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234화
17. 증거(證據)(18)
“어, 나다. 지금 어디냐? 그래? 계속 추적하고 나한테 실시간으로 위치 찍어 보내. 혹시 차에서 기름통 같은 거 가지고 내리면 바로 현장 체포하고. 그 기름통이 증거다. 절대 훼손하게 두면 안 돼. 알았어?”
오진규가 전화기를 붙잡고 지시를 내리고 있다.
나는 그의 말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와, 진짜 이 사람 안 데리고 왔으면 어쩔 뻔했냐? 나는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붙잡으며 숨을 돌렸다.
오진규가 전화를 품에 넣으며 말했다.
“40분 전에 나와서 본인 차량으로 금호동 방면으로 가 금남 시장에 갔답니다.”
금호동. 거긴 왜 간 걸까? 나는 허리를 펴며 물었다.
“언제부터 감시 붙이신 겁니까?”
“인터뷰 직후부터. 혹시 이 여자가 공범이면 큰일 나겠다 싶어서 붙여놨죠.”
하, 역시 인생은 경험이다. 오진규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인력은 어디서 빼오신 겁니까?”
“하하, 대한민국에서 국가수사본부 이름으로 안 되는 건 몇 없죠. 관할 경찰서에 요청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이 사람을 수사과에 데려온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했다.
“바로 따라붙죠.”
내 차에 함께 타고 금호동 방면으로 이동하는 우리.
오진규가 붙인 형사들이 GPS로 위치를 공유해 주고 있는지 오진규가 실시간으로 방향을 지시한다.
“금남 시장에서 나와, 응봉산 방향으로 가고 있답니다.”
“응봉산…… 거기 뭐가 있죠?”
“거기는…… 팔각정이 있고, 암벽 등반하는 곳이 있을걸요?”
“그냥 공원 같은 곳인가요?”
“예, 맞습니다.”
공원에 왜 가는 거지? 증거물들을 거기 버리려고? 별로 좋은 장소는 아닐 텐데. 아닌가?
어차피 사건이 일어난 곳은 홍천. 여기는 서울이다. 증거물들을 서울까지 가지고 올라와 공원에 버릴 거란 생각을 하긴 어려우니 상관없을 것 같기도 하다.
게다가 성현주는 오진규가 자신을 찾아온 이후 불안감을 느꼈을 테니 가지고 있던 증거를 빨리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확률이 높다.
나는 운전을 하며 금남 시장을 지났다. 힐끔 옆을 보니 한정수가 홍천에서 들렀던 철물점들이 여러 개 뭉쳐 있는 상가가 보인다.
나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
“예?”
“성현주가 왜 금남 시장에 왔을까요?”
“음, 여기서 시장을 본답니다. 평소에도 가끔 오긴 하는데.”
나는 오진규의 핸드폰을 눈짓하며 말했다.
“감시 중인 형사들에게 성현주가 뭘 샀는지 물어봐 주세요.”
“아, 예. 잠시만요.”
오진규가 전화를 건다.
“어, 나다. 성현주가 금남시장에서 뭘 샀는지 봤어?”
오진규는 통화를 하다 힐끔 내 쪽을 본다.
“철물점?”
나는 뭔가 불길한 느낌에 오진규를 보았다. 그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밧줄을 사? 몇 미터짜리야?”
밧줄? 그걸로 뭘 하려고? 오진규는 몇 가지를 더 물은 후 말했다.
“아무래도 빨리 움직여야 되겠습니다.”
나는 일단 가속을 하며 물었다.
“밧줄을 샀다고 하는 것 같던데.”
“예, 밧줄과 가위를 구매했답니다.”
밧줄과 가위? 그걸로 도대체 뭘 하려고? 오진규가 빨리 가지 않는 앞차를 보고는 이를 악물며 손을 뻗어 내가 붙잡은 운전대 클랙슨을 마구 누른다.
빵!! 빵빵!!
“비켜 이 새끼들아!”
오진규가 갑자기 왜 저러지? 나는 흥분해 있는 오진규의 손을 막으며 말했다.
“선배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오진규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차선 이동해서 가죠. 앞에 차가 너무 천천히 가네.”
일단 그가 시키는 대로 차선을 이동해 천천히 가던 차를 비껴갔다.
“선배님? 밧줄과 가위가 무슨 의미인 겁니까?”
오진규가 혀를 차며 말했다.
“아마 성현주의 최종 목적지는 응봉산 공원이 아닐 겁니다.”
응봉산 공원이 아니다? 그 방향에는 그것밖에 없다. 거길 넘어가면…….
나는 지도를 떠올려 본 뒤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한강?”
오진규가 고개를 끄덕인다.
“밧줄과 가위를 샀다는 건 한강 주변에 도착해 무거운 물건에 밧줄로 묶고, 기름통을 연결해 물속에 떨어뜨리려는 것이라 유추할 수 있습니다. 밧줄이 너무 길면 수면 위로 기름통이 뜰 수도 있으니 가위로 짧게 잘라 던지겠죠.”
오진규의 추측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만약 성현주가 밧줄에 연결할 무거운 물건을 집에 있던 물건으로 가져왔다면 그녀는 한강에 도착하자마자 기름통을 던져 버릴 수도 있다. 나는 급히 액셀을 강하게 밟으며 말했다.
“꽉 잡으세요.”
오진규가 조수석 안전 손잡이를 꽉 잡고 다른 손으로 핸드폰 GPS를 보며 말했다.
“금호 삼거리에서 좌회전했습니다. 용비교! 용비교로 가는 겁니다.”
젠장, 만약 성현주가 다리 가운데에 차를 세우고 기름통을 강물로 던져 버리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물론 수중 수색대를 동원하면 될 일이지만 한강은 유속이 있는 강이다. 여성도 들 수 있는 적당히 무거운 물건을 연결했다면 유속에 휩쓸려 어디까지 떠내려갈지 모른다.
게다가 우리가 찾는 건 피해자와 가해자의 DNA가 있는 목장갑이다. 물에 젖어버리면 마지막 남은 증거물이 날아갈 수도 있다.
오진규가 즉시 전화를 건다.
“나다! 용비교 올라가면 차 뒤로 바짝 붙어! 혹시 중간에 차가 서면 바로 뛰어내려 붙잡아라! 절대 강에 뭔가 던지게 두면 안 돼!”
나는 드리프트 하듯 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해 용비교를 탔다. 가장 우측 차선을 타고 다리 중간까지 오자, 아니나 다를까 비상등을 켠 차 두 대가 보인다.
오진규가 조수석 창문을 내리고 외쳤다.
“잡아!”
급브레이크를 잡고 비상등을 켠 뒤 차에서 내리자, 성현주와 몸싸움을 하고 있는 형사들이 보인다. 그녀의 손에 밧줄로 꽁꽁 묶은 기름통이 들려 있다.
오진규가 바람같이 뛰어나가고, 나도 뛰었다. 그 순간. 나는 그 순간이 마치 영화 속 슬로 비디오처럼 보였다.
형사들에게 붙잡혀 몸부림치던 성현주가 손끝에 걸고 있던 오래된 라디오를 다리 밖으로 던져 버린다. 그리고 느슨하던 밧줄이 팽팽해진다.
“안 돼!”
다리 난간에 걸쳐 있던 밧줄이 팽팽해지며 기름통을 당기는 것을 본 나는 초인적인 힘으로 달려나갔다. 하지만 이미 늦은 것 같다. 아무리 빨라도 저걸 붙잡지는 못한다.
나는 이를 악물고 달려갔다.
쿠쿵!!
모두가 조용해진다. 실랑이를 하던 형사들과 악을 쓰던 성현주도. 달려가던 오진규와 나도 모두가 멈췄다.
지나가는 차들이 갑자기 멈춘 세 대의 차량 덕에 빵빵거리는 소리만 울리는 용비교 위. 우리는 모두 각자 다른 이유로 허탈한 웃음을 입에 걸었다.
라디오에 연결된 밧줄. 그리고 그 끝에 달린 기름통. 그것이 다리 난간에 걸려 떨어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가져온 라디오가 조금만 더 무거웠다면 기름통은 강물로 가라앉았을 것이지만 천운으로 난간에 걸려 버렸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오진규가 풀썩 쓰러진다.
“아, 씨X.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나는 빠르게 달려가 기름통부터 붙잡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오진규가 달려와 함께 밧줄을 끌어 올린다.
그리 무거운 라디오가 아니라 금세 끌어 올린 나는 숨을 몰아쉰 뒤 형사들에게 눌려 있는 성현주에게 가 수갑을 채웠다.
“성현주 씨, 당신을 춘천 살인사건 및 사체 훼손, 유기 사건의 공범으로 체포합니다.”
성현주가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른다.
“놔!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살인 같은 거 모른다고!”
수갑까지 채운 마당에 반항하며 몸부림쳐도 소용없다. 형사들이 그녀를 일으켜 세우자 독기가 가득 든 눈으로 날 노려보는 성현주.
나는 기름통을 몸으로 지키며 말했다.
“증거 은닉, 훼손 시도에 대한 공범 혐의로 체포하는 겁니다.”
“나는 살인과 관계없다고!”
“네, 증거 훼손도 공범입니다. 데려가세요.”
형사들이 내게 머리를 숙여 보인 후 그녀를 차에 태운다. 오진규가 담배를 물며 기름통을 바라본다.
“후, 이제 하나 남았군요. 기름통은 찾았으니 목장갑만 찾으면 되는 건데. 이걸 어디 가서 찾는다?”
나는 오진규의 말에 바닥에 놓인 기름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기름통 바닥에 있는 둥그스름하게 말린 검은 그림자를 보는 순간 나는 씩 미소를 지었다.
“아뇨, 이제 수색은 끝입니다.”
담뱃불을 붙이려다 만 오진규가 의문스러운 얼굴이 된다.
“네?”
나는 뒷주머니에서 라텍스 장갑을 꺼내 손에 끼며 말했다.
“바로 KCSI로 갑시다.”
* * *
잠시 후, KCSI.
자신이 직접 내게 사건을 맡아달라 부탁해서인지 목 과장님이 긴장한 눈빛으로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다. DNA 검출 결과를 확인 중인 대원도 덩달아 긴장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킨다. 그도 아는 것이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임을.
퍼센트 막대가 100을 향해 출발한다. 조금 전에 70%를 막 넘었다. 목 과장님이 검지와 엄지를 마구 비비며 말했다.
“목장갑 외부에서 피해자 김주연 씨의 혈흔이 나왔다. 100% 본인 것이 확실해. 이건 분명히 범행 시에 사용되었던 도구다. 문제는 과연 안쪽에서 한정수의 DNA가 나오냐는 것이야.”
오진규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뒤에 서 있는 날 돌아본다.
“그새 기름통 안에 장갑이 들어 있다는 것까지 보신 겁니까?”
“…….”
성현주에게 감시를 붙인 것도, 용비교 위에서 기름통을 던지는 것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오진규의 활약 덕분이었다. 하지만 오진규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애초에 성현주를 의심한 것은 맞았지만 과장님이 그녀에게 증거물이 있을 거라 말해주지 않았다면 감시하던 형사들은 그녀가 행위를 마친 후에 내게 보고했을 거다. 그녀가 무언가를 한강에 던졌다고 말이야. 그랬다면 기름통 안에 있던 목장갑에 묻은 DNA는 영영 지워졌을 거야. 외부에 묻은 혈흔은 남았겠지만 내부의 한정수 DNA는 날아갔겠지.’
오진규는 새삼스러운 얼굴로 날 바라본다.
나는 그의 부담스러운 눈빛을 못 본 체하며 목 과장님께 물었다.
“안쪽에서 뭐가 나온 겁니까?”
“미세한 각질이다.”
“그걸로 DNA 추출이 가능합니까?”
“가능해, 아주 운이 좋게도 외부와 차단된 기름통 안에 보관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만약 우리가 발견한 미세 각질이 성현주나 김주연의 것이라면 안 나올 수도 있다.”
목 과장님은 자기가 말해놓고 스스로의 입을 찰싹 때린다.
“이놈의 입이 방정이지, 퉤퉤. 못 들은 걸로 해라.”
미신이나 징크스가 있는 모양이다. DNA 확인 막대가 막 90%를 넘어가고 있다. 우리는 하던 대화를 멈추고 화면을 뚫어지게 보았다.
조용한 검사실. PC가 윙윙하는 소리를 내며 과부하를 알리고 있던 바로 그때.
목 과장님이 주먹을 불끈 쥔다.
“그렇지!”
화면 앞에 있던 대원이 만세를 부르다 커피가 쏟아진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있다.
오진규는 나를 와락 끌어안아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
“과장님! 나왔습니다! 한정수 그놈 DNA입니다!”
어린애 달래듯 내 엉덩이를 받치고 둥기둥기를 하는 오진규. 나는 민망한 마음이 들었지만 입에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화면 속에 한정수의 DNA와 99.8% 일치한다는 결괏값이 이 상황에서도 날 웃게 한다.
나는 오진규와 얼싸안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한정수. 넌 이제 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