는데 가만히 보고만 계시고. 좀 진정시켜 주시지.”
생각에 잠겨 있던 오진규가 연주를 힐끔 보고 실소를 짓는다.
“사람이 화가 나면 풀게 해줘야 진정이 되지, 녀석아.”
“그래도.”
오진규가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을 눈짓하며 말했다.
“위험하거나 깨지는 물건도 눈 돌아가서 던져 버릴 정도면 벌써 말렸지. 바닥을 봐.”
오진규의 말에 내 시선도 내가 던져 버린 물건들에게 간다. 관우가 주저앉으며 떨어진 물건 중 볼펜 하나를 집어 들고 웃는다.
“이야, 우리 과장님. 그 와중에 안 깨지고, 안 비싼 것만 골라서 던지셨네?”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 그건 필통과 노트, 수사기록들이 담긴 서류들이다. 하나같이 귀중품은 아닌 것들이다.
나는 얼굴이 붉어져 슬쩍 창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다행히 오진규가 대신 나서서 내 변명을 해준다.
“과장님이 초짜 형사도 아니고, 이 정도 일로 흥분해서 이성 잃고 난리 피우겠어? 그냥 잠깐 화풀이한 것뿐이니까 유난들 떨지 말고.”
관우와 연주가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을 정리한다. 나는 잠시 창밖을 보며 호흡을 한 뒤 물었다.
“미안, 내가 잠깐 흥분했다. 놈이 하도 열 받게 해서.”
관우가 정리를 하며 웃는다.
“예, 예. 괜찮습니다. 볼펜 이거 얼마나 한다고. 하나 빼고 다 멀쩡해요.”
딱 하나의 볼펜만 부러졌다. 관우가 연주에게 그것을 던지자, 받아서 쓰레기통에 넣은 연주가 말했다.
“KCSI에서 대기했는데 뭐, 별거 안 나왔어요. 시신과 함께 발견된 탄화물은 모두 나무, 등유 성분이고. 나무 쪽도 분석 중인데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나무와 갈대였습니다. 더 대기해 봐야 나올 게 없다고 판단하고 돌아왔어요.”
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아무것도 안 나오는 걸까? 아무리 정황상 한정수가 범인이 확실하다고 해도 대한민국은 증거 주의에 입각한 판결이 나는 나라이다. 이런 증거로는 그의 살인을 밝힐 수가 없다.
그때 지금껏 생각에 잠겨 있던 오진규가 물었다.
“성분표 가져왔어?”
연주가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여기요. 그런데 정말 나무와 시신 말고는 없어요. 탄화물이라고 해도 DNA를 검출하는 게 아니라 원래 그게 무슨 물건이었는지 정도는 나오니까.”
“섬유 발견됐지?”
“시신이 입고 있던 옷이요.”
“뭐였지?”
“울 소재 니트와 청바지였는데요. 그건 왜요?”
“울 소재 니트와 청바지라…….”
“거기 맨 아래에서 두 번째 줄에 있어요.”
“노안이 왔나, 젠장. 왜 이렇게 글자가 작아?”
“주세요, 제가 찾아드릴게요.”
연주가 서류를 받아 빨간 펜으로 줄을 긋는다.
“여기, 케라틴(keratin) 성분이 섬유에서 나온 거예요. 울 소재 니트는 인간의 머리카락이나 몸의 털과 보온에 목적이 있는 동물의 털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요. 인간과 동일한 성분을 분리할 수 있는 근거는 이 케라틴 성분이 원단으로 가공될 때 섬유 스스로 이리저리 꼬이는 꼬임 현상을 가지기 때문이래요. 빨간 줄 그어진 줄의 성분이 꼬임 현상이 보이는 면 원단이고, 그 아랫줄은 아주 약간 남은 섬유를 분석한 결과인데 10수가량의 면이고 데님 청바지를 만들 때 사용하는 원료입니다.”
연주가 표기한 서류를 오진규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그런데 이건 왜요?”
오진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서류를 뚫어지게 보다 손을 내민다.
“그 왜, 논두렁 얼음에서 발견된 증거물들 성분 분석표 따로 있지?”
오진규가 갑자기 왜 저러는 걸까? 관우가 자기 서랍을 뒤지며 중얼거린다.
“그걸 어디다 뒀더라, 여기 어디에…… 아, 여기 있네요.”
오진규는 관우가 준 서류를 뜯어 성분을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케라틴, 케라틴…… 아, 여기 있네. 근데 이건 인체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 이건 섬유라고 볼 수 없다는 뜻인가?”
관우가 서류를 가져가며 다시 확인 후 말했다.
“네, 논두렁에서 발견된 탄화물에서는 섬유가 안 나왔습니다, 근데 이건 왜요?”
오진규가 말없이 다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런 오진규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저 경험 많은 형사가 저렇게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는 건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는 뜻이다.
그는 증거물의 성분을 보았다. 탄화물에 남은 사람 인체에서 나온 단백질과 케라틴 성분. 그리고 면 원단의 성분. 그는 여기서 뭘 유추해 내려는 걸까?
오진규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잠시 내 얼굴을 보다 물었다.
“한정수가 구매한 물건 중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게 뭐죠?”
우리 모두가 아는 물건이다.
“기름통입니다.”
“그렇죠, 일단 그걸 찾아내야 됩니다.”
관우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기름통으로 지 아내를 쳐 죽였으면 또 몰라, 그냥 등유만 갖다 부었으면 그거 결정적 증거 안 됩니다. 이미 죽은 시신이라 방어도 안 하는 시신에 뿌렸을 텐데 거기서 김주연 씨 DNA가 나올 리가 없잖아요.”
내 생각도 그렇다. 하지만 상대는 오진규. 그가 관우도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을 간과할 리 없다.
나는 잠시 오진규의 생각을 읽기 위해 생각에 잠겼다. 그는 왜 기름통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걸까? 관우 말처럼 기름통에서 뭔가 나올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오진규는 두 번의 현장 증거 성분을 확인했다. 기름통을 찾아야 한다는 것과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기름통, 기름통…….’
순간 철물점 아저씨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혹시 이 사진 좀 봐주시겠습니까?’
‘이게 언제 사진이야?’
‘1월 7일입니다.’
‘어제 일도 기억 안 나는 노인네가 열흘도 넘은 일을 어찌 기억해? 모르겠어.’
‘저기, 여기 보면 하얀색 기름통을 구매한 것 같은데 다시 한번 봐주세요.’
‘기름통?’
‘옳거니. 기억이 나네. 한 50 먹어 보이는 양반이었는데.’
‘기억하세요?’
‘응, 저기 저거 사서 갔어. 만 원.’
대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른 말은 더 없었냐는 물음에 철물점 주인아저씨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다른 건 안 사갔습니까?’
‘어…… 아, 그래. 목장갑 서비스로 하나 달라고 하길래 안 된다고 했더니 천 원 주고 샀어.’
‘목장갑은 어떤 겁니까?’
‘저기 저거.’
오진규는 현장에서 발견된 증거물이 분석된 표를 확인했다. 나는 아저씨가 그때 가리켰던 목장갑 뭉치를 떠올렸다. 손바닥에 빨간 휘발성 물질이 있는 보통의 목장갑.
나는 얼른 두 개의 서류를 빼앗아 직접 확인하며 물었다.
“관우야.”
“예?”
“목장갑 성분이 뭐지?”
내 질문에 오진규는 내가 자신과 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있음을 눈치채고 미소 짓는다.
관우가 갑작스러운 질문에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면 아닙니까?”
면. 우리가 흔히 아는 면의 성분을 분석하면 셀룰로오스(cellulose)가 대부분이고 그 외 펙틴(pectin)과 수분, 목화랍, 소량의 단백질 성분이 들어 있다. 성분 분석표에는 방금 말한 모든 것이 들어 있다.
하지만 단 하나가 없다.
나는 성분 분석표를 내리고 오진규와 눈을 맞췄다. 나는 그를 바라보다 팀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철물점 아저씨를 인터뷰한 건 나 혼자라 모를 수 있겠지만 한정수는 기름통을 구매할 때 한 가지 물건을 더 구매했다.”
연주가 놀라며 물었다.
“뭐가 또 있어요? 보고서에는 없던데.”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어, 오 선배에겐 말했고. 공유 미스다. 미안.”
“뭔데요?”
나는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목장갑.”
순간 멍한 얼굴이 되었던 관우가 눈썹을 일그러뜨린다.
“하지만 분석표에 면 성분이 있었다는 부분이 명시되어 있어요. 불에 타면서 탄화물로 변해 원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상황입니다. 같은 면 소재인 청바지와 뒤엉켜 있던 게 아닐까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오진규를 바라보았다. 미소를 지은 그가 자기 손바닥을 보여주며 말했다.
“그냥 목장갑이 아니었으니 과장님이 저리 말씀하시는 것이겠지.”
관우와 연주가 알 듯 말 듯 한 표정을 짓는다. 오진규가 자기 손바닥을 문지르며 내게 말했다.
“손바닥 면에 붉은 휘발성 물질이 코팅된 장갑. 맞죠?”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연주와 관우가 서로를 바라보다 점점 눈을 크게 뜬다. 그러다 어느 순간 두 사람이 동시에 하나의 단어를 외친다.
“라텍스!”
오진규가 손가락을 튕기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분석표에 라텍스 성분이 없다.”
목장갑 손바닥에 묻은 휘발성의 붉은 물질은 라텍스 성분을 가진 물질이다. 탄화물 중 라텍스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발견된 물건 중 목장갑은 없는 것이다.
연주가 뒤늦게 사실을 깨닫고 중얼거린다.
“잠깐만. 목장갑이면…….”
관우가 다시 성분 분석표를 확인하며 말했다.
“기름통과 달라. 이 새끼가 직접 손에 착용하고 있었을 것이고, 당연히 증거 안 만들겠다고 그거 끼고 시신을 만졌을 테니 김주연 씨 혈흔이나 DNA가 남아 있을 거야. 안쪽에서 한정수 새끼 DNA가 검출되면 끝이야.”
다시 살아난 희망의 불씨. 혹시 한정수가 목장갑까지 태웠다면 이제 더는 방법이 없다. 하지만 이제 남은 총력을 이곳에 걸어야 할 때이다.
오진규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CCTV상으로 확인했을 때 한정수는 기름통을 구매 시 깔때기나 석유 펌프는 사지 않았다. 그 말은 아궁이 위에 시신을 두고 등유를 부을 때 그냥 통을 들어서 쏟아부었을 거라 이 말이지.”
오진규가 사무실을 빙글빙글 돌며 말했다.
“시신 위에 골고루 등유를 뿌리다 기름이 튀었을 거야. 몸에는 안 묻히려고 노력했겠지만 기름을 붓고 있는 통에는 기름이 묻었겠지. 자기 몸에 등유가 튀면 나중에 성분이 검출될 수 있다는 걸 알고 몸을 뒤로 젖힐 수는 있었겠지만 기름통에 튀는 등유까지는 어쩔 수 없었을 거다.”
연주가 턱을 문지르며 말했다.
“등유가 묻은 기름통을 맨손으로 가져가 유기했을 리는 없다. 게다가 기름통이 발견되어도 거기서 지문이 나오지 않게 하려면 마지막 순간까지 목장갑을 착용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관우가 손가락을 비비며 말했다.
“만일의 경우 기름통이 발견될 가능성을 열어둔다면 기름통과 목장갑을 서로 다른 곳에 버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나서며 말했다.
“범죄자의 심리상, 증거물들을 빨리 처리해 버리려는 습성이 있다. 위험한 물건을 오래 가지고 있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까. 오 선배가 기름통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 건 놈이 기름통을 먼저 처리한 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목장갑을 버렸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야.”
모두의 생각이 하나로 모였다. 나는 날 주시하며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팀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취조실 안에. 우리 경찰을 바보로 아는 놈이 앉아 있다. 히죽히죽 처웃으며 우릴 놀리는 놈이지. 나는 그 새끼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워 버리고 싶다.”
팀원 모두가 한 번씩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인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박수를 쳤다.
“홍천에 다시 연락해서 수색대 요청하고, 지금부터 한정수의 목장갑을 찾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움직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