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262화
19. 기억의 편린(6)
나는 손톱을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모든 예술 작품은 실행되지 못한 범죄입니다.
놈은 지금껏 자신이 생각하는 예술 작품을 범죄로 만들어 왔다. 그리고 그 예술의 끝에 스승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스승을 목표로, 그 스승을 뛰어넘는 것이 목표라고 생각했다면 어떨까?
“스승을 뛰어넘는다.”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일차원적으로 스승보다 더 뛰어난 살인자가 되고 싶다는 열망으로 볼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그 스승을 직접 죽이는 것으로 예술의 완성을 하려 할 수도 있다.
“자기 스승을 죽인다……?”
나는 놈이 두 번째로 보낸 편지의 내용을 떠올렸다.
불멸의 춤사위는 아직 추지 못했는데
가장 빛나는 별이 되기 전에 방향을 잃은 배의 선장은
마음속의 불길을 삭이며 하루하루 버틸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줄곧 놈이 왜 탈옥을 했는가? 탈옥까지 해서 완수해야 할 목적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궁금해해 왔다.
놈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도대체 무엇이었나를 알아내기 위해 그의 인생과 주변 인물들을 탐문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것이 있다. 아니, 아예 눈을 돌리고 일반인의 잣대로 생각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장진수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살인이다.”
놈이 말한 불멸의 춤사위. 스스로 만들어낸 예술 작품의 마지막 종점.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 나왔다면 어떨까? 나는 주먹을 하얗게 말아 쥐며 이를 갈았다.
“충분한 동기가 된다.”
나는 재빨리 오진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님, 중학교 선생님으로는 부족합니다. 장진수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대학 교수까지 전부 확인해 주세요. 오래 걸리겠지만 학창 시절 다니던 학원까지 전부 알아내야 됩니다. 꼭 학문이 아니더라도 미술이건 음악이건 뭔가 배울 수 있는 기회에 노출되어 있던 모든 걸 알아봐 주세요. 신원 확인되면 즉시 경호 인력 배치하시고. 이 새끼가 자기 스승을 노리고 있는 겁니다.”
영문을 몰라 하는 오진규에게 내 추론을 설명해 주자, 한참 그냥 듣고 있던 오진규는 즉시 수긍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고 하늘을 올려 보았다. 벌써 오후 시간. 이제 곧 뉴스가 터질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 * *
연주가 단양 경찰서에서 내준 임시 수사본부 한편에 앉아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와……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심하네요.”
오진규는 내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전화통을 붙잡고 선생들에게 연락을 돌리다 물었다.
“뉴스 여파?”
연주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인다. 노트북 모니터를 돌려 화면을 보여준 연주가 말했다.
“이게 장진수 제보 센터 현황이거든요?”
연주가 시간을 힐끔 본 후 말했다.
“지금 시간이 오후 9시, 뉴스가 나간 게 일곱 시인데 딱 두 시간 동안 장진수 그 새끼 봤다는 제보 전화가 1,037통 왔어요.”
오진규는 이런 경험이 많다. 별로 놀라지도 않은 그는 다시 전화번호가 기록된 수첩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건 별거 아냐. 2022년에 해외여행 가서 남편을 익사시키고 보험금 수령한 여자 공개수배 때는 시간 당 천 통이 넘는 제보 전화가 왔다.”
“휴, 이 많은 제보 중에 진짜를 어떻게 가려내죠? 미치겠네.”
청 내부에서도 이미 예상했던 일이다. 이 많은 제보 중에 진짜를 가린다? 그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그저 가능성 높은 곳에 인력을 투입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다 진짜가 걸리면 된다.
안 걸리면 어떡하냐고? 기우제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진짜가 걸릴 때까지 제보 전화를 받고 출동하는 것이 공개수사다.
연주가 이마를 탁 치며 한숨을 쉰다.
“센터장님께 연락드렸더니 제보 센터에 전화 신고 받는 인력만 100명을 배치했다고 하네요. 컨트롤 센터에서 실제 형사나 지구대 출동하는 인력까지 합하면 대략 천 명도 넘게 투입되게 생겼어요.”
이래서 경찰이 공개수사 전환을 싫어하는 것이다. 천문학적인 비용과 시간, 인력이 투입되기 때문에 공개수사 전환은 마지막 조치로 남겨두는 편이다.
더 이상 몰려서 해볼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그때나 전환하는 것이 공개수사이다.
물론 이번 경우는 다르다. 무엇보다 국민의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강혁 아저씨의 지론 때문에 일반적인 공개 시점보다 훨씬 빠르게 전환을 가져갔다.
연주는 센터 인력들이 전화를 받아 메모해 둔 파일들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다.
잠시 후 임시 수사본부 문이 열리며 피곤한 기색의 관우가 커다란 가방을 메고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연주가 손을 들며 말했다.
“뭐 좀 나왔어?”
관우가 고개를 저으며 가방을 팽개친다.
“아니, 지하실 서랍장 속에서 나온 미세 증거는 그냥 먼지, 알아낼 수 있었던 건 거기 놓여 있던 책 크기가 A5 용지 정도라는 거.”
오진규가 전화를 돌리다 관우를 돌아본다.
“A5?”
“예.”
“A4 용지에 4분의 1 크기라는 건가?”
“예, 맞습니다. 혹시 몰라서 그 크기의 책들을 좀 찾아봤는데 너무 많아요.”
오진규가 잠시 눈을 뒤룩거리다 말했다.
“혹시 놓여진 자리의 먼지에서 스프링 자국 안 나왔어?”
“아뇨?”
“그냥 정 사각형?”
“예, KCSI 대원 말로는 아마 겉면이 가죽인 책일 거라고 했어요. 종이 재질이었으면 책 아래에도 일정량의 먼지가 침투했을 거라고. 서랍장 먼지 모양으로 봐서 가죽 재질의 책이 장시간 놓여 있던 자리라고 하던데.”
오진규가 까칠한 턱수염을 문지르며 씩 웃는다.
“일기장이네.”
관우와 연주가 동시에 그를 돌아본다. 오진규가 혀를 날름거린다.
“일기장과 성경책을 가져갔다…….”
연주가 물었다.
“어떻게 일기장이라고 확신하세요?”
오진규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일기 써?”
“음, 지금은 안 쓰지만 옛날엔 썼죠.”
“일기장 어디 놔?”
“책상 서랍에 두죠.”
“서랍장 잠가두고?”
“예전엔 그랬는데 일기장에 자물쇠 달린 거 나온 후로는 안 그래요.”
오진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원래 사람은 자기 일기장을 누가 보는 게 싫어.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 숨기려고 하지. 가족과 함께 사는 연주 너 같은 사람도 그들이 못 보게 서랍을 잠그거나, 일기장 자체를 잠근다. 하지만 놈에게는 비밀 공간이 있었어.”
관우가 반박한다.
“놈은 혼자 살았습니다. 게다가 거긴 집 내부도 아니고 발견하기 어려운 지하실이었고요. 굳이 숨겨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오진규가 관우를 힐끔 보며 말했다.
“넌 안 그런가 보지?”
관우가 머리를 긁는다.
“예, 사실 일기를 쓰지도 않지만. 혼자 사는데 뭘 숨겨놓을까 싶어서. 그놈은 집에 올 여자친구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넌 범죄자가 아니니까 그렇지 인마.”
“음?”
“범죄를 일으키는 놈들은 필사적으로 범죄와 관련된 물건을 숨기려 하거나, 혹은 전시해 둔다. 장진수 그 놈의 경우 시신은 전시했지만 사람을 죽인 흉기, 사용했던 약품의 용기는 깨끗하게 처리했어. 즉, 놈에게 중요한 건 시신으로 만든 예술 작품이고 나머진 모두 증거물이란 거지.”
“음…….”
“살인 일기를 썼다고 가정해 봐. 거기엔 살인의 모든 기록이 들어 있겠지. 아주 중요한 증거가 될 거야. 그걸 혼자 산다고 아무데나 둔다고?”
“아…….”
연주와 관우는 그제야 수긍하는 눈치이다. 오진규는 구석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날 보며 웃는다.
“안 그렇습니까, 과장님?”
아까부터 듣고 있었지만 오진규의 말에 일리가 있다. 그리고 만약 그 일기장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놈의 행동에 대한 모든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예, 선배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오진규가 것 보라는 듯 연주와 관우를 보며 윙크한 뒤 다시 전화를 돌리기 시작한다.
연주도 실시간 제보 현황 대시보드로 집중하는 것을 본 관우는 가방을 치운 뒤 연주 뒤로 가 파프리카 TV 인기 BJ 채팅 창처럼 빠르게 올라가는 제보 전화 내용 기록을 주시한다.
그러다 갑자기 연주가 붙잡고 있는 마우스를 꽉 붙잡는다.
“스톱!”
“응?”
“스크롤 올려봐.”
연주가 드르륵드르륵 소리를 내며 마우스 스크롤을 올리자, 관우가 마우스를 빼앗아 하나의 기록을 누른다. 그러자 파일이 직접 열리며 대시 보드 앞에 메모장이 보인다.
오진규는 바로 옆자리에 있다가 화면을 보고 놀랍다는 얼굴로 관우를 본다.
“와, 이 자식. 눈 진짜 빠르네. 사진 대조할 때도 그랬지만 너 진짜 동체 시력이 UFC 선수급은 되는 것 같다?”
관우가 빙긋 웃으며 날 본다.
“과장님, 여기 좀.”
뭘 발견한 걸까? 나는 뚜벅뚜벅 걸어 연주 자리로 갔다.
수많은 제보 전화를 기록한 메모장. 무려 100명의 상담원이 실시간으로 올리고 있는 제보 내용 중 단 하나. 관우가 발견해 낸 것은 제보 몇 줄이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심상치 않다.
“단양 상진 성당 율리아 수녀님 제보?”
단양 상진 성당? 장진수 그놈이 약품을 보관했던 창고다. 엄청나게 빠르게 올라가는 보고서 물결 속에서 이 한 단어를 캐치해 낸 관우가 새삼 대단하다. 나는 바로 아랫줄을 보고 눈을 찌푸렸다.
“어젯밤 얼굴을 가린 남자가 찾아와 신부님을 찾았다.”
연주가 아랫줄을 읽는다.
“당시 이미 전근을 간 신부님을 찾아 왔기에 안 계시다고 답했고, 현재 어디 계시냐는 질문에 신부님 위치는 알려줄 수 없다고 답하고 보냈다. 목소리가 매우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뉴스를 보고 토마스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제보함?”
다수의 거짓 중에 소수의 진실. 바로 이런 제보가 진실이다. 나는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놈이 상진 성당에 가 신부님을 찾았다…….”
당시 함께 성당을 수색했던 연주가 말했다.
“그때 와인 제조하던 곳에서 우리에게 성경의 힌트를 알려주셨던 그 신부님을 찾아간 것 아닐까요?”
미카엘 신부님 이야기다. 그분은 지금 쌍문동 성당에 계신다.
‘잠깐.’
스승은 무언가를 가르치는 사람이다. 아니, 내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라 말하는 것이 옳다. 그것이 좋은 방향으로 나를 이끄는 것이든, 나쁜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든 상관없다. 장진수 그놈에게 중요한 가치는 살인. 그리고 그 살인을 하는 이유는…….
“제길, 종교다.”
세 사람이 날 돌아본다. 갑자기 종교 이야기가 왜 나오냐는 얼굴들. 나는 팀원들을 보며 말했다.
“장진수 그놈이 살인을 하는 이유가 삐뚤어진 종교관 때문이란 거 다들 알 겁니다.”
세 사람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제보 화면을 보며 이를 갈았다.
“놈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살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놈이 살인을 하는 이유는 종교 때문입니다. 살인을 가르친 스승도 스승일 수 있지만 그보다 더 높은 가치. 살인까지 하게 만드는 삐뚤어진 종교를 가르친 스승.”
세 사람의 눈이 커지며 노트북 화면으로 동시에 고개를 홱 돌린다.
“시, 신부님?”
“이 미친 새끼가 신부님을 죽이려고 한다고?”
“그래서 탈옥을 했단 말이야?”
나는 급히 상의를 걸치며 소리쳤다.
“미카엘 신부님은 지금 쌍문 성당에 계십니다. 쌍문동 지구대에 연락해서 즉시 쌍문 성당으로 인력 급파하세요! 우리도 바로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