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인의 기억-236화 (235/328)

살인의 기억 236화

17. 증거(證據)(20)

고시원 뒤 포장마차.

내 잔을 채워준 강혁 아저씨가 물었다.

“검사가 뭐래?”

술을 받고, 아저씨 잔을 채워준 내가 말했다.

“일단 30년 때릴 생각인데, 법정에서 20년으로 확정할 것 같답니다.”

“음, 일단 세게 때리긴 해야지.”

강혁 아저씨가 씩 웃으며 술을 마신다.

“법정 놀음도 말이야. 장사와 비슷해.”

“장사?”

“그래, 인마. 너 물건값 깎아봤냐?”

“에이, 저 그런 짓 안 해요.”

“그런 짓? 이놈 봐라? 월급 얼마나 한다고. 쥐꼬리만 한 월급 받고 사는 주제에 온 돈을 다 주고 물건을 산단 말이야?”

“저 대형 마트만 가는데요. 거기도 깎아줘요?”

“흠, 거긴 안 되지. 재래시장은 안 가봤냐?”

“가보긴 했는데 깎아본 적은 없어요.”

강혁 아저씨가 손바닥을 비비며 말했다.

“자, 네가 재래시장에 가서 생선을 산다고 가정해 보자. 아줌마 이거 얼마예요? 하고 물었더니 만 원이라고 했다고 치자. 어쩔 거야?”

“만 원 내면 되죠.”

“아, 이 답답한 새끼가! 물건값 깎는다니까!”

나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생선 한 마리 값이 만 원. 엄청 비싸네. 단지 예시겠지만. 음, 뭐 농어나 민어같이 고급 어종이라고 생각해 보자.

상인이 시장에 내놓은 물건에는 유통 마진이 붙는다. 즉, 어선에서 경매로 물건을 산 사람이 시장까지 옮겨주는 비용. 그게 얼마인지는 모른다. 대충 유추해 보면…….

‘대충 유통 마진 10%라고 치고, 상인이 남길 액수가 10%. 그럼 80% 가격에 어선에서 경매로 떼온다는 건데.’

유통 마진은 상인이 지불한 금액이다. 그럼 물건값의 90%가 상인이 물건을 떼어온 원가일 것이다. 상인도 뭘 남겨야 하지 않나? 그 사람도 집에 처자식이 있을 텐데.

“한 9천 5백 원에 해달라고 말해봐야죠. 솔직히 그것도 하기 싫지만.”

강혁 아저씨가 나무젓가락으로 내 머리를 콩 친다.

“이 녀석아. 그렇게 사니까 돈이 줄줄 새지. 이놈의 자식이 마흔 먹어서도 고시원에서 살래? 그렇게 살면 평생 가난을 못 벗어나는 거야, 인마.”

“몇백 원 아껴서 언제 집을 사요?”

“이놈이! 백 원도 못 아끼는 놈이 백만 원은 무슨 수로 아껴!”

“아 진짜, 잔소리는.”

강혁 아저씨가 다리를 꼬고 설교하기 시작한다.

“인마, 네 목표가 오백 원 깎는 거면, 천 원 깎아달라고 하는 거다.”

“에? 그럼 상인은 뭐가 남아요?”

“상인을 왜 네가 걱정해, 인마. 상인도 자기 입장에서 깎아줄 수 있는 최대치를 말하겠지. 천 원 깎아달라고 하면 기겁을 할 거다. 그럼 1원도 안 남을 테니까.”

“제 말이요.”

“그럼 상인이 처음엔 안 판다고 할 거다. 그리고 눈치를 보지. 이 사람이 그냥 가려나? 좀 꼬셔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야.”

“그래서 결국 오백 원을 깎는 건가요?”

“그래.”

“그게 왜 법정 공방과 비슷해요?”

강혁 아저씨가 혀를 차며 말했다.

“법정은 법률을 가지고 흥정을 하는 거야. 형량 칠 때가 제일 그렇지.”

“설마 판사님과 흥정한다는 말씀이세요?”

“미쳤냐?”

“그럼요?”

“상대 변호사.”

“아.”

“변호사는 말이야. 사건을 수임할 때 완전 무죄를 주장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 하지만 1심이 끝나기 전에 직감한다. 아, 이 사건은 완전 무죄로 판결이 불가능하구나. 그럼 자기 고객과 입을 맞춘다. 원래 이런 사건의 형량은 10년인데 5년 선에서 형량을 맞춰보겠다. 뭐 이런 식으로.”

“음.”

“변호사는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재판장에 나오겠지. 검사는 10년의 형량을 때릴 것이니 갖은 이유를 다 갖다 붙여서 5년에 맞추려고 온갖 준비를 해왔을 거야.”

“그래서요?”

“그런데 법정에 딱 갔더니 담당 검사가 갑자기 20년을 때리는 거지.”

“그게 마음대로 돼요?”

“당연히 안 되지. 그렇지만 일단 때려보는 건 가능해. 그 후는 판사가 판단하는 거고.”

“음.”

“그럼 변호사는 멍해진다. 20년? 왜 20년이지? 설명을 요구할 거야. 검사도 준비를 잔뜩 해왔지. 형량 늘리기에 제일 좋은 건 악랄한 범죄와 그를 뉘우치지 않고 있는 범죄자의 태도이니 그걸 지적할 거야.”

“그래서요?”

“자, 그럼 어떻게 되느냐? 다음 법정이 열릴 때 벌써 공기가 달라져. 범죄 저지르고도 대가리 빳빳하게 들고 있던 놈이 머리를 푹 숙이고 나 반성 중입니다 하는 얼굴로 앉아 있지. 변호사에게 지적을 당했을 테니까. 이미 거기서부터 검사가 주도권을 쥔 거야.”

“그렇다고 20년이 판결되지는 않을 텐데.”

“그래. 10년도 어려울 수 있어. 하지만 결과를 보면 변호사가 이야기한 5년보다는 훨씬 많은 형량을 받게 된다. 이게 바로 머리 좋은 검사들이 법정에서 흥정하는 방법이다.”

“음.”

그렇구나. 강혁 아저씨는 참 다방면에서 박식한 것 같다. 그때 아저씨가 내 머리를 또 젓가락으로 내려치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 새끼야! 법정에서도 하는 짓을 네놈이 뭐라고 안 해! 오늘부터 재래시장 다녀! 매일 흥정 연습하는 거다! 알았냐?”

“아씨! 우리 집에서 재래시장 멀어요!”

“그래도 가, 인마!”

“아저씨나 많이 해요!”

“이 자식이!”

그때 포장마차 주인아저씨가 무뚝뚝한 얼굴로 다가와 서비스로 주는 야채 샐러드 접시를 테이블에 놓는다. 싸우다 아저씨의 등장에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는 우리.

주인아저씨는 둘을 번갈아 보다 돌아서며 말했다.

“보기 좋네.”

아저씨는 짧은 말만 하고 돌아서 가버린다. 갑자기 대화의 맥이 끊기자 적막이 흐른다.

조금 전까지 열이 받아 있었는데 주인아저씨의 말을 듣고 보니 어쩐지 기분이 좋아진다. 뭐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 같은 그런 느낌으로 보였던 걸까?

슬그머니 강혁 아저씨를 보니 아저씨도 입맛을 다시며 약간 계면쩍은 얼굴이 되어 있다. 괜히 어색해진 나는 궁금하지도 않은 질문을 던졌다.

“재래시장 자주 가세요? 혼자 사실 텐데 집에서 반찬 직접 해 드시나 봐요?”

강혁 아저씨가 술잔을 들다가 내 질문에 힐끔 날 보더니 잠시 눈을 뒤룩거린다. 뭐지? 거짓말할 때 나오는 버릇인데 저거.

“아니, 나 쿠X 로켓 프레시 시키는데.”

“…….”

강혁 아저씨가 술을 들이켠 후 웃는다.

“혼자 사는 영감이 무슨. 요즘 인마 도시락이 얼마나 잘 나오는데.”

“뭐야! 그럼 왜 나만 재래시장 안 간다고 뭐라고 한 거예요?”

“푸하하!”

“아오!”

얼굴이 빨개졌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다. 꼭 아빠와 장난을 치고 있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아저씨와 껄껄 웃으며 술잔을 기울이길 한 시간. 아저씨는 거나하게 취해 자기 허벅지를 탁 치며 어두운 서울 밤하늘을 보았다.

“내 임기도 이제 3개월 남았네.”

“…….”

경찰청장의 임기는 2년. 이제 아저씨는 은퇴해 경찰이라는 직분에서 벗어나게 되신다.

“나가면 뭐 하고 사실 거예요?”

“몰라.”

“3개월 남았는데 아직도 대책이 없어요?”

“연금 있잖아, 연금.”

“그거 얼마 안 나오지 않아요?”

“미친놈아. 나 청장이다. 차관급 연금 받을 텐데 뭘.”

“그게 얼마인데요?”

“한 달에 한 이백?”

“헐, 겨우? 내 월급보다 작네요.”

“미친, 나 일도 안 하는데 먹여 살려주면 감사하게 생각해야지.”

강혁 아저씨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있는 듯하다. 한참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던 아저씨가 웃으며 말했다.

“은퇴하면 흥신소나 할까? 너 나중에 나한테 정보 좀 줘야 된다?”

“헐, 바람피우는 부부 뒷조사나 하러 다니시게요? 경찰청장 출신이?”

“킬킬, 웃길까?”

“개가 웃을 일이죠, 그건.”

“낄낄. 하~ 그럼 뭘 하고 산다?”

“뭘 하고 사는 것도 문제지만 남은 3개월 몸 사리고 계세요. 떨어지는 낙엽도 피하시고.”

“내가 말년 병장이냐?”

“말년 병장보다 더하죠. 병장은 2년 복무한 놈이고. 아저씨는 30년도 넘게 근무했는데.”

“후후, 그런가?”

“아주 조용히 계시다가 평화롭게 은퇴하시는 겁니다.”

“킬킬, 나답지 않네. 그래, 그러마. 도경이 네가 이제 몇 살이지?”

“이제 해 바뀌었으니 서른일곱이죠.”

“헐, 코흘리개 꼬맹이 놈이 벌써 서른일곱이나 먹었어?”

“언제까지 코흘리개 소리 하실 거예요? 저 국가수사본부 과장입니다, 과장.”

“낄낄, 인마. 내 눈에는 언제나 어린애야.”

“후.”

은퇴를 앞둔 늙은 경찰. 언제나 든든해 보였던 아저씨가 오늘따라 작아 보이는 건 착각일까?

나는 문득 아저씨가 걱정되었다. 남자는 일을 그만두면 급격히 늙는다고 하던데. 아저씨도 그런 건 아니겠지? 아저씨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다 보니 얼마 전에 읽었던 기억 생각이 난다.

물어볼까? 아니, 아저씨 기억을 읽었다고 하면 기분 나빠하실 수도 있는데. 그 묘비 속의 그 여자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아저씨는 자신을 가만히 보고 있는 날 힐끔 보고는 물었다.

“뭐 할 말 있어?”

“…….”

“남자 놈이. 할 말 있으면 해라.”

“음, 그게.”

바로 그때 품 안에서 전화가 울린다. 전화를 꺼내 보니 연주 이름이 써 있다.

“잠깐만 전화 좀.”

“어.”

소주를 한잔 입에 털어 넣고 전화를 받은 나는 취기가 돈 목소리로 말했다.

“어, 연주야.”

-과장님. 오늘 청장님 만나신다고 하셨죠?

“응, 지금 만나고 있어. 맨날 있는 포차. 올래?”

-과장님, 술 많이 드셨어요?

“음, 한두 병? 왜?”

-과장님, 문제가 생겼어요. 저도 퇴근했다가 급하게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이에요.

눈이 번쩍 뜨였다. 설마 한정수 이 새끼 검찰 송치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지? 아냐, 그럴 리가 없다. 빼도 박도 못할 증거를 보유하고 있으니까.

“무슨 일인데?”

나는 전화를 하며 강혁 아저씨를 보았다. 술에 취해 계시지만 평생 경찰로 살아온 아저씨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음을 눈치채고 날 주시하고 있다.

전화기 너머로 연주의 긴장된 목소리가 들려온다.

-단양 사건 기억하시죠?

단양?

“장진수 사건 말이야?”

-네.

당연히 기억한다. 내가 종로 경찰서 강력 3반에 부임하고 처음 맡은 사건인데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게다가 그 사건은 지금껏 내가 맡아온 사건 중 가장 엽기적이고 잔인한 사건이었다.

“그게 왜? 설마 또 다른 시신이라도 나온 거야?”

장진수는 이미 잡혔다. 새로운 시신이 나오면 새로운 재판이 열리고 놈의 형량이 늘어나는 선에서 사건은 종결이다.

수사할 일이 거의 없으니 국가수사본부가 나서기보다는 담당 검사가 직접 사건을 지휘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내 담당이었으니 검사가 날 불러 인터뷰 정도는 하겠지만 특별히 귀찮을 일은 없을 텐데 왜 문제가 생겼다고 하는 걸까?

잠시 말을 아꼈던 연주가 입을 연다.

-과장님.

“응, 말해.

-장진수가 탈옥했답니다.

“…….”

순간 머릿속의 사고가 정지됐다.

“……뭐?”

-방금 영현 선배에게 연락이 왔어요. 장진수가 부산교도소에서 탈옥을 했답니다. 국가수사본부로 사건이 다이렉트 배당됐어요.

“…….”

나는 전화기를 든 자세로 얼음처럼 굳었다.

한참이나 그 자세로 굳어 있던 나는 어느 순간 얼음을 깨고 나오듯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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