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231화
17. 증거(證據)(15)
목장갑.
라텍스 소재 휘발성 물질이 발라져 있는 이 장갑은 도대체 어디 있을까? 어디 버렸을까?
목장갑은 작다. 그래서 눈에 띄지 않는다. 우리는 먼저 눈에 잘 띄는 기름통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목장갑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일 수도 있다. 모든 범죄자의 프로파일이 정형화되어 있는 것은 아니므로, 사건 사례를 통한 연구자료에는 예외가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염두에 두고 수사를 진행해야 될 것이다.
사건을 시간 순서별로 다시 정리해 보자.
2026년 1월 7일 오후 2시경.
한정수의 차량이 춘천에 위치한 묘산 추모공원으로 들어갔다.
2026년 1월 7일 오후 2시 50분.
아내이자 살해당한 김주연 씨의 차량이 추모공원으로 들어왔다.
2026년 1월 7일 오후 3시 20분.
한정수의 검은색 승용차가 추모공원을 나갔다.
김주연의 차량은 여전히 공원 안에 있었다. 차량은 주차장이 아닌 그녀의 오빠 묘가 있는 구역에 있었다.
2026년 1월 7일 오후 9시에서 9시 30분경.
한정수는 내연 관계에 있는 성현주가 사는 서울 중구 동화동 집에 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후 3시 20분부터 9시까지의 시간이 공중에 떴다는 것이다.
한정수는 이 시간 동안 홍천의 펜션 부지 폐가에 들러 아내 시신을 태웠다.
2026년 1월 8일 오전 7시 20분.
묘산 추모공원 관리인이 시신 매장을 위해 땅을 파러 가던 중, 김주연 씨 차량이 주차되어 있는 것을 보고 차주를 찾다가, 내부에 핏자국을 보고 112신고센터로 연락했다.
2026년 1월 8일 오전 9시 10분.
강원지방경찰청 광역과학수사팀이 현장 감식에 착수했다.
2026년 1월 8일 오후 12시 40분.
112신고센터에 ‘엄마가 실종됐다’는 신고가 접수되었다.
신고자는 김주연의 딸 17세 오지연.
2026년 1월 18일.
국가수사본부로 사건이 이관되었다.
2026년 1월 20일.
CCTV 추적 중, 한정수가 철물점과 정육점을 들렀다는 점을 확인했다.
기름통, 목장갑, 홍천 한우를 구매한 사실을 확인했다.
2026년 1월 21일.
한정수와 성현주의 관계를 확인 후, 인터뷰 진행했다.
옷에서 탄 냄새가 났다는 증언을 확보했다.
2026년 1월 22일 오후 6시.
김주연의 딸 오지연의 인터뷰 중 한정수가 집에 고기를 가지고 가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2026년 1월 22일 밤 11시경.
홍천 논두렁에서 탄화물이 발견되었다.
인체 대퇴부 뼛조각이 발견되었으나 DNA는 검출 불가했다.
2026년 1월 23일 오전 10시경.
기억을 읽고 홍천 부동산 업자 중 한정수와 접촉한 업자를 확인했다.
붉은 양철 지붕에 회색 벽으로 지어진 폐가 아궁이에서 시신으로 추정되는 탄화물을 발견했다.
DAN 감식 결과 피해자 김주연 씨의 유골임을 확인했다.
한정수 긴급 체포를 명했다.
한정수는 순순히 자신의 범죄를 인정할 생각이 없다. 지금껏 나온 증거를 모두 조합했을 때, 충분히 정황증거가 될 수 있으며, 유력한 용의자로 남편을 지목할 수 있다.
하지만 결정적인 물증이 없다. 지금까지 한정수가 한 짓 중 우리가 밝혀낸 것이라고는 아내가 살해되던 시각에 현장에 함께 있었으며,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점. 아내와 친오빠의 묏자리 이장을 놓고 싸웠다는 점. 또 시신을 훼손한 곳이 그가 미리 알고 있었던 장소라는 것밖에 없다.
이걸로는 검찰 이관 단계에서 기소 중지나 유예가 될 확률이 높다. 좀 더 확실한 물증이 필요하다.
우리가 추측한 중요한 물증은 목장갑. 그것만 찾으면. 안쪽에서 한정수의 DNA를 검출하고, 바깥쪽에서 김주연의 혈흔이 나온다면. 게임은 끝이다.
문제는 그 목장갑을 대체 어디 가서 찾느냐 이 말이다.
물론 홍천부터 뒤지긴 할 것이다. 하지만 홍천군은 면적 1,820.34㎢이나 되는 거대한 곳이다. 게다가 인구는 68,177명밖에 살지 않는다. 목격자가 많을 수 있는 서울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곳이다.
킬로 제곱 미터당 거주 인구 평균이 37.56명/㎢밖에 안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시신이 유기된 폐가만 놓고 보아도 주변 반경 1㎞ 안에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며, 해당 폐가는 부동산 업자가 손님을 데리고 오지 않는 이상 누구도 방문하지 않는 곳이다.
부동산 업자들도 외지인이 펜션 사업을 하겠다고 찾아오지 않는 이상 보여주지 않는 매물이라 하였으니, 내가 찾아내지 못했다면 아주 오랫동안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다.
재가 되어 타버린 시신은 창문이 없어 앞뒤로 뻥 뚫린 폐가를 꿰뚫는 바람을 못 이기고 허공에 날려갔을 것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신규 세입자는 단순 그을음으로 생각하고 청소를 해버렸을지도 모른다.
현장은 그만큼 수사 환경이 열악한 곳이다. 사건이 터지면 탐문부터 펼치는 수사 방식은 애초부터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한정수를 목격한 사람이라고는 철물점 주인과 정육점 주인밖에 없는데 그 둘은 단순히 물건을 구매하러 온 놈을 보았을 뿐이니까.
홍천 수색대에 전화를 해 지시를 내리는 연주의 통화 소리가 들려온다.
“네! 국가 수사본부입니다. 홍천에서 발견된 폐가 인근의 추가 수색을 요청드립니다. 네, 네. 아뇨, 시신이 아니라 기름통입니다. 네, 등유 받아쓸 때 사용하는 하얀색 기름통 아시죠? 그겁니다. 네, 펌프는 없고, 기름통만 있을 겁니다. 한 번만 사용한 것이라 거의 새 제품일 것이고요. 수색 중에 빨간 라텍스 물질이 묻은 목장갑이 나오면 절대 만지지 말고, 즉시 KCSI로 연락해 주세요. 가장 중요한 건 목장갑입니다. 아셨죠?”
구석 자리에 있는 관우는 주유소에서 좌측으로 꺾어 들어간 한정수의 차량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있다. 연신 턱을 쓸고 있지만 우리는 이미 안다. 해당 지역에는 CCTV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지역이 더 많다는 것을.
오진규는 지도를 붙여놓고 한정수가 폐가에서 시신을 훼손하고 있던 시간에 어떤 동선으로 움직일 수 있는지 경우의 수를 계산하며 중얼거리고 있다.
“33번 국도에서 31번 국도로 나와서…… 아니, 그전에 여기 오솔길을 지날 수 있네. 충분히 차가 다닐 수 있는 넓이의 도로다. 주변에 갈대밭이 있고, 뒤로는 산이 있고…….”
수색 범위가 너무 넓다. 언젠가는 찾겠지만 몇 년이나 걸리게 될지도 모른다. 아무리 유력한 용의자라도 증거 없이 무기한 구류할 수는 없기에 언젠가 한정수를 방면해야 될 수도 있다.
그럼 이자가 나가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한우와 관련된 진술을 한 김주연의 딸 오지연. 그리고 자신에게서 탄 냄새가 났다고 진술했던 성현주도 대상이 될 수 있다.
‘자신 외에 모든 사람을 원망할 수 있다.’
기억 속 한정수는 그런 인간이었다. 자신 주변에서 일어난 안 좋은 일을 모두 남의 탓으로 돌리는 부류의 인간. 원망할 누군가를 찾아 그에게 모든 것을 덮어씌우고 자신을 정당화시키는 사람이다.
성현주의 경우 몇 년이나 생활비를 책임졌는데 은혜도 모르고 경찰에 쓸데없는 진술을 해 자신을 곤란하게 했다 해코지를 할 수 있고, 딸은 자신의 친딸이 아니며, 성인이 될 때까지만 의심을 피하기 위해 키운다 했으니 아이 또한 범죄의 잠재적 대상이 될 수 있는 일이다. 놈은 절대 풀어줘서는 안 될 인간이다.
나는 관자놀이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어디냐, 도대체 어디야.”
한정수에 대한 충분한 악의를 가졌다. 한 번 더 기억을 읽게 되면 좋으련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왜 그런지는 안다. 나는 상대에게 악의를 가졌을 때 그와 관련된 사물이나 장소, 생명체를 마주해야 기억을 읽을 수 있다. 지금처럼 사무실에서 머리 싸매고 있다고 되는 일은 없다는 뜻이다.
결국 답답했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KCSI에 좀 다녀올게.”
연주가 PC 앞에 있다 물었다.
“증거물 재확인하시게요? 저희가 다 확인했어요. 그쪽에선 건질 거 없을 거예요.”
그게 아니라, 증거물들 붙잡고 악의라도 가져보려고 그러는 거야. 그럼 뭔가 보일지도 모르니까. 물론 증거물 중에 그가 기름통과 목장갑을 버릴 당시에도 가지고 있던 물건들이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을 보는 것이 아니다. 사물이나 생물체, 장소에 담긴 기억만 읽을 수 있다.
연주 말을 듣고 나니 과연 KCSI에 남겨진 증거물에 그런 기억이 남아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부정적으로 만들었다. 만약 한정수가 기름통과 목장갑을 맨 마지막에 버렸다면, 이미 발견된 탄화물들에 남은 기억 속에는 그것들을 버린 장소가 남아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
기억이 남아 있을 만한 사물이나 생명체, 그리고 장소.
먼저 생명체는 없다. 들새라도 잡아서 기억을 읽지 않는 한 말이다. 홍천 일대를 날아다니는 수많은 새들을 다 잡아들일 수는 없다.
다음으로 장소. 어디인지 알아야 장소의 기억을 읽을 수 있는데 이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사물. 발견된 증거물은 KCSI에서 보관, 분석 중이다. 하지만 거기 기름통과 목장갑을 버릴 당시에도 가지고 있던 물건이 있을 거란 보장은 없다. 그래도 가 봐야 되나?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까?
나는 괜히 사무실 안을 빙빙 돌았다. 나 때문에 정신 사나울 팀원들에게 조금 미안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기억, 기억…… 사물, 생명체, 장소…….”
장소와 생명체는 제외하자. 거긴 애초부터 확률이 제로에 가까우니. 그럼 사물만 남는다. 한정수가 그날 무슨 옷을 입었지? 옷에 기억이 남지 않았을까? 나는 문득 그것이 궁금해져 관우를 불렀다.
“관우야.”
“예?”
“사건 당일 한정수 옷이 뭔지 확인해 줘.”
“아, 그거. 검은색 정장이었습니다. KCSI가 혹시나 해서 당일 입은 검은 정장을 압수했는데 증거물은 안 나왔습니다. 한정수 말로는 원래 한 번만 더 입고 세탁소에 클리닝을 맡기려고 했답니다. 사건 다음 날 바로 세탁소에 맡겨서 클리닝 작업이 끝나 버린 상태라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현재는 돌려준 상태이고요.”
클리닝까지 마쳤다. 물론 기억을 클리닝한 것은 아니니 어쩌면 읽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다시 한번 옷의 생김새를 확인하기 위해 말했다.
“영상 기록 다시 한 번만 보여줘.”
“예.”
관우가 정육점 앞에 비상등을 켜고 주차한 검은색 승용차의 뒷모습을 보여주며 스페이스 바를 누르자, 차에서 내린 한정수가 정육점 간판을 보는 모습이 보인다.
화면을 멈춘 관우가 말했다.
“안에 하얀색 드레스 셔츠를 입고 있고, 위아래 세트로 보이는 정장에 구두와 벨트는 명품을 착용했습니다.”
“구두, 벨트는 드라이 클리닝이 안될 텐데. 그것도 조사했어?”
“예, 아무것도 안 나왔어요.”
“음.”
일단 이거라도 파볼 생각이다. 뭐라도 잡아야지 가만있다고 되는 일은 없으니까. 나는 아우터를 입으며 한정수의 옷차림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한정수의 집을 수색해 비슷한 옷 중에 저 옷을 찾아내야 된다.
한참 한정수의 옷차림새를 노려보던 나는 어느 순간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한정수가 살인을 저지르고, 시신을 유기하고, 증거를 훼손하는 모든 순간에 함께했던 물건. 물론 옷도 그중 하나이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을 함께한 물건은 또 있다.
‘한정수의 검은색 승용차!’
나는 이미 여주 주유소 사건 때 살해당한 피해자의 차에 남은 기억을 읽은 경험이 있다. 나는 화면 속 한정수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 새끼 차…… 지금 어디 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