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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기억-258화 (257/328)

살인의 기억 258화

19. 기억의 편린(2)

다음 날, 사무실에 출근을 하니 굳은 얼굴의 오진규가 날 기다리고 있다. 나는 오진규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연주는 장진수와 과거에 연이 닿았던 사람들을 인터뷰하기 위해 단양으로 내려가 있고, 관우도 새로 발견된 증거에 대한 조사를 위해 단양에 있기에 출근한 사람은 나와 오진규 둘뿐이다.

오진규가 시간을 힐끔 보며 말했다.

“KCSI에 연락해서 목 과장님께 와 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 아침부터 KCSI는 왜? 나는 순간적으로 놈에게서 또다시 편지가 왔음을 직감했다.

“편지가 왔습니까?”

오진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 책상 위를 눈짓한다. 지난번에는 푸른색 편지지였는데, 이번에는 노란색 편지지이다.

“하나는 확실하네요. 도망친 살인마의 편지지 고르는 취향은 여중생 같다는 거.”

농을 하고 있지만 오진규의 얼굴은 굳어 있다. 혹시 저 안에 살인을 고백하는 내용이 담겨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가방을 내려놓은 내가 편지를 노려보자 오진규가 말을 이었다.

“아침 첫 행랑으로 도착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종로 경찰서로 배달되었고.”

“최 팀장님께 따로 연락받은 것이 없는데.”

“종로 경찰서에 장진수 이름이 적힌 편지는 즉시 국가수사본부로 전달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답니다. 강력 3반으로 가기 전에 1층 로비에서 바로 행랑을 보낸 것 같습니다.”

“음.”

그때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리며 숨을 헐떡이는 목 과장님이 들어온다.

“또 편지가 왔다고?”

“오셨습니까?”

“그거야?”

“예.”

“안 만졌지?”

“저는 안 만졌습니다.”

목 과장님이 오진규를 바라보자 그도 손을 올리며 고개를 젓는다.

목 과장님이 장비를 세팅한 뒤 편지지를 조심스럽게 잡아 일단 겉면부터 정밀 조사를 돌리기 시작한다.

가위로 편지 봉투를 개봉하고 편지지를 꺼낸 후 빈 봉투 안쪽과 편지지 겉면의 미세 증거를 확인한 목 과장님이 한숨을 쉰다.

“이번엔 아무것도 없다.”

목 과장님은 지문을 채취하기 위해 편지지를 꼼꼼히 조사한다.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도 저 절차는 밟아야 한다.

혹시 편지지에서 다른 이의 지문이 나올 경우, 그러니까 편지 봉투가 아닌 안쪽에 밀봉된 편지지에서 지문이 나온다면 공범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목 과장님의 조사가 모두 끝나고 나서야 편지가 내 손에 들어왔다. 조사를 하며 이미 내용을 확인한 목 과장님은 혀를 차며 자기 장비를 가방에 챙기고 있다.

나는 이제 익숙해진 놈의 필체로 쓰여진 편지를 눈으로 읽었다.

어린 시절에는 항상 문이 열리고 미래를 열어주는 순간이 있습니다.

당신에게도 마음의 문을 열어준 선생님이 있었습니까?

선생은 영원한 영향력을 안겨주는 사람입니다. 그는 절대로 자신의 영향력이 어디에서 중지될지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믿습니다.

학생이 영원히 자기의 일을 즐겁게 해내게 하는 선생은 월계관을 쓰게 될 것이라고.

모든 예술 작품은 실행되지 못한 범죄입니다.

짧은 편지. 하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은 예사롭지 않다. 나는 편지를 오진규에게 넘겨준 뒤 생각에 잠겼다.

오진규는 짧은 편지를 순식간에 읽고 난 뒤 급히 말했다.

“연주가 중학교 시절 선생님을 만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

“혹시 이 새끼 이거. 학창 시절에 선생님에게서 받은 폭력에 대한 복수를 하려는 것 아닙니까?”

선생님에 의한 폭력. 미카엘 신부님이 말한 얼굴의 멍을 만든 것은 선생님일까?

짐을 챙기고 있던 목 과장님이 혀를 차며 말했다.

“편지 맥락을 읽어야지. 그 편지의 내용은 자신을 가르친 선생에 대한 존경과 감사가 들어 있다. 원망과 조롱의 향은 전혀 없는 내용이야.”

오진규가 다시 편지를 읽어본 뒤 인상을 찌푸린다.

“아니…… 그럼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스승의 날 되려면 아직 한참 멀었는데 왜 우리한테 자기 스승 찬양하는 편지를 보낸 거죠?”

장진수는 지능범이다. 그가 아무런 힌트가 되지 않는 편지를 남길 리가 없다. 그가 내게 편지를 보내는 이유는 자신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게임의 페널티이니까.

“어린 시절에는 항상 문이 열리고 미래를 열어주는 순간이 있다…….”

만약 편지의 첫 문구가 살인자가 될 자신의 미래가 결정되는 순간이라고 가정하면 어떨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편지의 내용은 더욱 소름 끼치게 변한다.

“살인자의 삶을 살도록 만든 스승이 있다?”

내 중얼거림에 오진규와 목 과장님이 동시에 움직임을 멈추고 눈을 크게 뜬다.

“음…… 그렇게 볼 수 있군.”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과거에 단초가 있다는 말이 설명됩니다.”

목 과장님이 날 바라보며 말했다.

“도경아.”

“예.”

“이춘재 사건 기억나지?”

이춘재 사건. 아주 오랫동안 경기남부 연쇄 살인사건이라 불렸던 대한민국 넘버원 콜드케이스.

1986년 9월 15일부터 1991년 4월 3일까지 경기도 화성군 일대에서 여성 10여 명이 강간, 살해된 사건이며 2019년에 와서야 진범이 밝혀진 사건이다. 대한민국에서 경찰 일을 하는 이가 그 사건을 모를 수 없다.

“예, 과장님.”

“그 사건에도 전범(典犯) 사건이 있었다.”

전범(典犯).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전쟁범죄자를 말하는 단어가 아니다. 싸울 전(戰) 자 대신 법 전(典) 자를 쓰는 이 단어는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발생한 유사 사건의 사례를 말하며, 후의 범죄자가 전의 범죄자의 행태를 배워 학습하는 경우를 말한다.

물론 경찰대 전공 도서를 달달 외우다시피 했던 나는 이 사건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

“강창구 사건 말씀이십니까?”

사건의 이름을 말하자 오진규도 무슨 내용인지 눈치채고 끼어든다.

“공주 연쇄 살인사건 말씀이군요.”

목 과장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춘재 사건은 1986년 9월부터 1991년 4월까지 행해졌다. 강창구 사건은 1983년 7월부터 시작되었다. 많은 범죄심리학자들은 이춘재, 강창구가 서로 만난 적이 없지만 범죄 수법과 범죄 발생 시기가 이어진다는 점을 들어 이춘재가 강창구의 범죄를 학습했을 거라 생각했다.”

강창구 사건.

핵심 포인트는 ‘성’에 맞춰져 있으며 살인 6명, 살인미수 1명으로 끝난 사건이다. 목 과장님이 물었다.

“첫 번째 사건 기억하냐?”

“예.”

“말해봐.”

“1983년 7월 31일 오후 7시경. 공주시 우성면 용봉리 소룡골 계곡에서 멱을 감고 있던 50세의 여성이 익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외상이 발견되지 않아 단순 변사로 처리되었습니다.”

오진규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인다.

“첫 사건에 강간살인이란 것만 밝혀냈어도…… 후.”

목 과장님이 오진규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1980년대 이야기입니다. 강창구는 여성의 머리채를 잡아 물속에 넣고 기절시킨 뒤 인근 풀밭으로 끌고 가 강간했어요. 그 후에 다시 계곡으로 끌고 내려와 익사시킨 후 물속에 버렸습니다. 시신을 물속에 유기해 일정 시간이 지나면. 특히 더운 하절기의 경우 시신이 불어버립니다. 피부가 팽창된 상태에서는 어지간히 큰 상처가 아니면 외부의 공격으로 인해 생긴 상처를 확인할 수 없어요.”

나는 목 과장님의 말씀에 동의하며 말을 이었다.

“두 번째 사건부터 허리끈으로 목을 조르고, 강간한 뒤 살해하는 행태를 보였습니다.”

목 과장님이 손가락을 튕긴다.

“그래, 놀랍도록 이춘재 사건과 비슷했다. 아니, 거꾸로 말해야 되겠지. 이춘재는 강창구 사건을 모티브로 범죄를 저질렀다. 강간하기 전에 상대를 죽이지 않는 것과, 피해자의 물건으로 교살하는 행태도 모두 같다.”

나는 과장님의 말씀을 들으며 눈을 꼭 감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오진규 역시 과장님 말씀의 요지를 눈치챘지만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과장님. 이 미친 새끼는 사람 시신을 원통에 넣고 그걸로 단백질 투명화 작업을 했던 또라이 새끼입니다. 대한민국 역사상 그런 또라이는 처음 나타난 겁니다. 당연히 전례도 없고요.”

목 과장님이 오진규를 바라보며 눈썹을 꿈틀거린다.

“만약에. 만약에 말입니다. 전범의 사건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거라면 어쩌시겠습니까?”

오진규가 눈을 크게 뜬다.

“예?”

목 과장님이 장진수의 편지를 손가락으로 쿡쿡 누르며 말했다.

“여기 11년이나 사건을 들키지 않았던 놈이 있습니다. 놈의 스승이 있다면? 우리가 스승의 범죄를 밝혀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요?”

“…….”

오진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 심각한 억측이다. 단순히 이러한 편지가 왔다는 이유로 살인의 스승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앞서 나간 생각일 수 있다. 목 과장님도 이 부분을 아시는지 한발 물러난다.

“물론 수사 인력을 놈의 스승이 저지른 범죄를 찾아내는 데 집중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히 염두에는 둬야 한다는 뜻이죠.”

오진규도 그 부분은 인정하는 눈치이다.

“음. 강창구, 이춘재도 서로 만난 적이 없죠. 하지만 많은 뉴스와 신문에서 사건을 다루었으니 요즘 유행하는 화상 강의를 들은 것과 진배없는 상황입니다. 그래, 좋아요. 배웠다 칩시다. 하지만 장진수가 배울 수 있는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과장님 말씀처럼 스승이 있다손 쳐도 11년 전, 아니, 이제 13년 전이죠. 최소 13년 전에 살인을 했던 스승이 있다는 건데.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시신이 이제 와 나올 리가 있습니까? 단양 전체를 다 뒤집어엎을 수도 없는 노릇인데.”

오진규의 말이 현실적으로 타당하다. 목 과장님도 이 부분은 부정하지 못하시고 한숨을 쉰다. 스스로 생각해도 방법이 없기 때문이리라.

나는 잠시 침묵하다 말을 꺼냈다.

“정리를 해보죠. 놈이 일으킨 범죄와 동일한 수법의 범죄는 현재까지 전례가 없었습니다. 강창구, 이춘재 사이에 일어난 일을 그대로 접목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우리가 어릴 때 선생님이 알려주신 지식을 잘못 해석해 전혀 다른 뜻으로 배우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장진수의 경우 성당에서 배운 성경적 지식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범죄를 저질렀던 것처럼요.”

오진규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니까. 본인이 의도한 바가 아니지만 장진수에게 살인을 할 빌미를 준 어긋난 가르침을 준 스승이 있을 수 있다. 이거네요.”

“그쪽이 더 신빙성 있지 않을까요?”

“음, 일리가 있네요. 그럼 일단은 놈이 다닌 학교 선생님들의 소재부터 파악하겠습니다. 연주가 만나고 있는 사람은 두 명밖에 없으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서로 수사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가 하나 남았다.

나는 장진수의 편지지를 뚫어지게 보며 생각에 잠겼다.

‘놈은 내게 게임을 하자고 했다. 이 편지는 내게 주는 힌트. 자신의 미래를 열어준 스승을 찾는 것이 게임의 힌트라는 말인데…….’

힌트는 문제에서 난이도가 어려울 경우 난이도를 낮추기 위해서 정답의 일부만 보이도록 도와주는 단서이다.

그런데 나는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정확한 문제를 부여받고 나서 난이도를 낮추는 힌트를 봐야 답이 보이는 법인데. 우리는 놈이 어떤 문제를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과연 놈은 살인을 노리는 걸까?

자신이 저지를 범죄를 막을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걸까?

도대체 이 편지들은 어떤 문제에 대한 힌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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