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235화
17. 증거(證據)(19)
국가수사본부 취조실.
내 앞에 한정수가 앉아 있다. 그는 내가 아직 증거물들을 발견하지 못한 것을 알고 있지만 범죄자들이 늘 그렇듯 원인 모를 불안감에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다.
아무 말 없이 놈을 가만히 노려보길 십여 분. 놈은 손목시계를 힐끔 보고는 태연한 척 입을 연다.
“법정 구류 시간에 제한시간이 있다고 알고 있는데. 아직 안 지난 모양입니다?”
나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있지.”
“몇 시간입니까?”
“48시간.”
“그럼 이미 지난 거 아닙니까?”
“지났지.”
한정수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젖혀 의자에 편안히 기댄다.
“그럼 그만 가봐도 되는 겁니까?”
나는 가만히 놈을 노려보았다. 놈은 나의 그런 시선이 자신의 승리를 뜻하는 것이라 생각했는지 은근한 미소를 내뿜는다.
나는 뒷주머니에서 수갑을 꺼냈다. 내가 뭘 하는지 모르는 놈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건 왜요?”
딸깍.
놈의 한 손에 수갑을 채웠다.
“한정수, 당신은 지금부터 중요 용의자가 아닌, 춘천 살인사건의 범인입니다. 이 시각 이후부터 용의자 신분에서, 현행 범죄자로 변경 처우합니다.”
한정수의 눈빛이 달라진다. 아직 수갑을 채우지 않은 한 손을 붙잡으려 하자 놈이 내 손을 뿌리치며 벌떡 일어난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나는 놈을 강제하지 않고 가만히 올려보았다.
“앉으세요.”
“무슨 말이냐고 묻고 있지 않나!”
“앉으라고 했습니다.”
“이런 씨X 새끼가!”
흥분한 한정수가 난동을 부리기 시작한다.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쓰러뜨리고 테이블을 두들긴다.
“변호사 불러! 이 새끼들이 없는 증거를 만든 게 분명해!”
한정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컵을 내 얼굴로 던진다.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얼굴에 맞은 종이컵 속의 물이 흘러 내 셔츠를 적신다. 나는 물이 뚝뚝 흐르는 얼굴로 놈을 노려보았다.
“마지막이다, 앉아라 한정수.”
얼마 전의 마지막 취조에서 카메라를 의식하며 자신의 결백을 애걸복걸했던 한정수. 놈은 수갑을 차자마자 이성을 잃은 것 같다.
내 말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달려와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운 뒤 벽으로 밀치는 한정수.
“야 이 새끼야.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없는 증거를 만들어내? 내가 이거 가만있을 것 같아? 법정? 그래, 오냐. 어디 한번 해보자, 이 새끼들아. 내가 남은 재산을 다 쏟아부어서라도 반드시 법정에서 이긴다. 왜? 만들어낸 증거에는 분명히 어딘가 구멍이 있으니까!”
나는 멱살을 붙잡힌 채 벽에 부딪힌 뒤통수를 만져보았다. 그러고는 한정수를 노려보며 말했다.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현 시각부터 행해지는 행위는 모두 합법적인 부분임을 고지합니다.”
멱살을 쥔 한정수가 멍청한 얼굴이 된다.
“뭐?”
나는 멱살을 틀어쥔 놈의 손목을 꽉 잡은 뒤 말했다.
“고맙다, 먼저 공격해 줘서, 이 개 같은 새끼야.”
“컥!”
발로 놈의 정강이를 차니, 찌르는 듯한 고통으로 인해 손에 힘이 풀리는 놈.
나는 잡고 있던 손목을 비틀고 다시 한번 놈의 다리를 후렸다. 그러자 공중에서 빙글 돌아 테이블 위로 넘어지는 한정수.
하지만 나는 여전히 손목을 놓지 않고 있다.
나는 테이블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쓰러진 한정수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지금 더 공격하면 징계다. 나는 놈이 했던 방법 그대로 손목을 끌어 놈의 머리에 바싹 붙은 후 속삭였다.
“갖은 있는 척은 다 하더니, 막상 붙어보니 별거 없네? 그러니 사업이 망하지.”
고통에 신음하던 한정수의 눈이 번쩍 떠진다.
“뭐, 이 새끼야?”
한정수가 벌떡 일어난다. 손목을 붙잡고 있으니 일어나며 내 쪽으로 몸이 기운다. 나는 일부러 놈의 팔을 당기며 카메라 쪽을 보고 말했다.
“이러지 마십시오. 진정하세요.”
나는 놈을 빙글 돌려 카메라를 등졌다. 그리고 무릎으로 놈의 복부를 찍어버렸다.
“컥!”
허리가 새우처럼 굽어진 한정수. 눈을 부릅뜬 놈이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진다. 하지만 여전히 놈의 손목은 내 손에 있다.
나는 손목을 확 당겨 일부러 놈의 팔꿈치가 내 얼굴 앞을 지나가게 한 뒤 외쳤다.
“그만! 더 공격하시면 반격합니다!”
나는 잡고 있던 놈의 팔을 반대로 꺾어버린 후 엎드리게 했다. 그리고 무릎으로 놈의 등 중앙을 찍어버렸다.
“끄아아아!!!!!!”
팔을 꺾은 상태로 체중까지 실어버리자, 죽는다고 고함을 지르는 한정수. 나는 놈을 누르며 속삭였다.
“넌 고통에 비명이라도 지르지. 네 아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갔다.”
“으아아아아!!!”
고통에 겨운 몸부림. 한정수가 몸부림을 치는 것은 팔이 부러질 것 같은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원초적인 몸짓이었지만 그것은 언뜻 반항으로 비치기도 한다.
나는 일부러 몸을 뒤로 튕기며 반쯤 일어났다.
“가만있어요! 한정수 씨!”
“아, 아, 아파! 아프다고!”
“가만있으면 안 아픕니다!”
나는 아직도 한정수의 손목을 붙잡고 있다. 그리고 그의 몸부림에 맞춰 몸을 틀며 새끼손가락을 접게 만들었다. 한정수는 자신을 짓누르는 내 체중에서 해방되자 몸을 뒤로 돌리려 했다.
나는 그의 힘을 버티지 않고 그대로 옆으로 누워버렸고 새끼손가락이 접힌 채 손목을 잡혀 있었던 한정수는 내 몸에 손이 깔리며 그대로 손가락이 부러져 버렸다.
“으아아아아!!!!!”
나는 몸에 깔린 손을 힐끔 보았다. 새끼손가락이 기이한 방향으로 꺾여 있는 것이 보인다. 그제야 손목을 놓은 나는 얼른 카메라 방향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여기! 한정수 씨가 공무집행 방해를 하다 스스로 다쳤습니다! 의사가 필요할 것 같은데 빨리 불러주세요!”
한정수가 제 손을 붙잡고 바닥을 굴러다니며 비명을 질러댄다. 어지간히 아플 거다. 붙잡은 건 손목이었기에 새끼손가락뿐 아니라 손목과 손등 뼈도 상했을 테니까.
나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얼른 취조실을 나섰다. 추후 이것이 문제가 되었을 때 나는 의사를 부르기 위해 밖으로 뛰어나간 것이 될 것이다.
물론 사실과 다르다. 좀 더 혼자 아파하라고 나간 거다. 네놈 비명 소리 따위는 듣고 싶지 않다는 뜻도 되는 것이고.
취조실 문을 열고 나오자 복도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오진규가 실소를 지으며 엄지를 세운다.
“과장님이 안 하셨으면 제가 했을 겁니다.”
“…….”
“저 새끼 때문에 동원된 경찰 인력이 총 1,500명이랍니다. 와, 저런 새끼 하나 때문에 국민 세금을 얼마나 쓴 거야, 대체.”
나는 여전히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의사부터 부르시죠!”
오진규는 눈썹을 꿈틀한 뒤 복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복도 끝에 있는 CCTV를 확인한 뒤 웃는다.
“저거 수리 중입니다. 몇 시간 전에 합선으로 경비실 직원이 가져갔어요.”
“…….”
“하하, 치밀한 과장님이시네.”
나는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청장님 임기도 얼마 안 남으셨는데 괜히 사고 치고 싶지 않아서요.”
오진규가 취조실을 눈짓하며 웃는다.
“범죄자 손가락을 부러뜨려 놓으시고 사고 치고 싶지 않다고 하는 건 좀 아이러니하네요, 하하. 일단 의사는 부르겠습니다.”
불러는 줘야지. 그래도 저것도 사람인데. 오진규가 씩 웃으며 말했다.
“대신 30분만 있다 부르죠. 좀 더 고통스러워해도 괜찮을 것 같으니.”
음, 이럴 땐 이심전심으로 마음이 통하네.
* * *
몇 시간 뒤, 손가락과 손목을 넘어 팔뚝 중간까지 깁스를 한 한정수가 파리한 얼굴로 앉아 있다.
모니터실에서 치료 과정을 지켜보다 의사와 간호사가 나가자마자 다시 취조실로 들어가니 놈이 내 얼굴을 보자마자 경기를 한다.
“힉!”
회전의자를 마구 밀자, 아래에 바퀴가 달린 의자는 한정수를 태우고 벽까지 밀려간다. 나는 눈썹을 꿈틀하며 다시 카메라를 힐끔 보았다.
“한정수 씨 또 폭력을 사용하시려는 겁니까?”
한정수가 수갑 찬 손을 마구 휘두르며 고개를 젓는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나는 한정수를 가만히 노려보다 눈짓했다.
“그럼 다시 와서 앉아.”
위압적인 말투. 일부러 사용한 말투이다. 하지만 한정수는 헐레벌떡 의자를 발로 밀어 기듯이 제자리로 돌아온 뒤 정자세로 앉는다.
나는 가만히 놈을 노려보다 자리에 앉은 후 말했다.
“성현주도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
“대답.”
“네, 네!”
“성현주에게 기름통과 목장갑을 없애라는 지시를 한 적 있나?”
“…….”
“다른 손도 부러지고 싶지? 발가락으로 밥 처먹고 싶어?”
한정수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마구 젓는다.
“아닙니다!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럼?”
“저, 저는 그저 집에 이것 좀 보관해 달라고. 나중에 찾아간다고 했습니다.”
“그 말만 했어?”
“예.”
“아내 죽인 이야기는?”
한정수는 이미 성현주가 체포되었다는 말에 기름통과 목장갑이 발견되었음을 눈치채고 포기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안 했습니다…….”
음, 어찌 보면 당연하다. 사람 죽인 게 자랑스러운 일은 아닐 테니 어디 가서 말하진 못했겠지.
“성현주는 네가 김주연을 죽였다는 사실을 몰랐다. 물론 후에 경찰이 찾아간 뒤 알아냈겠지. 사건 당일이 네가 자신을 찾아온 날과 같은 날이란 걸 알아낸 성현주는 기름통과 목장갑이 사건의 중요 증거일 수 있다고 생각해 유기하려 했다. 맞나?”
한정수가 침을 꿀꺽 삼켰다.
“혀, 현주가 그랬습니까?”
아, 이 새끼는 자초지종을 모르지. 나는 말 없이 놈을 노려보기만 했다.
내 눈빛에 겁을 먹은 한정수가 말했다.
“제, 제가 뭘 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성현주에게 한정수는 매우 중요한 사람이다. 일 안 하고 먹고 놀게 해주는 고마운 인간이었겠지.
그가 감옥에 가면 그녀는 살기 위해 다시 일을 해야 했을 것이다. 그것이 살인의 증거까지 유기할 이유인지는 잘 모르겠다. 사람들은 나름의 가치대로 움직이는 법이니까.
성현주에게 일 안 하고 놀고먹는 삶은 누군가의 죽음을 모른 척하면서까지 지켜야 될 가치였던 모양이다.
성현주는 중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나는 한정수에게 증거물들을 차례로 보여주었다. 어떤 설명도 없이 사진과 DNA 결과들만 쭉 나열해 놓고 놈을 노려보았다. 자신이 남긴 증거물들이 모조리 나온 것을 본 한정수가 한숨을 쉬며 눈을 감는다.
“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
“자수로…… 처리해 주시면 안 됩니까?”
“…….”
한정수가 카메라를 힐끔 본 뒤 몸을 앞으로 내민다.
“제 계좌 보셨겠지만 아직 남은 돈이 꽤 됩니다. 경찰 직업이 박봉으로 알고 있는데. 자수로 바꿔만 주시면 제가…….”
나는 한정수의 눈을 노려보며 말했다.
“아가리 똥내 나니까 치워.”
“…….”
내가 주먹을 꽉 쥐자, 화들짝 놀라 물러나는 한정수. 나는 놈을 노려보며 말했다.
“올해 51세라고 했지?”
“예? 아, 예…….”
자리에서 일어나 놈을 내려본 나는 이를 갈며 말했다.
“칠순 잔치는 빵에서 한다고 생각해라, 이 돈밖에 모르는 짐승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