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인의 기억-232화 (231/328)

살인의 기억 232화

17. 증거(證據)(16)

왕십리 2동, 골프 연습장.

우리가 아내 김주연 씨의 시신을 발견하고, KCSI가 신원을 확인하고 있을 그 시각. 사람을 죽이고 불에 태워 흔적을 없앤 악마는 태연하게 골프를 치고 있었다.

24시간 밀착 감시 중이던 형사들이 지시를 받고 그를 체포하기 위해 급습했을 때 놈은 20대 골퍼 출신 여선생님과 레슨 중이었다고 한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나 싶다.

골프 레슨 중인 선생이 여성인 것은 관계없다.

하지만 아내가 실종 상태인데 태연하게 골프를 치러 다니는 남편은 황당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도 자신이 직접 사람을 죽여 태우고도 이렇게 태연하게 삶을 즐길 수 있는 놈이라면 내면에 악마가 살고 있을 것이다.

나는 미리 적어온 한정수 차량 넘버를 손에 들고, 주차장을 누볐다.

낮 시간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골프 레슨을 받으러 왔는지 주차장에 차가 가득하다. 하지만 작은 주차장이라 그리 어렵지 않게 놈의 차를 찾아낼 수 있었다.

내게는 차 열쇠가 없으니 일단 밖에서 차를 살필 수밖에 없다. 물론 강원 광역수사대나 KCSI가 차를 검사했을 테니 육안으로 발견할 수 있는 증거는 없을 것이다.

나는 차를 한 바퀴 돈 뒤 차를 노려보며 한정수에 대한 악의를 가졌다. 하지만 아무리 차를 노려보아도 눈만 아플 뿐 기억은 보이지 않는다.

“하, 미치겠네.”

차 안에 들어가 보면 좀 나을까? 그런데 어떻게 들어가지? 문을 따볼까?

하지만 내가 도둑도 아니고, 차 문 따는 방법을 알고 있을 리가 없다. 시도를 해도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또한 그 모습을 누가 본다면 경찰 얼굴에 먹칠하는 짓이다.

한참 차만 노려보고 있던 바로 그때. 옆에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린다.

“거기 뭐요?”

돌아보니 주차 관리인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수상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하, 아무 수확도 없이 그냥 돌아가야 할까? 나는 팔짱을 풀고 한숨을 쉬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차 관리인 아저씨가 가만히 날 살피며 말했다.

“별 희한한 사람 다 보겠네. 멀쩡한 남의 차는 왜 그리 노려봐요? 허튼짓은 하지 말고. 여기 CCTV가 몇 대인데. 차에 흠집 내면 바로 잡혀, 알아요?”

나는 속으로 실소를 지었다. 아저씨 제가 경찰입니다. 아저씨가 신고하면 제가 오는 거예요.

“곧 가겠습니다.”

“지금 가라고요, 사람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내 참 별.”

그때 아저씨 뒤에서 하얀색 승용차 한 대가 들어오며 운전석 창문이 열린다. 젊어 보이는 남자가 차에 타고 있고, 뒷좌석에 골프채가 보인다.

“아저씨 나 바쁜데.”

관리인 아저씨가 얼른 주머니를 뒤지며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바로 빼드리겠습니다.”

아저씨의 주머니에서 스마트 키가 나온다. 버튼을 누르자, 벽 쪽에 주차되어 있는 차 중 한 대가 빛을 뿜는다.

아저씨가 달려가 운전석에 타 차를 빼주자, 방금 들어온 차량이 거기 주차를 한다. 관리인 아저씨는 뺀 차를 다른 차 앞에 대둔 후 내려서 자기 아들뻘 되는 남자에게 굽실거린다.

“차 키 주시고, 몇 시간이나 대십니까?”

“한두 시간?”

“예, 주차 등록 꼭 좀 부탁드립니다. 올라가면 카운터에서 해줄 겁니다.”

“알았어요.”

건방진 어투의 젊은 남자는 골프채를 들고 날 한 번 힐끔 본 뒤 골프 연습장으로 올라간다.

누가 보면 참 버릇없는 놈이다, 동방예의지국에서 젊은 놈이 노인네에게 말투가 저게 뭐냐 하는 소리나 하겠지만 난 달랐다. 아저씨가 다른 이의 차를 빼는 모습을 보는 순간 새로운 시도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건물로 들어가는 젊은이의 뒷모습을 보며 굽실거리는 아저씨에게 달려간 내가 물었다.

“아저씨!”

“아이고, 깜짝이야.”

관리인 아저씨가 돌아보며 인상을 쓴다.

“아직도 안 갔어요?”

“여기 주차하려면 무조건 키 맡겨야 돼요?”

관리인 아저씨가 미간을 좁히며 날 아래위로 본다.

“그건 왜? 한 번도 못 본 얼굴인데.”

아저씨는 날 째려보다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드는지 조심스럽게 묻는다.

“저…… 혹시 골프장 신규 회원이십니까?”

아저씨는 금방 허리를 굽혀 사과할 기세로 묻는다.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아저씨가 다시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럼 왜 자꾸 여기서 얼쩡거려요?”

“차 키요. 여기 키 맡겨야 되죠?”

“당연하지. 여기 주차장 규모를 좀 봐요. 차 열 대밖에 못 들어가는데 시간당 들어오는 차는 열다섯 대도 넘으니 주차 관리인 없으면 안 돌아가지. 덕분에 나도 먹고사는 거고. 왜? 일반 주차하시게? 안 돼. 우리 주차장은 일반 주차 안 받아요.”

나는 한정수의 차량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차 키도 가지고 계시죠?”

관리인 아저씨는 검은색 승용차를 바라보다 와락 인상을 구기며 소리를 지른다.

“나가라고! 남의 차에 왜 그리 관심이 많아!”

아저씨는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뭐 휘두를 것이 없나 찾는 모양새다. 벽에 세워둔 빗자루를 발견한 아저씨가 냉큼 달려가 빗자루를 들고 휘두르려 하는 찰나, 아저씨는 내 모습을 보고 그대로 굳었다. 내 손에 들린 경찰 신분증을 보았기 때문이다.

“경찰입니다.”

“힉!”

놀란 아저씨가 빗자루를 떨어뜨린다.

“아이고!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몰라서.”

“아뇨, 아닙니다. 당연합니다.”

강혁 아저씨와 동년배로 보이는 아저씨는 젊은 사람에게 굽실거리는 것이 익숙한 모양새다. 너무 그러시니 죄송한 마음이 든다.

“아저씨 제가 좀 급해서 그런데.”

“아! 이 차 키 찾으셨죠? 잠깐만 기다리세요.”

아저씨가 달려가 생활하는 컨테이너에서 차 키를 찾아 뛰어오신다. 저렇게 뛰지 않아도 되는데. 나는 몇 걸음 달려가 아저씨를 맞이했다.

아저씨가 스마트 키를 건네며 말했다.

“안 그래도 어제부터 이 차가 안 빠져서 카운터에 문의했는데 무슨 경찰이 데리고 갔다는 말만 하고…… 일단 차는 그대로 두라고 해서 여기 뒀습니다.”

“잠깐 살펴봐도 될까요?”

아저씨는 잠시 고민한다. 아무리 경찰이라도 고객 차를 함부로 열게 하는 게 옳은 것인지 판단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대략적인 부분을 알려줘야 할 것 같다.

“살인사건입니다.”

아저씨가 놀란 눈으로 딸꾹질을 한다.

“딸꾹! 뭐, 뭐라 딸꾹! 고요?”

나는 스마트 키를 누르며 차 문을 열었다.

“살인사건 수사 중이라고요. 문제 생기면 제가 책임집니다. 오래 안 걸리니 근처에 계셔도 되고.”

아저씨는 눈이 휘둥그레져 나만 보고 있다. 그 와중에도 본인의 직분을 수행하기 위해 자리를 뜨지 않는 것을 보니 아주 성실하고 좋은 분 같다. 아차, 지금 내가 사람에 대해 판단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차 문을 열자 방향제 냄새가 먼저 난다. 탄 냄새가 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런 향은 없다.

검은 승용차는 내장재의 색도 검다. 검은색 가죽으로 만든 고급스러운 내부. 아날로그 시계가 박힌 대시보드는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다.

운전석에 앉자마자 제일 먼저 기어 옆에 있는 콘솔 박스부터 열어보았다. 선글라스와 먹다 만 건빵, 티슈와 종이컵 따위가 나온다.

뒷좌석을 돌아보았지만 기름통이 있던 자리에는 한정수의 것으로 보이는 골프 모자만 있다.

조수석 쪽으로 몸을 내밀어 글로브 박스를 열었다. 자동차 등록증과 보험 증서, 차량 사용설명서가 나온다. 그 외에 나오는 건 각종 영수증 따위와 잡동사니이다. 증거로 보일 만한 물건이 없다.

하지만 애초에 그걸 기대한 것이 아니다. 증거물이 있었다면 벌써 KCSI가 발견했을 테니까.

나는 운전석을 붙잡고 가만히 조수석을 바라보았다.

이 조수석에 가장 많이 앉은 사람은 누구일까? 아내 김주연? 아니면 성현주? 같은 차에 두 여자를 태우던 남자의 속에는 무슨 생각이 들어 있었을까?

뒷좌석에는 가끔 딸인 오지연도 앉았을 것이다. 꿈에도 엄마가 앉는 조수석에 다른 여인이 앉았을 거라 생각 못 했던 딸은 아무것도 모르고 해맑게 웃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딸은 지금도 자기 계부가 엄마를 죽인 범인이란 걸 모른다. 아니, 똘똘한 아이라면 어쩌면 조금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찾아오는 경찰들마다 아빠의 행적에 대해 물었을 테니까.

운전대를 꼭 잡고 조수석과 뒷좌석을 바라보던 나는 다시 눈을 앞으로 돌렸다. 눈앞에 붉은 양철 지붕 집이 보이는 듯하다. 하얗고 검은 연기를 아직도 내뿜고 있는 그 집을 떠나는 그 순간. 이 차도 함께했을 것이다.

뒷좌석에는 쓰고 난 기름통과 목장갑이 있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아내 시신을 꺼내고 빈 트렁크에 넣었을지도 모른다.

취조실에서 본 한정수의 모습이 생각난다.

마치 내 생각을 읽고 있다는 눈빛으로 미소를 지은 놈이 내게 말했었다.

‘내가 죽였다는 증거가 없구나?’

‘없는 걸 어떻게 찾아? 낄낄.’

나는 날 비웃고 있던 한정수의 가증스러운 얼굴을 떠올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그 순간. 벽을 향해 주차되어 회색 벽돌 벽만 보이던 시야가 점점 흐릿해지고, 세상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운전대를 힘껏 붙잡은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이를 악물었다.

‘보여라, 씨X 새끼야.’

* * *

퍽! 퍽! 퍽!

온몸에 탄 냄새가 풍겨 옷을 모두 벗은 후 몇 번이나 털었다. 한겨울에 팬티 차림으로 죽은 나무에 옷을 부딪쳐 냄새를 털어냈다.

하지만 전혀 부끄럽지 않다. 주변에 아무도 없으니까. 이 나이 먹고 처음 해보는 경험이 어쩐지 나쁘지 않았다.

살을 에는 추위 때문에 몸에 소름이 돋는다. 붉은 양철 지붕을 가진 폐가 부엌에서 검고 하얀 연기들이 뭉게뭉게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괜찮다. 시야에 보이는 곳에 인적은 없다. 연기 따위는 금세 사라질 것이다.

나는 옷을 다시 한번 턴 후 비틀거리며 바지를 입었다. 주변에 앉을 바위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아무것도 없는 곳이라 할 수 없다.

옷을 대충 입고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니, 연기를 뿜고 있는 검은 덩어리들이 보인다. 다 탄 걸까? 발로 슬쩍 밀어보려다 괜히 나중에 구두에서 뭔가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 나가 나뭇가지를 들고 돌아온 뒤 시커먼 재 덩어리들을 쑤셨다. 그러자 검은 재들이 부서지며 폭삭 주저앉으며 부서진다.

만족스럽다. 이 정도로 했으니 뭐가 나올 리는 없다. 자, 이제 남은 건 뭐지? 나는 주변을 보았다. 등유를 가져온 기름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또 뭐가 없나? 목장갑을 낀 손으로 주변을 확인했다. 혹시 몰라 바닥에 내 머리카락이 떨어진 건 없나 살폈다.

한 시간쯤 살피니 내 것인지 남의 것인지, 혹은 아내의 것인지 모를 머리카락 몇 올을 발견했다. 아직 불씨가 남은 재 속에 그것을 던져 넣고 탈 때까지 지켜본 뒤가 되어서야 기름통을 들고나왔다.

차 뒤로 돌아가 트렁크를 열고 아내 피가 고인 비닐을 빼내고, 기름통을 넣었다.

다시 부엌으로 돌아가 비닐도 마저 태우려 하다 혹시 비닐 성분이 나오면 문제가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닐을 잘 싸서 피가 흘러나오지 않게 한 다음 다시 트렁크에 넣고 차에 올라타 운전대를 잡았다.

눈앞에 보이는 붉은 양철 지붕의 집에서 서서히 연기가 줄어들고 있다. 차라리 집에다 불을 질러 버릴까? 그럼 혹시 남은 증거도 싹 태울 수 있는데.

아냐, 대형 화재가 나면 소방서에서 출동한다. 반드시 인명피해가 없는지 조사할 거야. 그럼 여기서 시신이 나올 확률이 높다. 그럼 안 된다.

나는 시동을 걸고 서서히 차를 후진시키며, 연기를 뿜는 부엌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자초한 일이야, 날 원망하지 마.’

나는 목장갑을 벗어 빈 기름통 주둥이 안으로 쑤셔 넣고 차를 출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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