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241화
18. Jailbreak(탈옥)(5)
잠시 후, 교정 시설 내 신축 성당 건축 현장 앞.
수사를 위해 문을 열어둔 담벼락 앞에 선 나는 관우와 함께 현장을 살폈다.
관우가 장진수가 버리고 간 쇠창살과 동일한 물건을 구해와 땅을 파기 시작한다. 하지만 꽁꽁 얼어붙은 땅은 쉽게 파지지 않는다.
몇 번이나 낑낑대며 땅을 파던 관우가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말했다.
“겉 표면이 얼어 있기는 한데, 안쪽은 부드럽습니다. 겉만 부수고 나면 속을 파는 건 금방 했을 겁니다.”
관우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재며 땅을 판다.
하지만 이 실험은 애초부터 성립할 수 없다. 사건을 재현하려는 사람과 실제 탈출하는 사람 간에는 감정적 간극이 존재한다. 인간은 간절할 때 초인적인 힘을 내기도 하기에 같은 조건의 실험으로 시간을 예측하는 것은 어렵다.
관우는 한 시간 40분이 걸려 장진수가 파낸 땅과 비슷한 깊이와 폭을 가진 구덩이를 파냈다. 놈보다 무려 30분이나 더 걸린 것이다.
또한 호리호리한 몸매의 관우도 구덩이를 통해 밖으로 빠져나가는 건 무리다. 담장 아래 깔려 낑낑거리며 몸을 빼내려고 노력하는 관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중, 나는 의외의 인물을 보았다.
저 멀리 입구 쪽에서 커다란 가방을 짊어지고 오는 중년 남자. 나는 그를 보자마자 얼른 달려가 말했다.
“목 과장님? 부산까지 직접 오셨습니까?”
목 과장님이 서울에서 직접 내려오실 줄이야. 그저 이쪽을 담당하고 있는 대원 중 경험 많은 친구 한 명 보내주면 될 것을.
목 과장님은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으며 빙긋 웃는다.
“네 녀석에게 신세 진 게 어디 한두 개여야 말이지. 이렇게 해서라도 빚 좀 까자, 응?”
“하하…….”
“어디 있어?”
목 과장님이 도착하자마자 증거물을 찾는다. 이미 범인이 누구인지 아는 상황이기에 증거물을 조심해서 다룰 필요는 없다. 지문을 감식하거나, 혈흔을 분석할 이유가 없는 증거물이었기 때문에 봉투에 담아 구석에 던져놨었다.
“저기요.”
목 과장님은 아무렇게나 놓인 증거물을 보고 실소를 짓는다.
“감히 KCSI 과장 앞에서 증거물 보관을 이따위로 해놓는다고?”
“…….”
“농담이다, 인마.”
목 과장님은 눈을 부라리다 씩 웃으며 증거물 봉투를 든다. 가만히 잘린 단면을 살피던 과장님은 턱을 쓸며 말했다.
“자세한 건 3D 스캔을 해봐야 알겠지만, 일단 육안으로 보기에 이걸 자른 건 톱이다.”
톱. 그건 관우도 예상했던 것이다. 하지만 목 과장님은 전문가답게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주신다.
“우리는 그저 뭉뚱그려 톱이라고 지칭하지만 톱이라는 놈은 종류가 꽤나 많다. 날교환 톱, 등대기 톱, 양날 톱, 실톱, 목심 전용 톱, 반달 톱.”
역시 목 과장님. 과장님은 돋보기로 잘린 단면을 유심히 바라보시다 말했다.
“이건 줄 톱이다. 확실해.”
줄 톱?
“줄 톱이라면 손잡이 끝에 ‘ㄷ’ 자 모양의 지지대가 있고 가운데 얇은 실톱이 있는 것 말입니까?”
목 과장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단면 끝을 만진다.
“그런데 단면이 매우 거칠어. 자, 여기 봐라.”
목 과장님이 단면을 보여주신다. 솔직히 난 봐도 모르겠지만 표면이 거칠다는 것 정도는 알겠다.
“이게 뭘 의미하는 겁니까?”
“한 번에 자른 게 아니라는 의미지.”
그게 끝이야? 당연히 한 번에 못 잘랐겠지. 30분에 한 번씩 순찰을 도는데. 그때는 자는 척을 했을 것 아닌가?
목 과장님은 내 표정을 보고 씩 웃는다.
“좀 기다려.”
뭘 하려고 그러시는 걸까? 잠시 후 부산 KCSI 대원들이 큰 기계를 짊어지고 뛰어오는 것이 보인다. 목 과장님은 그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다 눈짓한다.
“여기서 바로 한다. 기기 세팅해.”
대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여기서 말입니까? 바닥이 불안정해서 가능할지 모르겠는데.”
목 과장님이 눈썹을 꿈틀대며 대원을 째려보자 화들짝 놀란 대원이 얼른 기계를 세팅하기 시작한다.
장갑을 낀 목 과장님이 스캐너 같아 보이는 기계 위에 쇠창살을 올리고 프로그램을 가동하자, 레이저가 쇠창살에 쏘아지며 빙글빙글 돈다.
나는 가만히 작업을 지켜보다 물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아까 3D 스캔 해본다고 했잖아.”
“아.”
“기다려.”
목 과장님은 스캔 결과를 기다리며 허리를 편다. 그러다 아직도 담장 밑에 깔려 나오지 못하고 있는 관우를 한심한 눈빛으로 보며 말했다.
“좀 도와줘라, 저러다 오행산에 갇힌 손오공 꼴 나겠다. 머리에 금 고아라도 씌워주랴?”
관우는 아까부터 도와달라고 하고 싶은 모양새였지만 차마 목 과장님과 심각한 이야기 중인 내게 도와달라 말도 못 하고 낑낑거리고 있었다.
내가 관우 발을 잡고 아래로 당겨주자 쑥 빠져나온 녀석은 한참 동안 눌려 있던 가슴을 붙잡고 아파한다.
“으아, 뒤지는 줄 알았네.”
목 과장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하여간 PC 앞에서는 천재 같은 녀석인데 현장만 나오면 아직도 저 모양이네. 쯧쯧.”
관우는 불만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차마 과장님께 대들지는 못하고 고개를 숙인다.
목 과장님이 화면을 뚫어지게 보다 손가락을 튕긴다.
“나왔다.”
화면 속, 3D로 정밀 분석이 완료된 쇠창살이 도형으로 보인다. 잘린 단면을 확대해 다시 프로그램을 돌리자, 화면 속에 숫자가 카운트되고 있다.
점점 올라가는 숫자를 보며 턱을 쓸던 목 과장님이 카운트가 멈추자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53이라…….”
같이 화면을 보고 있었지만 이 숫자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53이 무슨 의미입니까?”
“잘린 단면에 거칠기를 확인하는 프로그램인데. 줄 톱으로 자르다 멈추고 다시 자르기 시작했을 때 나오는 단면의 층을 말하는 거다.”
“53회 멈췄다 자르기를 반복했다는 건가요?”
“그럴 수도 있고, 53일을 잘랐을 수도 있지.”
53일을 잘랐다고? 아무리 쇠창살이라고 하지만 지름 1.5㎝의 가는 창살이다. 이런 걸 자르는데 53일이나 걸렸다고? 목 과장님은 화면을 바라보다 문득 손을 든다.
“멈춰.”
“예?”
“쇠창살 맨손으로 만진 사람 없지?”
우리는 없다. 사실 만져도 괜찮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습관적으로 피했다.
“저희는 없는데 이쪽 직원들이 만졌을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러세요?”
목 과장님이 KCSI 대원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루미놀(luminol).”
이 현장에 필요 없다 생각했는지 준비 없이 있던 대원이 급히 약품과 산화제를 섞어 스프레이에 넣어 가져온다.
과장님은 잘린 단면 끝에 약품을 뿌리더니 가만히 지켜본 뒤 자기 옷으로 창살을 덮는다. 옷 속에 숨어 창살을 보는 기괴한 행동을 하는 과장님.
멀뚱히 서 있던 나는 이상한 행태를 보이는 과장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 옷을 벗은 과장님이 쇠창살을 노려보며 말했다.
“사건 브리핑을 못 들었는데. 자세히 말해봐. 시간 순서대로 아는 것만.”
이해되지 않았지만 상대는 목 과장님. 이유 없이 이런 걸 물을 분이 아니다.
목 과장님은 사건 브리핑을 자세히 들은 후 질문한다.
“검방 했는데 도구 발견 못 했다, 이거지?”
“예, 제가 잘 몰라서 그런데 줄 톱이란 게 그렇게 작습니까?”
“최소 사이즈가 20㎝일 거다.”
“그렇죠? 그 사이즈의 톱을 교정 직원들이 발견 못 했을 리가 없지 않나요?”
목 과장님이 내게 손짓하며 말했다.
“이리 가까이.”
목 과장님이 관우에게 손을 내민다.
“관우야, 너 롱 패딩 좀 벗어라.”
관우가 영문 모를 얼굴로 긴 패딩을 벗어주자, 목 과장님이 그것으로 쇠창살을 덮고 내게 손짓한다.
“들어와.”
옷 속으로 들어오라는 건가? 설마 이상한 취미가 있을 분도 아니고. 나는 의아한 얼굴로 일단 과장님이 시키는 대로 옷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옷으로 덮인 어둠 속에서 눈을 크게 떴다. 눈앞에 있는 쇠창살이 푸른빛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혈흔이다.”
혈흔? 갑자기 혈흔이 왜 나와? 이걸로 누굴 찔렀다는 말인가? 목 과장님은 패딩을 벗어 관우에게 던져 준 뒤 대원에게 쇠창살을 넘긴다.
“혈흔 분석해. 장진수 DNA와 비교하면 된다.”
“예, 알겠습니다.”
대원이 얼른 혈흔 분석을 하기 위해 쇠창살을 들고 차로 뛰어간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질문을 던졌다.
“장진수의 DNA와 비교한다고요? 저거 장진수가 자른 건데 자기가 스스로를 찔렀을 리도 없지 않습니까?”
목 과장님이 씩 웃으며 팔짱을 낀다.
“쇠창살 같은 날카로운 물건으로 사람을 찌르면 말이다. 적어도 3㎝ 이상 혈흔이 묻는다. 하지만 저건 안 그래. 잘린 단면의 끝 부분에 0.5㎝ 미만의 혈흔이 묻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데요?”
목 과장님이 팔짱을 낀 채 날 물끄러미 바라본다.
“저게 만약 장진수 피라면 말이야. 저 놈은 쇠창살을 자르다가 손을 다친 거야.”
아, 난 또 뭐라고. 수사에 필요한 정보는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목 과장님의 다음 말을 듣고 몸을 굳힐 수 밖에 없었다.
“줄 톱은 손잡이가 있지. 날과 손의 거리가 꽤 멀다는 뜻이다. 자르다 빗겨 나가도 손을 다칠 염려는 거의 없지. 그런데 단면에 혈흔이 남았다? 그건 이놈이 손잡이 없는 톱을 직접 손으로 잡고 썰었다는 뜻이다.”
손잡이 없는 톱? 가만. 장진수는 검방 시 도구를 들키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손잡이가 없는 작은 줄 톱이었다면 어떨까? 아냐, 톱은 날만 있다고 해도 충분히 흉기이다. 꽤 긴 날붙이를 교정 직원들이 못 봤을 리는 없다.
목 과장님이 날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또 하나. 손잡이 없는 날을 직접 잡고 잘랐다고 해도 저렇게 끄트머리에 혈흔이 남는 경우는 거의 없어. 저건 말이다.”
목 과장님이 엄지와 검지를 서로 맞대며 말했다.
“이렇게 작은 톱 조각을 쥐고 자른 거다. 제대로 쥐지를 못해 자르다 부딪히고 놓치기를 반복하며 손에 상처가 난 거다. 그 와중에 혈흔이 묻은 것이고. 그렇기에 최대 53일이나 걸려 쇠창살을 잘라낸 거야. 두 개니까 아마 일정 기간 동안 두 개를 나누어 잘랐겠지.”
작은 줄 톱 조각. 나는 목 과장님 밝혀낸 도구에 대한 진실에 머리가 트이는 듯 했다.
“관우야.”
“예?”
“목공소 가서 관리 대장 다시 확인해.”
“어. 아까 다 보셨는데. 뭘 다시 볼까요?”
“최근 육 개월 내 작업 중 파손되어 폐기한 줄 톱.”
“예?”
관우는 잠시 이해가 되지 않는 얼굴로 나와 목 과장님 대화를 복기하다 손뼉을 탁 친다.
“아! 작업 중에 파손되어 폐기한 줄 톱에서 조각을 얻어 잘랐다! 그래! 그겁니다! 작은 조각이니 이놈이 걸리지 않고 소지할 수 있었던 거군요!”
상황을 이해한 관우가 얼른 목공소 방향으로 뛰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목 과장님이 신나서 달려가는 관우를 보며 실소를 짓는다.
“저놈 저거 저럴 때보면 CCTV 분석하는 천재와 거리가 멀어 보이지 않냐? 나사 하나 빠진 놈 같아. 킬킬.”
관우가 얼마나 도움 되는 녀석인데. 아, 물론 과장님도 내 무기 중 한 명이지만. 그때 멀리서 차에 있던 분석 장비로 혈흔 분석을 하고 돌아오는 대원이 손을 흔들며 소리치는 것이 들린다.
“과장님! 맞습니다! 장진수의 혈흔 DNA 구조와 일치합니다!”
목 과장님이 씩 웃으며 날 바라본다.
“OK. 이제 다음 현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