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250화
18. Jailbreak(탈옥)(14)
아무것도 모르는 윤정이는 교복 차림으로 밖으로 나와 외부 계단을 오른다. 무슨 의미가 담긴 번호인지 모르고 기계적으로 현관문을 따는 윤정이.
하지만 직접 문을 열기는 겁나는지 번호를 누른 뒤 날 바라본다.
“뒤로 물러나 있어.”
다행히 총을 가져왔다. 아직 퇴근한 건 아니라 소지하고 있기를 잘했다. 내가 총을 뽑아 들자, 겁먹은 얼굴의 윤정이가 주춤주춤 내 뒤로 오며 속삭였다.
“아무도 없는 거 아니었어요?”
“…….”
“총은 왜 꺼내요? 그거 진짜 총이죠?”
나 경찰인데 그럼 장난감 총이겠냐? 나는 팔로 윤정이를 슬쩍 뒤로 밀어 보낸 후 문을 열었다. 불이 모두 꺼져 있어 어둠이 아가리를 벌린 것 같아 보이는 2층.
나는 총을 겨누고 서서히 안으로 진입했다. 하지만 창문으로 들어오는 옅은 가로등 불빛 말고는 보이는 것이 없다.
그때 갑자기 내부에 불이 켜진다. 놀라 총구를 겨누고 뒤를 돌아보자, 놀란 윤정이가 화들짝 놀라며 양손을 든다.
“제, 제가 켰어요!”
아, 윤정이는 이 집 구조를 알고 있지. 나는 재빨리 앞을 보며 총구를 겨눈 후 빠르게 달려 화장실 문부터 열었다.
오래 비어 있어 바닥이 말라붙은 화장실. 변기 속의 물도 물때가 끼어 테두리가 남아 있다. 다시 뛰어나가 베란다 문과 방문을 열었지만 아무도 없다.
나는 자세를 풀고 천천히 총을 허리춤에 집어넣고 윤정이를 보았다. 그런데 아이 상태가 이상하다.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내 하체 쪽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
나는 일단 아이 시선이 닿는 곳을 바라보았다. 뽀얀 먼지가 쌓여 있는 바닥. 주변에는 별로 문제가 있어 보이는 것이 없다.
“윤정아? 왜 그래?”
윤정이가 눈을 부릅뜨고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킨다.
“바, 바닥.”
응? 바닥에 뭐? 먼지 밖에 없…… 나는 윤정이가 가리키는 바닥을 자세히 보았다. 2년이나 사람이 오지 않아 뽀얗게 쌓인 먼지들. 그 위에 내 발자국들이 나 있다.
윤정이는 아직 신발장 앞에 서 있기에 내 발자국만 있어야 할 이곳. 하지만 발자국은 내 것뿐이 아니었다.
나는 급히 자세를 낮추고 다른 발자국이 난 부분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최근에 생긴 발자국이다.’
윤정이가 주춤거리며 물러난다. 목소리가 떨리는 아이가 울먹이며 말했다.
“진짜…… 진짜 여기 누가 들어왔던 거예요? 그날 내가 들은 게 진짜였어요?”
“…….”
만약 이곳에 침입한 사람이 장진수였다면? 그놈은 여길 왜 왔을까? 자신을 체포되도록 만든 아랫집 사람들을 해하기 위해 온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곳에서 뭔가 찾으려 했던 것이다.
그때 윤정이의 핸드폰이 울렸다. 고요한 곳에서 갑자기 울리는 핸드폰 소리는 마치 벼락이 치는 듯하다. 우리 둘 모두 깜짝 놀라 서로를 바라보았다.
윤정이가 자기 핸드폰이란 걸 눈치채고 얼른 전화를 꺼내더니 액정을 내게 보여준다.
“엄마 전화. 받아도 돼요?”
아직 안 주무셨구나. 하긴 애가 이 시간에 들어온다는 걸 알고 있으니 확인 전화를 하려고 기다린 모양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윤정이가 전화를 받고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는다.
“엄마! 지금 집에 형사님 와 있어! 그때 우리 집 왔던 그 형사님! 그래! 내가 지난번에 2층에서 무슨 소리 들렸다고 했잖아! 지금 형사님과 2층 올라왔는데 바닥에 발자국이 있어! 진짜 여기 누가 왔었다고! 그러니까 내가 그때 말한 거 진짜라고! 아빠는 나한테 짜증만 내고 진짜!”
윤정이가 엄마와 통화를 하는 동안 나는 집 안을 살폈다. 장진수의 집은 매우 간소하다. 미니멀리즘을 실천하고 사는 사람 같은 느낌이랄까?
1인용 싱글 침대와 책상, 책장과 옷장이 이 집 가구의 전부이다. 가전제품은 냉장고와 TV, 전자레인지, 그리고 베란다에 있는 세탁기 정도이다.
집은 약 18평쯤 되어 보이는데 워낙 가구가 없으니 집이 엄청 넓어 보인다.
물론 이 집 구조가 왜 이런지는 알 만하다. 놈은 옆집에서 살인을 하기 위해 빈 거실 가득 약품이 든 통을 저장해 두었을 것이다.
지금은 증거물들이 모두 회수되어 비어 있지만 원래 이 빈 공간을 채우고 있었을 살인 용품들을 떠올리니 소름이 돋는다.
이놈은 왜 여길 온 걸까? 꽤 많은 책들이 꽂혀 있는 책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지만 뭐가 달라진 건지 전혀 모르겠다. KCSI에 가면 당시 현장 사진이 남아 있을 테니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다.
그때 윤정이가 내 팔을 건드린다.
“아저씨.”
“음?”
“엄마가 바꿔달래요.”
“…….”
그래, 새벽에 갑자기 남의 집에 들이닥쳤는데 설명이라도 해야지. 게다가 여긴 어린 딸 혼자 있는 집이니까.
“여보세요.”
-형사님? 진짜 그때 그 형사님 맞아요? 우리 애가 거짓말하는 거 아니고?
“맞습니다, 어머님. 그때 윗집 사는 사람 계약서 보여주셨던 그 형사입니다.”
-아이고, 또 무슨 일 났어요? 우리 지금 지방에 있는데.
“지방 어디 계십니까?”
-여기 대구인데. 시아주버님이 혼자 사시는데 등산하다 허리를 다쳐서 꼼짝도 못 하거든요. 당분간 여기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나는 전화를 들고 윤정이를 보았다. 장진수가 이 집에 왔었다. 부모님은 없고 고등학생 아이 혼자다. 장진수가 언제 또 이 집에 올지 모른다.
나는 더 이상 이 일을 비밀로 할 수 없다고 느꼈다.
“어머니. 제가 설명을 드리려면 상부 허가가 필요합니다. 10분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네?
“10분만 기다려 주시면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아…… 네.
“윤정이 바꿔 드리겠습니다.”
나는 윤정이게 핸드폰을 내밀며 말했다.
“통화하고 있어. 아저씨는 밖에서 잠깐 전화 좀 하고 올게.”
“네.”
나는 밖으로 나와 계단 아래의 작은 마당으로 내려갔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새벽 세 시에 가까워진 시간. 이 시간에 전화를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만 지금은 할 수 없다.
전화 수신음이 네 번쯤 가니 상대가 갈라진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음…… 도경이냐?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장영훈 본부장님이다.
“본부장님, 죄송합니다. 주무셨습니까?”
-어, 그래 괜찮다. 말해.
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짤막하게 말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본부장님이 말했다.
-그러니까 네 생각은 엠바고(embargo) 풀고, 공개수사로 전환해야 된다?
경찰 입장에서는 쉽지 않은 결정이다. 수없는 압박에 시달리게 될 테니까. 하지만 그걸 숨기자고 일반인의 피해를 감수할 순 없다.
“예, 여기 아직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살인마가 오가는 바로 그곳에. 이들을 보호하려면 정보공개가 필요합니다.”
-음…….
본부장님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일단 거기 사람들에게 알리는 건 내 선에서 허락한다. 다만 엠바고 해제 건은 내일 간부 회의 소집해서 안건으로 삼은 후에 결정할 수 있을 것 같구나.
“네, 부탁드립니다.”
-보호프로그램 가동해 줄까?
“예, 부탁드립니다.”
-알았다, 30분 내에 출동시켜 주마.
“감사합니다.”
나는 다시 2층으로 올라가려 계단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2층에서 전화기를 든 채 날 바라보고 있는 윤정이와 눈이 마주쳤다. 다 들은 모양이다. 아이 손이 덜덜 떨리고 있다.
나는 2층으로 올라가 손을 내밀었다.
“전화.”
윤정이가 움찔하며 급히 전화기를 내민다.
“어머니, 접니다.”
-예, 형사님.
“장진수가 탈옥했습니다.”
-…….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아닐 수 없다. 어머니는 순간 말을 잃어버렸다.
“아직 언론에 공개되기 전입니다. 공개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비밀유지를 부탁드립니다. 윤정이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30분 안에 집을 보호할 경찰들이 파견될 겁니다. 그때까지 윤정이와 함께 있다가 인계하고 돌아가겠습니다.”
-혀, 형사님! 저, 정말 그 살인마가 탈옥했어요?
“……예. 최선을 다해 쫓고 있습니다.”
-부, 부, 부탁해요! 빨리 잡아주세요!
“예, 비밀 유지 부탁드립니다.”
-알았어요! 윤정이 잘 좀 부탁드려요! 저 내일 바로 올라갈게요.
“네, 알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고 윤정이를 보았다. 잔뜩 겁에 질린 아이는 말문이 막히는지 눈동자를 흔들며 날 바라보고 있다.
경찰이 파견되어 이 집을 지킨다면 윤정이는 안전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있는 아이가 과연 잠을 잘 수 있을까?
나는 한숨을 쉬며 물었다.
“친구 집에 가 있을 만한 곳 없어?”
“……이, 이 시간에 어딜 가요.”
“휴.”
나는 머리를 긁었다. 좁은 고시원에서 둘이 잘 순 없다. 아무리 아이라도 여고생과 한 방을 쓰면 의심이나 받겠지.
“오늘은 아저씨 집에서 자라. 난 사무실 가서 잘 테니까. 내일은 걱정하지 말고. 경찰들 쫙 깔리고 나면 제아무리 살인범이라도 가까이 올 생각 못 할 테니까. 엄마도 내일 오시기로 했고.”
“…….”
나는 내키지 않아 하는 윤정이를 데리고 내가 사는 고시원으로 와 키를 쥐여준 뒤 말했다.
“미리 말해두고 갈 테니까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복도 끝에 사서 아저씨한테 말하면 돼. 고시원이니까 시끄럽게 하지 말고. TV 볼 거면 볼륨 2 이하로 하고 보고. 알았지?”
“아저씨는 사무실 가서 자게요?”
“어, 그래야지.”
“난 괜찮은데. 혼자 있는 게 더 무섭고.”
“내가 안 괜찮아, 인마. 자라, 갈 때 키는 사서 아저씨 주고 가고.”
“네…… 고맙습니다.”
녀석. 처음 봤을 때는 철없는 여중생이었는데 몇 살 더 먹었다고 고맙다는 인사도 할 줄 아는 아이가 되었구나. 나는 윤정이를 안심시키려 웃어준 뒤 사무실로 갔다.
* * *
“과장님? 여기서 잤어요? 집 놔두고 왜 여기서 자요?”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피곤해서 씻지도 않고 그대로 소파에 뻗었던 나는 날 깨우는 소리에 눈을 가늘게 떴다.
출근을 한 연주가 의아한 얼굴로 날 바라보는 것이 보인다.
“아…… 몇 시야?”
“여덟 시요.”
“후.”
“무슨 일 있어요?”
“다들 출근하면 이야기하자.”
10분 뒤, 오진규와 관우가 출근을 했다. 모두 회의실로 몰아넣은 뒤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하자, 오진규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그 새끼가 그 집에 놓고 온 뭔가를 가지러 왔다는 건데.”
관우가 볼펜을 쥔 손을 들며 물었다.
“KCSI가 몇 번이나 뒤집어놓고 간 곳인데 범행에 쓸 뭔가가 남아 있을 리가 있나요?”
연주가 턱을 괴며 말했다.
“범행 도구가 아니라 자신에게 소중한 무언가를 가지고 갔을 수도 있지. 추억이 담긴 물건이나.”
관우가 실소를 짓는다.
“아니, 탈옥한 놈이 고작 자기 추억 담긴 물건을 가지러 온다고? 시간이 아주 남아도나?”
과연 그 물건이 무엇일까? 뭘 가지러 온 걸까? 아직은 알 수 없다. 나는 제일 먼저 연주에게 지시를 내렸다.
“강, 절도 사건 보고된 거 없어?”
“지난밤에는 없었습니다.”
“좋아, 계속 지켜보고. KCSI 연락해서 행랑으로 당시 장진수의 집에서 찍은 사진 좀 보내달라고 해줘.”
“예, 과장님.”
“기다리는 동안 연주는 그 집 가서 현재 사진 찍어오고. 바뀐 부분 확인해.”
“네.”
“관우가 사진이나 영상으로 바뀐 부분 찾는 건 귀신이니까 도와.”
관우가 경례를 하는 시늉을 하며 알았다는 신호를 보낸다. 오진규가 나서며 물었다.
“단양의 본가도 확인해야 되겠죠?”
“예, 단양 경찰서 지원 요청해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아! 과장님. 그 택시기사. 아침에 도착했습니다.”
“좋아요, 그쪽은 제가 만나보겠습니다.”
“예, 준비시키겠습니다.”
나는 팀원들을 바라보며 손뼉을 한번 쳤다.
“살인자가 탈옥을 해 밖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아직 살인사건 보고는 없지만 사람을 죽이고 11년이나 은폐한 놈이니 벌써 살인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제2, 제3의 피해자를 막기 위해 총력을 동원해 추적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