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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기억-233화 (232/328)

살인의 기억 233화

17. 증거(證據)(17)

낮에 폐가에 도착했는데 어느덧 어두워지는 저녁 시간이다. 겨울이라 그런지 해가 빨리 진다. 차량 내부에 있는 아날로그 시계를 힐끔 보니 저녁 7시 40분이 막 지나고 있다.

나는 천천히 논두렁을 나왔다.

일부러 헤드 라이트도 끄고 나왔다. 낮에는 오히려 눈에 띄지 않지만 라이트를 켠 밤에 목격자가 생길 확률이 높다.

특히 아무도 발걸음 하지 않는 외딴 폐가에서 밤에 나오는 차량은 수상해 보이니까. 사업할 때 구입한 것이지만 비싼 돈 주고 산 고급 차는 역시 제 몫을 한다. 전기차도 아닌데 소음이 무척 작은 녀석이라 은밀하게 나올 때 아주 요긴하다.

비포장 오솔길을 나와 천천히 전진했다. 헤드 라이트가 없으니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육안으로 앞을 확인하며 전진해야 했다.

게다가 주변에 사람이 없는지 확인도 해야 하니 눈과 손이 바쁘다.

조수석 방향 측 창문에 멀리 떨어진 민가의 불빛이 언뜻 보인다. 잠시 차를 멈추고 민가를 주시했다. 하지만 별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다시 주변을 보니 사람 하나 없는 논두렁 길이 보인다. 하지만 산이 없고 평야 지대라 여기에 기름통을 버리고 가는 건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다.

천천히 차를 출발시키며 증거물들을 버릴 곳을 찾았지만, 결국 나는 주유소가 있는 삼거리에 나올 때까지 마땅한 곳을 찾지 못했다.

‘저 애물단지를 빨리 버려야 마음이 편해질 텐데.’

아내의 차가 아직 묘지 공원에 있다. 홧김에 뒤에 있던 안 쓰는 골프채로 머리를 후려갈겨서 내부에 피가 좀 튀었다. 외부에서 보일까?

아니, 보이건 아니건 며칠이나 차를 세워두면 누군가 분명히 신고할 것이다. 내일이나 모레 버스를 타고 내려와 아내 차를 가져갈까? 아니, 괜히 그랬다가 더 의심받으면 어쩌지?

나는 주유소가 보이는 곳에 차를 정차해 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아내보다 빨리 추모 공원에 들어가 기다렸다. 50분쯤 후에 아내가 왔고 아내 차에서 다툰 후, 나도 모르게 아내를 때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내 손에는 피가 뚝뚝 흐르는 골프채가 쥐어져 있었고, 조수석 문을 열고 밖에서 두들겨 패던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뒤늦게 정신이 들어 아내를 흔들어 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잠시 혼이 날아가 주저앉아 버렸지만, 나는 금방 정신을 차렸다.

이런 게 정신력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살길을 찾는 것. 나는 역시 사업가 체질인 모양이다.

평소 아끼던 골프채를 포장해 두었던 비닐 백을 찢어 차 트렁크에 깔고 아내 시신을 옮긴 후, 그녀의 차를 꼼꼼히 확인했다.

하마터면 내가 씹다 종이에 싸서 버린 껌을 그대로 두고 내릴 뻔했다. 아내 차이니 다른 생활 증거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나도 가끔 이 차를 타니까 말이다.

몇 번이나 차 내부를 확인한 뒤, 블랙박스에서 메모리 카드를 뽑아 챙겼다. 그러고는 아내 시신을 싣고 추모공원을 벗어났다.

아무도 보지 않고 있지만 나는 당황하고 있는 내 모습이 창피했다. 중소기업이라고 하지만 엄연히 기업의 오너였는데 이런 하찮은 문제로 일희일비하는 모습을 누가 볼까 두려워졌다.

아내를 죽인 것? 그건 그럴 수 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는 거지 뭐. 하지만 이런 일로 당황해 아무것도 못 하는 놈은 바보이다.

나는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 부동산 업자들과 가봤던 폐가들을 떠올렸다. 그래! 거기다. 거기서 시신을 태우자.

다행이다, 얼마 전에 현주가 엄마가 쓰던 풍로에 도시락을 데워 먹어보고 싶다고 해서 미리 사둔 기름통이 차에 있어서. 폐가 입구에 주유소가 있던 곳이 있으니 거기로 가서 기름을 사고 태우자.

나는 내가 했던 모든 일을 순서대로 떠올렸다. 경찰은 바보가 아니다. 철저하게 준비해 두지 않으면 나는 분명 꼬리가 밟힐 것이다.

몇 번이나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다. 어떤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나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그래, 이런 때는 아무렇지 않게 행동해야 된다.

나는 아내와 공원묘지에서 헤어진 거다. 내가 아내와 이장 문제로 싸웠다는 건 형사들이 조금만 들쑤셔도 알 수 있는 정보이다.

그래, 난 여기서도 아내와 싸운 거다. 그리고 화가 나 먼저 나와 버렸다. 그리고 남은 아내는 혼자 참배를 하다 일을 당한 거다.

나는 어떤 행동으로 자연스러움을 표해야 될까?

경찰이 제일 먼저 의심할 것은 당연히 나다. 그러니 내가 의연하게 굴어야 한다.

경찰이 좀 똑똑한 사람이라면 내 통장에서 매월 현금 500만 원이 인출되었음을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그럼 현주의 존재도 눈치채겠지.

나는 운전대를 슬며시 돌렸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행동.’

나는 아내와 싸웠다. 무척 속이 상하다.

나는 나를 위로해 줄 누군가가 필요한 상황이다.

나는 아내 몰래 외도를 하고 있다. 지금 내가 누군가를 만나는 것으로 위로를 삼는다면. 가장 자연스러운 만남은 바로 현주와의 만남일 것이다.

경찰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간통죄도 사라졌는데 바람 좀 피웠다고 그게 죄가 되진 않잖아? 살인 용의자가 되는 것보다 훨씬 나은 선택이다.

나는 주유소 앞 삼거리에서 좌회전해 홍천 IC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헤드라이트를 켜도 괜찮다. 차가 많은 도로이니까.

어두워 바로 앞만 보이는 도로에 새겨진 선들이 빠르게 내 아래로 사라지고 있다.

나는 그것이 내가 한 모든 행동들로 보인다. 빠르게 뒤로 사라지는 선들을 보며 나는 왠지 내가 오늘 벌인 일도 빠르게 사라져 갈 것이란 안도감을 느꼈다.

* * *

극심한 어지러움.

나는 운전대를 붙잡고 고개를 박았다. 다행이다. 그래도 편안한 고급 차량 운전석에 앉아 있을 수 있어서.

물론 아내 시신을 트렁크에 싣고 달리던 소름 끼치는 차량이지만 이렇게 어지러울 때 안정적인 곳에 앉아 있을 수 있는 건 행운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 십 분가량 흐른 것 같다. 눈앞이 일렁이는 현상이 점점 사라지고, 약간의 편두통이 남았지만 걷는 정도는 지장이 없어졌을 때 나는 눈을 떴다.

기억 속에서 도로를 달리던 한정수. 그의 마지막 기억에서 보였던 건물이 떠오른다.

“홍천 군청.”

놈은 홍천 군청을 우측에 두고 빠르게 액셀을 밟았다. 그리고 뒷좌석에 아직도 버리지 못한 기름통이 실려 있었다.

나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앞에 보이는 회색 주차장 벽을 노려보았다.

“홍천이 아니다.”

가장 먼저 의심할 수 있는 장소는 성현주의 집. 혹은 그 근처.

한정수의 자택은 아니다. 이미 KCSI가 이 잡듯이 뒤지고 갔으니까. 집 주변도 다 뒤졌다고 들었다.

정말 재수가 없다면 홍천에서 서울 방향에 있는 고속도로 휴게소일 수도 있다.

휴게소는 쓰레기 소각장을 자체 운영한다. 벌써 열흘이나 지났으니 쓰레기 소각장이 가동되었을 것이다. 기름통은 재활용이 가능하니, 어쩌면 따로 모아뒀을 수도 있고, 이미 재활용 업체가 싣고 가 녹여서 다른 물건을 생산했을 수도 있다.

나는 얼른 연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과장님.

“연주야, 홍천 수색대 작전 중지시켜.”

-네?

“홍천이 아니다.”

-…….

잠시 말을 잃었던 연주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럼 어디를.

홍천에서 서울 방향으로 가려면 서울 양양 고속도로를 타야 한다. 홍천 군청을 나와 서울까지 가는 길에 있는 휴게소를 수색해야 된다.

“수색대에 연락해서 서울 양양 고속도로 휴게소를 뒤지라고 해. 홍천에서 서울까지 몇 개나 되지?”

-음, 잠시만요.

검색해 보는 키보드 소리가 울리고 곧 연주 목소리가 들린다.

-홍천 휴게소, 가평 휴게소입니다.

다행이다. 두 개라면 수색대를 둘로 나누어 동시 수색이 가능할 것이다.

“중대장님들께 연락해서 두 개조로 나뉘어 동시 수색하라고 해. 쓰레기 소각장을 잘 확인하고, 재활용 쓰레기장도 보라고 해.”

-기름통과 목장갑 전부 말인가요? 하지만 쓰레기장을 뒤지면…… 기름통은 몰라도 목장갑은 너무 많이 나올 텐데 큰일이네요.

많이 나온다 해도 찾아야 된다. 그리고 더 말하면 의심받을 것이 뻔해 입을 닫았지만 한정수는 기름통 안에 목장갑을 넣었다. 즉, 기름통을 찾으면 목장갑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디서 나온 정보인가요?

“그냥 유추한 거야. 한정수가 주유소 삼거리까지 나오는 동안 지나는 모든 동선은 이미 수색을 완료했다. 삼거리 지나고부터는 인적이 많은 곳이라 아무 데나 버리지 못했을 거야. 그렇다는 건 결국 휴게소 아니면 서울까지 가져가서 처리했을 가능성이 높다.”

-음, 그건 그러네요. 알겠습니다. 바로 지시하겠습니다.

“그래, 빨리 부탁한다.”

-어디 계세요?

“한정수 차량이 주차된 골프연습장이야.”

-사무실로 오실 건가요?

“아니, 성현주의 집으로 간다. 오 선배님께 그리 오라고 전해줘.”

-아, 네. 알겠습니다.

나는 차에서 내린 후, 아직도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주차 관리인 아저씨를 보았다.

“감사했습니다, 아저씨.”

“아…… 일 다 보셨습니까?”

아저씨는 다가와 차를 살핀다. 혹시 뭐 가져가는 건 없는지 보는 모양이다. 안에 뭐가 있는지 모르시는 분이 본다고 알겠냐마는 일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뭐라고 할 이유는 없다.

스마트 키를 관리인 아저씨에게 넘긴 나는 뛰어나와 밖에 주차해 두었던 내 차에 올라타고 성현주의 집이 있는 동화동으로 향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성현주의 집. 이곳에서 뭔가를 얻어낸 건 오 선배였기에 나는 처음 가보는 것이다.

동화동에 도착해 그녀의 집 주소를 찾아 도착하니, 베이지색 빌라 앞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는 오진규의 모습이 보인다.

대강 주차를 마치고 차에서 내리자, 담뱃불을 끈 오진규가 물었다.

“저보다 가까운 곳에 계신다고 들었는데. 골프 연습장에서 오신 거 아닙니까?”

“아, 초행이라 길을 잘못 들어서요.”

“하하, 우리 과장님도 그런 실수를 하시는군요. 그런데 여긴 왜 오신 겁니까?”

나는 미리 준비해 둔 거짓말을 했다. 연주에게 말한 것과 비슷한 내용의 거짓말이다.

오진규는 내 설명을 가만히 듣더니 성현주의 빌라를 올려 본다.

“그러니까 여기도 증거물을 은닉할 장소로 볼 수 있다. 이런 거네요?”

“네, 맞습니다. 바로 올라가죠.”

내가 빌라 입구로 들어가려 하자, 오진규가 내 어깨를 붙잡는다.

“지금 집에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다. 문을 따고 들어가려면 압수수색영장이 필요한데. 잠깐만, 아무도 없다고? 만약 성현주가 한정수의 증거물을 없애러 나갔다면?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성현주는 살인에 가담하지 않았으니 그럴 리는 없는 걸까?

‘아니야, 성현주 입장에서 한정수는 자신의 생활을 계속 책임져 줄 사람이다. 룸살롱도 그만두고 나이도 꽤 든 여자다. 한정수가 감옥에 가는 건 그녀 입장에서 삶이 무너지는 것일 수도 있어. 충분히 공범이 될 수 있다.’

살인 자체에는 가담하지 않았지만 이후에 증거 은닉을 도울 수는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진다. 지금 이 순간 집을 비운 성현주가 무슨 짓을 하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빨리! 빨리 찾아야 됩니다!”

나는 몸을 돌려 내 차로 뛰려 했다. 일단 관우에게 먼저 연락해 성현주 핸드폰부터 추적할 생각이다. 그녀가 그것을 태우기 전에 잡아야 한다.

바로 그때 다시 오진규가 다시 내 옷깃을 붙잡는다. 나는 팔을 뿌리치며 말했다.

“설명은 나중에! 지금 급합니다!”

하지만 오진규는 내 옷깃을 꼭 붙잡는다. 이 아저씨가 꼭 지금 설명을 들어야 된다는 거냐?

“일단 이동부터 하고…….”

내가 그를 돌아보자, 씩 웃고 있는 오진규의 얼굴이 보인다.

“선배님……?”

오진규가 윙크를 하며 말했다.

“추적 안 해도 됩니다. 혹시나 해서 형사 둘 붙여서 24시간 감시 중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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