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256화
18. Jailbreak(탈옥)(20)
나는 오진규에게 장진수의 학창 시절을 아는 이를 수소문해 인터뷰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관우는 본가에 남아 있다가 KCSI 대원들과 새로 발견된 비밀 서랍장 주변을 정밀검사하라는 지시를 내린 후 홀로 급히 서울로 올라왔다.
쌍문동 보육원에 도착하자 이미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난 밤이 되었다. 나는 일단 성당 뒤편의 보육원으로 들어갔다.
보육원 문을 열자, 언제나처럼 저녁을 먹고 거실에 모여 TV를 보는 아이들 모습이 보인다. 두 분 수녀님께서는 이 시간이면 주방에서 아이들 간식을 준비하고 계시리라.
주방 쪽으로 가자, 아니나 다를까 오븐 앞에 쪼그리고 앉아 쿠키가 잘 익었는지 확인하고 있는 로사 수녀님의 뒷모습이 보인다.
“수녀님.”
로사 수녀님이 돌아보셨다가 생각지도 못한 손님의 방문에 반가운 얼굴로 달려오신다.
“어머나, 도경아!”
얼른 달려와 내 손을 덥석 잡는 로사 수녀님.
“무슨 일이야, 늦은 시간에?”
“하하, 뭐 그냥 지나가다 들렀어요.”
현재 여기 와 계신 신부님에 대한 부분은 수사 기밀이다. 아무리 어머니 같은 수녀님이지만 말할 수 없다.
나는 주방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루이사 수녀님은요?”
“응, 미사 준비 때문에 성당에 가셨어. 가신 김에 신부님과 이야기도 좀 하신다고 차와 쿠키를 가져가셨고.”
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지난번에 제가 왔을 때 신부님이 새로 오셨다고 하셨는데. 그분 말씀이신가요?”
“응, 기억하는구나. 맞아, 그 신부님이셔.”
“언제 여기 오신 겁니까?”
“음, 한 일 년쯤 되셨어.”
“어떤 분인가요?”
“왜?”
“그냥 궁금해서.”
“음…… 좋은 분이야. 아주 밝으시고 아이들에게도 항상 친절하게 대해주셔. 궂은일도 잘 도와주시고.”
나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미카엘 신부에 대해 떠올렸다.
“혹시 신부님이 여기서도 포도주를 직접 담그십니까?”
로사 수녀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응? 그걸 어떻게 알았어?”
“…….”
미카엘 신부가 포도주를 담갔던 지하 공간. 그곳에 장진수의 약품이 담긴 오크 통이 있었다. 그때 미카엘 신부님은 장진수의 행위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설마 또다시 그 일이 반복되는 건 아니겠지?
“신부님이 포도주 제조하는 곳이 어디죠?”
“도경아? 갑자기 왜 그래?”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진 내 얼굴을 보고 걱정하시는 로사 수녀님. 나는 얼른 표정을 풀고 웃었다.
“아니요, 그냥 포도주 어떻게 담그시는 건지 궁금해서.”
“응? 너 어릴 때 많이 해봤을 텐데 왜 또?”
“뭐…… 신부님마다 방법이 다른가 해서.”
“싱겁기는. 포도주 여기서 담가.”
“예?”
“여기. 보육원에서 담근다고.”
“…….”
그때처럼 아무도 없는 공간이 아니라 애들이 다 지켜보는 곳에서 담근다고?
“어디에 저장해 둬요?”
“보육원 창고. 어디인지 알지?”
“주방 뒤에 있는 창고 말이죠? 한번 봐도 돼요?”
“응, 당연히 가능하지. 보여줄까?”
“네, 부탁드려요.”
수녀님을 따라 도착한 창고. 예전과 달라지지 않은 평범한 창고에는 수십 년간 성당과 보육원에서 사용하다 버리기는 아깝고 쓰기엔 낡은 물건들이 가득 차 있다.
그리고 한 구석에 커다란 고무 대야 두 개가 놓여 있다. 로사 수녀님이 뚜껑을 열자, 비닐 봉투를 씌워 밀봉된 포도주가 가득 차 있는 것이 보인다.
“이거 봐, 올해 포도가 좋아서 아주 잘 나왔어.”
나는 포도주를 들여다보며 아직 열지 않은 다른 고무 대야를 눈짓했다.
“이것도 봐도 돼요?”
“응? 왜?”
“그냥 한번 보고 싶어서.”
“호호, 우리 도경이 호기심 많은 건 여전하네. 좋아.”
로사 수녀님이 다른 대야 뚜껑을 열었다. 휴, 다행이다. 여기도 약품 같은 건 없다. 검붉은 포도주만 찰랑거리고 있다. 로사 수녀님은 안을 확인시켜 주신 후 다시 뚜껑을 단단히 닫으며 말했다.
“신부님 말씀이 오랫동안 쓸 생각으로 향 좋은 와인을 묵혀 더 좋은 술을 만들고 싶었지만 안 좋은 기억이 있으시다고 했어.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씩 이렇게 소량만 제작하실 거래.”
안 좋은 기억. 그건 아마 장진수에 대한 기억일 것이다. 당연하다, 보통 사람이 그런 일을 당하면 트라우마가 생길 수도 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신부님은 지금 어디 계세요? 성당?”
“음, 아마 숙소에 계시지 않을까? 루이사 수녀님과 다과 드시며 담소 나누고 계실 거야.”
“아, 그렇구나.”
“아, 내 정신 좀 봐. 쿠키 타겠네.”
로사 수녀님이 주방으로 달려가며 말했다.
“루이사 수녀님 뵙고 나서 그냥 가지 말고! 쿠키 싸줄 테니까 꼭 가져가!”
나는 수녀님의 바쁜 뒷모습을 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두 분 수녀님을 볼 때마다 항상 엄마를 보러 온 기분이다.
창고는 바깥에 있기에 보육원을 빙 돌아 성당 옆 숙소로 바로 온 나는 조금 열려 있는 문을 밀었다.
신부의 숙소는 2층. 1층은 작은 응접실과 사무장님의 사무실만 있다. 늦은 시간이라 사무장님은 퇴근하시고 아무도 없다.
20세까지 여기 살았지만 사실 신부님 숙소에 올라와 본 건 처음이다. 2층에는 방이 세 개다. 그리고 방보다 작은 응접실이 있다.
계단 위로 올라오자 아래에서 나는 인기척에 아까부터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두 쌍의 눈동자가 보인다.
“어머나! 도경이 아니니?”
소파에 앉아 있던 루이사 수녀님이 한달음에 달려와 내 손을 잡고 몸을 이리저리 살핀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응? 아까 전화 통화할 때는 온다는 말 없었는데. 무슨 일 있는 거야? 어디 다친 데 없는 거지?”
나는 수녀님의 걱정스러운 눈빛에 따뜻함을 느끼고 빙긋 웃었다.
“네, 아무 일도 없어요.”
나는 천천히 미카엘 신부님 쪽을 바라보았다. 신부님은 나를 알아보시는 모양인지 눈이 커져 있다.
나는 신부님께 슬쩍 윙크를 한 뒤 루이사 수녀님께 말했다.
“새로 오신 신부님이세요?”
“어? 아아, 그래. 인사드려. 새로 오신 미카엘 신부님이셔.”
나는 신부님께 허리를 숙였다.
“현도경입니다, 미카엘 신부님.”
루이사 수녀님이 내 등을 밀며 말했다.
“신부님. 그때 말했던 우리 보육원 출신 아이예요. 지금은 경찰이고.”
신부님은 잠시 상황 파악을 하는 듯 눈을 굴리다 내 윙크의 의미를 깨닫고 웃으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형제님.”
서로 처음 보는 사이를 연기하는 우리. 괜히 루이사 수녀님께 걱정을 끼치기 싫어서 한 행동인데 다행히 신부님 눈치가 빠르시다.
수녀님이 다시 내 손을 만지며 물었다.
“그나저나 진짜 무슨 일이야?”
“아, 오늘은 신부님 좀 뵈러 왔어요.”
“신부님을? 왜?”
“기도 좀 부탁드리려고요.”
“아, 정말?”
수녀님이 기쁜 표정을 지으신다. 나는 어릴 때부터 기도하기 싫어하는 아이였다. 갖은 고생은 수녀님이 다 하셔서 만든 밥을 먹는데 왜 하느님께 음식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를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녀님은 그런 내가 종교적 변화를 맞이했다고 생각하시는지 무척 기쁜 표정을 지으신다.
“그래, 그럼 내가 자리 피해줄게. 기도 잘 받고 가기 전에 보육원에 들르고. 알았지?”
“네, 수녀님.”
“신부님. 우리 도경이 잘 부탁드립니다.”
수녀님이 연신 웃음을 흘리며 계단을 내려가신다. 신부님은 그런 루이사 수녀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웃었다.
“좋은 모자지간 같아 보이는군요.”
나는 계단 앞에 서 있다가 루이사 수녀님이 앉아 계시던 자리로 가 말했다.
“잠깐 앉아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형사님.”
수녀님이 가시니 이제야 형사라고 부르는 신부님. 나는 자리에 앉은 후 신부님을 보았다.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은 미카엘 신부님이 말했다.
“이거 놀라운 우연이군요. 새로 배정받은 이 성당이 형사님이 자란 곳이라니. 필연일까요?”
우연이겠지. 신부님의 성당 배속은 본인 의지로 정하는 것이 아니니까.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하, 야훼만이 아시겠죠. 그래,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정말 기도를 부탁하러 오신 겁니까?”
“아니요.”
“하, 수녀님이 실망하시겠군요.”
나는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장진수가 탈옥했습니다, 신부님.”
“…….”
미카엘 신부님의 얼굴이 굳어진다.
“토……마스가 말입니까?”
토마스. 그래, 장진수의 세례명이 토마스였다. 동명의 천주교 성자인 김범우 토마스가 체포되었던 성지를 살인의 전시장으로 만들었던 구역질 나는 새끼의 이름이다.
“예.”
나는 수녀님이 드시던 쿠키를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모종의 이유로 탈옥을 한 장진수를 추적 중에 그가 무엇에 대한 복수심을 가지고 있다는 추측을 했습니다. 기존에 저질렀던 살인이 살인 자체가 주는 희열과 후에 시신을 훼손하는 기쁨 때문이었다면 이제부터 그는 복수를 위해 움직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
“도대체 어떤 대상에게 복수심을 가질 것인지 빨리 알아내야 놈의 동선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다른 희생자가 생기는 것을 막는 일이 될 겁니다. 협조해 주시겠습니까?”
미카엘 신부님은 한동안 말이 없다. 그러다 한참 지난 후에 입을 열었다.
“왜…… 복수를 할 거라 생각하시는지 물어도 될까요?”
편지를 보내왔다. 앞으로 자신이 무엇을 할지 추상적인 힌트가 담긴 편지. 하지만 아무리 신부님이 상대라 해도 수사기밀을 발설할 수는 없다. 수녀님께도 숨겨야 할 이야기를 이 사람에게 할 순 없기 때문이다.
“단순 추측입니다. 놈이 탈옥할 이유는 그것밖에 없으니까요.”
“음…….”
“일단 수사를 이원화해서 놈의 학창 시절을 파고 있습니다. 다른 한쪽은 성당 생활에 대해 수사하려 신부님을 찾았는데 예기치 않게 여기 와 계신 걸 알고 찾아온 겁니다.”
“음, 그렇군요.”
“신부님께서는 제게 놈이 성당에 처음 왔을 때 이야기를 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네, 기억합니다.”
“다시 한번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전에 한 가지만 묻죠, 형사님.”
“뭐죠?”
“토마스가 또 누구를 죽였습니까?”
“…….”
“대답해 주시기 어려운 질문인가요?”
“아직 모르겠습니다. 죽였지만 아무도 모르고 있을 수도 있고. 아직 죽이기 전일 수도 있습니다.”
“휴…… 그렇군요.”
미카엘 신부님이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내 눈을 바라보신다.
“그때 제가 토마스에 대해 어떤 말씀을 드렸었죠?”
“참 예쁜 아이라고 생각하셨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름다운 눈을 가졌고, 얼굴도 하얀 것이 나중에 크면 인기가 많겠구나 했다고. 항상 혼자였고, 혼자가 편해서 아무도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언제나 성경을 가지고 다녔으며 열심히 기도하는 아이였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음, 거기까지 말씀드렸군요.”
“처음 놈이 성당에 왔을 때 나이가 얼마였습니까?”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고등학생 때였습니다.”
“제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혼자 살다 서울에 올라갔다고 하셨는데.”
“맞습니다.”
“성당에 처음 왔을 때는 놈에게 부모님이 계셨나요?”
“글쎄요, 토마스의 부모님을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미카엘 신부님을 바라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미카엘 신부님이 장진수 부모의 죽음을 알고 있다.
놈의 부모는 5년간 실종 처리 되었다가 사망으로 처리되었다. 미카엘 신부님이 단양의 성당에 있었던 기간은 2년. 부모의 사망을 알고 있었다는 건 적어도 놈의 부모가 사망한 지 5년 전후에 그곳에 계셨다는 뜻이다.
장진수가 혼자였던 이유는 혼자가 편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함께할 가족을 죽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