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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기억-249화 (248/328)

살인의 기억 249화

18. Jailbreak(탈옥)(13)

충신동 1341-11 2층.

장진수가 체포되기 전까지 살았던 바로 그곳이다. 살인마의 집. 그곳은 누구에게나 기피하고 싶은 장소일 것이다.

하지만 삶의 무게에 떠밀린 사람들은 싫어도 이곳에서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여고생과 함께 일단 1층 주인 세대의 거실로 들어온 나는 오밤중에 날 들여보내 준 아이를 위해 빈집을 살펴주었다.

아이는 은근히 무서웠는지 내가 닫힌 방문을 열어볼 때마다 흠칫하며 내 뒤로 숨는다. 당당해 보이고 싶었지만 사실 이 아이도 무서웠던 모양이다.

나는 모든 방문을 열어보고 베란다까지 확인한 뒤 말했다.

“안심해도 돼.”

“후.”

한숨을 쉬는 아이. 그러고 보니 난 이 아이 이름도 모르는구나.

“너 이름이 뭐야?”

“윤정이요.”

“성은?”

“고.”

“그래, 윤정아. 너 늘 열두 시 넘어서 집에 오지?”

“네.”

“잠은 몇 시쯤에 자?”

“음…… 집에 와서 샤워하고, 학원에서 배운 거 복습하고 나면 새벽 세 시쯤에 자요.”

“세 시? 너 학교는 몇 시에 가는데?”

“여덟 시요. 그나마 학교가 가까워서 일곱 시에 일어나도 돼요.”

일곱 시에 일어나는 아이가 새벽 세 시에 잔다. 두 시에 끝나는 날도 있다고 했으니 그날은 평소보다 더 잠이 모자랄 것이다.

하루 평균 네 시간도 못 자는 아이. 언뜻 불쌍한 마음이 들었지만 사실 나도 그런 인생을 살았다. 경찰대는 입학도 장난 아니지만, 거기서 수석을 하기 위해 퍼부어야 하는 노력도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윤정이가 소파에 앉아 고개를 떨구며 한숨을 쉰다.

“아저씨도 이렇게 살았어요?”

“…….”

“이게 사는 건가 싶네요. 솔직히 언니, 오빠들 보면 좋은 대학 나온 사람들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 하고 사는 사람들이 더 행복해 보이던데.”

아이 말이 옳다. 8, 90년대라면 모를까 요즘은 대학 졸업장이 필수가 아닌 시대이다. 전문직도 많이 생겼고, 사람과 대면하지 않고 혼자 일해 생계를 꾸릴 수도 있는 시대이다. 물론 여전히 대학 졸업장이 필요한 직업도 많다.

하지만 옛 어른들 말씀처럼 사람 구실 하려면 대학 나와야 된다는 시대는 아닌 것이 확실하다.

윤정이가 날 힐끔 보며 물었다.

“아저씨 경대 출신이죠?”

“응.”

“우리 반에도 경대 지원하는 애들 있는데.”

“그래?”

“후, 전 경찰이 그렇게 공부 잘해야 되는 직업인지 몰랐어요. 전교 20등 안에 못 들면 선생님이 지원서도 안 써준다고 하던데.”

“보통 그렇지.”

“그 정도면 스카이를 가지, 왜 경대를 지원하나 몰라. 어차피 공무원인데.”

문득 중학교 시절, 강혁 아저씨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스카이를 나오든, 경대를 나오든, 혹은 듣보잡 대학을 나오든 말이다. 네 꿈이 회사에 소속되는 거라면 네 미래는 하나야. 국내 1, 2위 기업을 다니던 놈이나, 중소기업을 다니던 놈이나 그놈들의 미래는 단 하나다. 치킨집 사장. 그런데 왜 열심히 살아야 되느냐? 나중에 치킨집을 차리는데 동네 구멍가게 같은 곳 차릴 건가, 청담동 한복판에 치킨집 빌딩을 올릴 거냐, 그 차이인 거지.’

아저씨 생각이 나니 웃음이 나온다. 아저씨는 정말 꼰대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사람 같다. 나는 윤정이를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

“공부하기 싫어?”

윤정이는 눈을 흘기며 답한다.

“공부하기 좋은 사람도 있어요?”

“난 좋았거든.”

“희한한 사람이네.”

“하하, 그렇긴 하지. 공부하기 싫으면 다른 거 하고 싶은 건 있고?”

“…….”

“응? 다른 거 하고 싶은 거 없어?”

“없어요.”

나는 빙긋 웃으며 윤정이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그것부터 찾아. 하고 싶은 걸 찾아야 네가 공부를 해야 할지, 다른 걸 해야 할지 결정할 수 있으니까. 꼭 공부해야 되는 건 아니다. 그 시간 아껴서 다른 걸 해야 네 인생이 풍성해질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마냥 공부하기 싫다고 해서 하고 싶은 일도 없는데 시간을 흘리는 건 잘못된 선택이겠지.”

“휴.”

“꿈 없어?”

“음, 돈 많은 백수?”

“그건 이미 글렀고.”

“에이씨.”

“하하.”

내 주변에는 경찰 아니면 범죄자만 있다. 이런 일반인 학생과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니 영혼이 정화되는 기분이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아이 고민 상담을 들어주고 싶지만 나는 이 오밤중에 여고생 상담이나 하자고 여기 온 것이 아니다.

나는 표정을 굳힌 후 다시 물었다.

“네가 밤늦게 집에 왔을 때, 혹시 2층에서 무슨 소리가 난 적 없어?”

윤정이 얼굴이 굳는다. 뭐지? 뭔가 있는 건가? 윤정이는 이걸 말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하는 고민을 하는 얼굴이다.

“괜찮아, 편하게 말해도 돼.”

“음…….”

윤정이는 검지로 관자놀이를 긁적이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게, 엄마한테 말했는데 그게 제가 무서워서 괜히 헛것이 들리는 거라고.”

뭔가 있구나.

“뭔데?”

“아저씨는 내 말 믿어줄 거예요?”

“당연하지. 그때도 네 말 믿어줬던 거 기억 안 나?”

“음.”

윤정이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며칠 전이었어요. 그날은 학원이 좀 늦게 끝나서 새벽 두 시쯤에 집 앞에 도착했는데. 기분이 좀 이상했어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상했어?”

윤정이가 책가방 주머니에서 무선 이어폰을 빼 보여주며 말했다.

“원래 집에 올 때 이걸로 음악을 듣거든요?”

“응.”

“근데 그날따라 집에 오는 길에 기분이 이상해서 음악을 껐어요.”

“그래서?”

“소름이 돋고, 인기척 같은 게 느껴져서 자꾸 뒤를 돌아보고 왔는데 아무도 없었고요.”

“계속해.”

윤정이는 자기 팔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런데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도대체 뭐가 이상한 걸까? 하는 생각에 평소와 뭐가 다른지 생각해 봤는데…….”

윤정이가 고개를 들며 날 바라본다.

“아무 소리도 안 들렸어요.”

“응?”

“아무 소리도 안 났다고요.”

“그게 뭐?”

윤정이가 아랫입술을 내민다.

“아저씨 이런 골목길에 살아본 적 있어요?”

“음, 이런 곳은 아니지만 나도 고시원 살아서.”

“에? 경대 나왔는데 고시원에 살아요?”

“어, 돈 없어서 그런 건 아니고 전세 자금 모으려고. 월세 살면 돈 모으기 힘드니까.”

“와, 대박. 난 경대 나오면 바로 대궐 같은 집에 사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고. 다시 이야기해 봐. 아무 소리도 안 나는 게 뭐?”

윤정이가 침을 꼴깍 삼키며 말했다.

“새벽 시간이라 사람들은 다 자지만, 이런 골목길엔 사람만 사는 게 아니에요. 고양이들도 살고, 가끔 떠돌이 개도 있고. 1월이지만 겨울철 벌레들도 울어요.”

1월에도 벌레가 있나?

“그래서?”

윤정이가 무서운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그날은 정말 아무 소리도 안 났어요. 너무 고요한 골목길이라 무서운 느낌이 들었고. 전 빨리 걸어서 집까지 뛰어왔어요. 집에 오는 동안 꼭 귀가 먼 사람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더 무서웠어요.”

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야생동물이나 벌레들이 울지 않는 이유. 그건 한 가지다. 바로 주변에 사람이 있다는 뜻. 포식자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숨을 죽이는 야생의 본능이다.

“그래서? 집에 바로 들어갔어?”

“네, 너무 무서워서 안방 가서 엄마 아빠 자는 거 보고 나서 안심을 했어요. 문도 잠그고, 창문도 다 잠그고. 그리고 샤워를 한 뒤에 방에 갔어요. 기분도 이상하고 그래서 잠이 너무 모자라 그런가 싶어서 그날은 복습 땡땡이 치고 그냥 침대에 누웠는데 아까 그 기분이 떠올라서 잠이 안 왔어요. 한참 뒤척이고 있는데…….”

“있는데?”

윤정이가 다시 침을 삼킨다.

“2층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어요.”

2층? 장진수가 살던 그 2층 말인가?

“그래서?”

윤정이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자기 손가락을 깨문다.

“이불 뒤집어쓰고 덜덜 떨었어요. 저 집에 살던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아니까.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귀를 기울였는데 문 여는 소리 같은 게 났어요. 온몸에 소름이 돋고 다리에 힘이 풀려서 엄마한테 가지도 못하고 이불만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조금 후에 다시 문 열리는 소리가 났어요. 그러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요.”

과연 윤정이가 들었던 소리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아니, 정말 2층에서 난 소리가 맞을까?

나는 조금 전 집에 처음 들어올 때 자기 집을 수색하는 내 모습을 보고도 겁에 질려 있던 아이 모습을 떠올렸다. 어쩌면 겁에 질린 아이가 다른 집에서 들리는 소리를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윤정이가 마른세수를 하며 말했다.

“한숨도 못 자고 아침에 아빠한테 말했더니 감옥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집에 오냐고. 재수 없는 소리 자꾸 하지 말라고 욕만 먹었어요, 휴.”

나는 윤정이를 가만히 바라보다 말했다.

“그 소리. 2층에서 난 거 확실해?”

윤정이가 날 흘겨보며 말했다.

“거봐요. 아저씨도 안 믿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지. 감옥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밖을 돌아다녀요. 2층 비밀번호는 우리 가족이랑 그 살인마밖에 모르는데.”

잠깐. 뭐라고?

“비밀번호를 안 바꿨어?”

윤정이는 이 부분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지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끄덕인다.

“그게, 마지막에 온 경찰 아저씨가 혹시 나중에 재수사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아무것도 건드리지 말라고 해서.”

아니, 아무리 공권력에 협조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다손 쳐도 2년 전에 있었던 일인데 아직도 비밀번호를 안 바꿨다고? 윤정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집 나가면 새 세입자가 직접 바꾸게 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나는 거실 천장을 올려 보았다. 장진수가 2층 집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다. 비밀번호는 아직 바뀌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비밀번호가 뭐야?”

“올라가게요?”

“한번 봐야 할 것 같아서.”

“#2437*이요.”

아무것도 아닌 현관문의 비밀번호. 하지만 나는 그 숫자를 듣자마자 그것의 의미를 눈치챘다.

“그건…… 장진수가 직접 만든 비밀번호인가?”

“그렇죠. 그 새끼가 저 집 들어올 때 입력한 거니까. 왜요?”

#2437*. 처음 발견된 살해 현장. 둥그런 원통 속에 담긴 충격적인 노인의 시신 뒤의 벽에 남겨져 있던 누가복음 24장 37절을 뜻하는 숫자다.

“너 2층 올라가 본 적 있어?”

윤정이는 소름 끼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네, 과학수사대 옷 입은 아저씨가 엄마랑 저 데리고 올라가서 원래 세 주기 전에 집 구조와 현재 구조 사이의 차이를 알려달라고 해서 갔었어요.”

구조 변경을 통해 증거물 은닉을 할 수 있다는 가정하에 한 수사였던 모양이다.

“그게 언제야?”

“그 새끼 잡힌 뒤에.”

“마지막으로 조사 나온 건?”

“제가 올라갔던 게 마지막 조사였어요. 그 후엔 아무도 안 왔는데.”

“음.”

나는 윤정이를 가만히 바라보다 말했다.

“미안한데. 한 번 더 올라가 줄 수 있을까?”

“…….”

무서워하는 아이에게 하기 미안한 부탁이다. 하지만 윤정이는 저 집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뭔가 변한 것이 있다면 윤정이가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윤정이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어차피 아저씨 올라가면 여기 혼자 남아 있는 게 더 무서울 것 같네요. 같이 가요. 나도 내 눈으로 아무도 없는 걸 보면 좀 안심하고 잘 수 있겠죠.”

윤정이는 씩씩하게 걸어 신발을 신는다.

“하긴, 감옥에 있는 놈이 어떻게 여기 있겠어요? 아빠 말이 맞긴 하지. 괜히 겁먹는 걸 거예요. 제가 간이 좀 작아서.”

“…….”

미안하다, 말 못 해줘서. 그놈 지금 탈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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