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254화
18. Jailbreak(탈옥)(18)
언뜻 이해되지 않는 처사이다. 아저씨가 잘못한 게 뭐라고.
하지만 이게 강혁 아저씨다. 경찰청장이 피해자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사과한다. 어떻게 보면 책임감 있는 어른이 나서서 직접 사과하는 좋은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언론은 그런 식의 기사를 쓰지 않을 것이다. 청장이 사과했다는 것은 경찰이 과오를 인정한 것이고, 우리나라 경찰 전체를 물어뜯으며 여론 몰이를 할 것이다.
기사가 얼마나 팔리는지에 목숨을 건 기자들은 아니면 말고 하는 심정으로 마구 기사를 써 갈길 테고 아저씨는 그것을 오롯이 혼자 견뎌내야 할 것이다.
-불명예 해임? 괜찮다. 연금 같은 거 안 받아도 된다. 하지만 도경아. 잘 들어. 책임자는 책임을 지기에 책임자인 거다. 책임을 질 수 없는 자는 책임자 자리에 앉아서는 안 돼.
“……예, 아저씨.”
-나는 대한민국 경찰의 책임자다. 어느 시골의 말단 순경이 한 짓도 모두 내 탓이다. 잘한 것도, 잘못한 것도. 모두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다. 알았냐?
“예.”
-책임은 전부 내가 진다. 그러니 너도 맡은 일만 열심히 해. 그리고 병원 꼭 가고.
마음속에서 아저씨에 대한 존경심이 솟구친다.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 오랜 세월 동안 아저씨를 믿고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응? 뭐가?
“그냥.”
-싱거운 새끼.
아저씨가 그런 경찰이라. 그런 사람이 이 나라에 있다는 것이. 그것이 고맙다. 하지만 내 입으로 말하기에 너무 오그라든다. 그런 말은 마음속에서만 할 생각이다.
아저씨와 몇 마디를 더 주고받고 전화를 끊자, 금세 연주와 오 선배가 들어와 장갑 낀 손으로 편지를 내민다.
“여기.”
나는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개봉해 주세요.”
연주가 얼른 전화를 들며 말했다.
“KCSI에 연락하겠습니다.”
이번 편지에서도 뭔가 미세 증거가 나올 수 있으니 당연하다. 오진규가 핀셋으로 조심스럽게 편지를 개봉해 열어본다. 나는 그의 옆에 서서 이번에도 자필로 쓰여진 놈의 편지를 보았다.
첫 번째 편지는 단 여덟 줄이었지만 이번 편지는 꽤나 길다.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고리대금하는 자가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게 하시며 그가 수고한 것을 낯선 사람이 탈취하게 하시며
그에게 인애를 베풀 자가 없게 하시며 그의 고아에게 은혜를 베풀 자도 없게 하시며
그의 자손이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게 하소서
여호와는 그의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의 어머니의 죄를 지워 버리지 마시고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그들의 기억을 땅에서 끊으소서
그가 인자를 베풀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여 죽이려 하였기 때문이니이다.
중얼거리며 편지의 앞 구절을 읽어본 오진규가 인상을 쓰며 중얼거린다.
“이거…… 성경 구절 같은데.”
장진수는 살인 현장에 누가 복음 24장 37절을 남겼던 놈이다. 아니, 가톨릭 성경이니 루카 복음이 옳겠다.
그를 움직이는 것은 잘못된 신앙에서 비롯된 어긋난 신념. 이 자식은 아직도 그것을 버리지 못한 것 같다.
오진규가 날 돌아보며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성경구절 같기는 한데. 진짜 성경에 이런 섬뜩한 글귀가 있습니까? 이건 저주에 가까운 것 같은데.”
어린 시절, 수녀님 무릎에 앉아 성경 말씀을 들을 때 나도 저 구절을 들은 적이 있다.
“시편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Jesus. 성경에 이런 구절도 있군요. 세상에나.”
지금 중요한 건 성경에 이런 잔인한 저주의 글귀가 있다는 사실이 아니다. 놈이 왜 이 구절을 여기 적었느냐 그것이 문제이다.
“친절을 사랑과 감사로 답하지 아니하고 증오로 갚는 자들에 대한 경고이며 하느님을 조롱한 원수들에게 벌을 내려달라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복수를 하기보다는 기도를 하는 선택을 한 사람의 악장(樂長)이라고 볼 수 있죠.”
수녀님께 들었던 말씀 그대로를 말해주니 오진규가 입맛을 다신다. 종교 쪽은 문외한인 모양이다.
하긴 나도 보육원이 성당에 딸린 곳이라 어릴 때부터 접해 아는 것이지 사실 종교에 별 흥미는 없는 사람이다.
나는 편지의 하단 부분에 있는 본론을 눈으로 읽었다.
불멸의 춤사위는 아직 추지 못했는데
가장 빛나는 별이 되기 전에 방향을 잃은 배의 선장은
마음속의 불길을 삭이며 하루하루 버틸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얻었을 때
내 마음의 불길이 바람을 타고 빨려 들어갔습니다.
참혹한 밤과 이별하고
희망에 가득한 아침을 맞이한 그날.
몇 번을 뒤돌아봐도
돌아오지 않는 그림자.
하찮은 눈물이 그림자에 가리울 때
나는 그때가 기억나 버렸습니다.
나와 함께 편지를 읽던 오진규가 눈썹을 일그러뜨린다.
“지금 이 새끼가 스무고개를 하자는 거야, 뭐야. 이게 무슨 선문답 같은 개소리야?”
이 편지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걸까? 일단 성경 구절은 원한에 사무친 시인이 하느님께 올리는 기도이다. 상대를 벌해달라는 내용이다.
“불멸의 춤사위는 아직 추지 못했다.”
아직 못한 일이 있다는 뜻이다. 가장 빛나는 별. 이건 아무도 따르지 못할 예술 작품을 남겼다 생각하는 자아가 투영된 말.
별이 되기 전에 방향을 잃은 배의 선장이란 것도 아직 못한 일이 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마음속의 불길을 삭이며 버텼다는 건 수감되어 더 이상 일을 저지를 수 없는 자신의 신세 한탄일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얻었다는 말. 이건 톱 조각일 거다. 그의 입장에서는 그가 그리 믿고 따르는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자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것을 얻는 순간 마음속의 불길이 일어 바람을 타고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는 뜻이다.
“참혹한 밤과 이별하고 희망에 가득한 아침을 맞이한 그날…….”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날. 톱 조각을 얻은 그날부터 장진수의 참혹한 밤은 희망으로 가득 찼던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말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몇 번을 뒤돌아봐도 돌아오지 않는 그림자…….”
의역으로 생각해 보면 누군가 죽임을 당했거나, 이미 죽은 사람. 장진수가 그리워할 누군가 있다는 뜻. 그리고 장진수는 톱을 얻는 순간 복수를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왜? 사람을 열셋이나 죽인 놈이 왜 아직 원수를 내버려 뒀을까? 발견된 시신 중 누군가는 원수의 시신이 되어야 말이 맞다.
놈이 죽인 열셋의 사람 중 남자는 자신의 부친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여자. 원수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부모밖에 없는데.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오진규는 내 중얼거림을 가만히 듣다 다시 편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니까…… 이 살인마 새끼가 복수할 대상이 있는데 미처 그 사람을 죽이지 못하고 감옥에 들어온 것을 한스럽게 생각하다가 톱 조각을 얻은 후 복수를 꿈꿨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는 거네요. 음, 앞뒤가 들어맞기는 한데…….”
오진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수사 혼선을 주기 위해 일부러 이런 편지를 보내고 있는 게 아닐까요? 우리가 시간 낭비 하기를 가장 바라고 있는 놈이 이놈이니 충분히 신빙성 있다고 보는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장진수는 편지를 통해 내게 힌트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건 놈의 말일 뿐이지 않습니까? 말만 그리해 놓고 실제로는 혼란을 주기 위해 보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뇨, 장진수는 그런 놈이 아닙니다.”
“…….”
나는 오진규를 바라보며 말했다.
“장진수는 자신의 범행 일체를 고백했습니다. 제가 놈이 시신을 숨긴 장소를 발견해 낸 것은 맞지만 자백이 아니었다면 본인의 범행임을 밝혀내지 못했을 수도 있었던 사건입니다. 저는 그에게 게임을 제안했고, 거기서 이겼습니다.”
오진규가 한숨을 쉬며 다시 편지를 본다.
“게임에 졌을 때 거짓을 말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고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 놈이다. 이거군요. 하, 미치겠군.”
“우리가 모르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을 겁니다.”
“그건 아마 놈의 유년 시절 이야기일 확률이 높겠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간을 힐끔 보았다.
“지금쯤 관우가 단양에 도착했을 겁니다. 우리도 내려가야 할 것 같군요. 유년 시절에 숨겨진 이야기라면 단양에 단초가 있을 테니까.”
“후, 또 출장이군요. 바로 준비하죠.”
우리 말을 듣고 알아서 단양에 갈 준비를 하고 있는 연주. 나는 가방을 싸고 있는 연주를 만류하며 지시를 내렸다.
“내려가는 건 오 선배와 둘이 간다. 연주는 여기서 계속 실시간 사건 보고 확인해 줘. 힌트는 단양에 있지만 장진수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건 서울이다. 놈은 지금 서울에 있을 확률이 높아.”
연주는 같이 못 내려가 서운한 얼굴이었지만 내 말이 옳다 생각했는지 다시 가방을 내려놓는다.
“네, 과장님. 운전 조심하시고요. 편지는 사진으로 남겨둔 후에 파일로 보내 드릴게요. 후에 KCSI에 보내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 * *
두 시간 후, 단양.
2년 전의 일이지만 바로 어제 있었던 일같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나는 관우가 찾아간 장진수의 본가에 도착해 차에서 내렸다. 오진규는 처음 와보는 살인자의 본가를 물끄러미 보며 휘파람을 분다.
“휘익, 을씨년스러운 주택이네요. 몇 년이나 비어 있었습니까?”
“적어도 13년 이상 비어 있었을 겁니다. 물론 가끔 장진수가 와서 관리를 했던 것 같지만 거의 버려진 주택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인가와 많이 떨어져 있네요. 아! 저기가 그 지하실 입구인 모양이군요?”
장독대가 치워져 있고, 밑으로 내려가는 입구가 열려 있다. 미리 내려온 관우가 조사 중인 모양이다.
미리 단양경찰서에 지원을 요청해 집을 수색했기에 입구 주변에 순경 두 명이 서 있다. 24시간 감시 명령이 떨어진 모양이다.
신분증을 보여준 나는 순경들에게 물었다.
“경위 한 명 들어갔죠?”
“예! 두 시간 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래, 수고해요.”
두 시간? 관우는 사진으로 실금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내려갔다. 그런데 내려간 지 두 시간이 된 지금도 아직 안 올라오고 있다? 왜일까?
우리는 관우가 안을 환하게 밝혀 두어 시야에 전혀 지장을 받지 않는 상태로 지하실로 내려갔다.
2년 전. 처음 이 계단을 내려갔던 때가 떠오른다.
혼자 이 집을 수색하다 장독대 아래의 지하 공간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총을 들고 시커먼 지하실로 내려갔었다.
그리고 지하실에서 전기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켰을 때 충격적인 모습으로 원통 안을 떠다니는 장진수의 부모님 시신 두 구를 발견했었다.
2년 전의 사건이지만 아직도 그 장소에 남은 싸늘한 한기. 나는 옅게 올라오는 소름을 참으며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계단 반대편 벽에 붙어 낑낑대고 있는 관우의 뒷모습이 보인다.
“관우야?”
벽을 붙잡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관우가 돌아보며 어색하게 웃는다.
“죄송합니다, 너무 오래 걸렸죠? 그렇다고 여기까지 내려오실 것까지는 없는데, 하하.”
이게 오래 걸린다고 내려온 건 아니지만 왜 오래 걸리는 거지? 나는 관우 곁으로 가 벽을 보았다. 손톱도 끼울 수 없는 작은 실금에 손가락을 박아 넣으려고 애쓰는 관우.
“안 열려?”
“하, 이렇게 여는 거 아닌 것 같죠? 두 시간 내내 뒤졌는데 도저히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분명히 이 사각형 안에 공간이 있는 것 같은데요.”
음, 비밀 공간이 서랍장처럼 쉽게 열릴 리가 없긴 하다. 돌아보니 오진규가 지하실 내부를 살피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장진수는 어떻게 이 공간을 컨트롤하는 걸까?
이 방 안에 그 비밀이 있다.
그리고 그 비밀을 푸는 열쇠는 내 기억 속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