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265화
19. 기억의 편린(9)
“수녀님.”
내 목소리가 들리자, 초점 잃은 루이사 수녀님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서서히 초점을 찾아가고 있는 수녀님의 어깨에 손을 올린 나는 다시 한번 나의 어머니를 불렀다.
“수녀님.”
따뜻한 손길이라고 볼 수 없는 나의 투박한 손길. 수녀님은 나를 한번 올려 보시더니 자기 어깨에 놓인 내 손을 꼭 잡으신다. 잘게 떨리는 수녀님의 손끝이 내 마음을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놓는 듯하다.
“우리 도경이.”
“괜찮으세요?”
“우리 도경이.”
수녀님은 자꾸만 ‘우리 도경이’라는 말만 하며 내 얼굴을 바라보신다. 수녀님이 내 손을 더 꼭 붙잡으며 눈시울을 붉히신다.
일반인이 겪기에는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니 장시간 휴식과 요양이 필요할 것이다. 수녀님은 걱정 어린 내 눈길을 받으며 입을 여셨다.
“어둠이 응시하고 있는 가장 깊은 곳에. 그곳에 네가 서 있었구나. 방황하며, 두려워하며, 의심하며. 그리고 어떤 사람도 감히 두려워 꿈꾸지 못했던 꿈을 꾸며. 우리 도경이가 사는 곳은 이런 곳이었구나.”
“…….”
충격적인 일을 겪은 당신의 걱정보다 이런 삶을 사는 나를 먼저 걱정해 주시는 나의 어머니. 나는 수녀님의 목소리가 건조했던 내 심장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기분이 들었다.
위로하러 왔는데 도리어 내가 위로를 받고 있는 한심한 꼴이지만 그래도 좋다. 수녀님은 원래 이런 분이니까.
내가 온 것을 보고 다가온 로사 수녀님이 뒤에서 날 안아주신다. 흐느끼는 몸짓이 느껴지지만 결코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울음.
수녀님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경아,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큰일 났을 거야.”
“…….”
나는 뒤에서 날 안은 로사 수녀님께로 몸을 돌려 꼭 안아드렸다.
“이제 괜찮아요.”
나는 수녀님을 안고 어깨를 어루만져 드렸다. 다른 한 팔을 루이사 수녀님께 내밀자 구급차에 앉아 있던 수녀님이 내게 안기신다.
언제나 두 분께 안기기만 했는데 이제 나는 두 분 모두를 안아드려도 될 만큼 넓은 가슴을 가졌다.
“미안해요. 제가 좀 더 빨랐다면 두 분이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로사 수녀님이 눈꼬리에 눈물방울을 달고 날 올려 보시며 고개를 젓는다.
“우리는 빛이 그 어떤 것보다 빠르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야. 빛이 아무리 빨리 달려도, 어둠은 항상 그곳에 먼저 도착해서 빛을 기다리고 있단다. 빛이 어둠보다 느린 것은 당연한 일이야.”
“…….”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듣고 보니 맞는 말 같기도 하고. 나는 두 분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그냥 나쁜 꿈을 꾸셨다고 생각하세요. 오늘 일은 없던 일이라고.”
두 분 수녀님이 동시에 고개를 젓는다. 루이사 수녀님이 말했다.
“내가 사랑하는 하느님은 내게 어둠으로 가득한 상자를 주신 적이 있었단다. 내가 이것 또한 선물임을 이해하는 데는 몇 년이 걸렸지. 어두운 면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면 할수록, 어둠은 우리에게 더 강한 힘을 행사하게 된단다.”
로사 수녀님이 동의하며 말했다.
“오늘 일로 우리와 도경이 네게 드리운 어둠에 대해 알았어. 우리는 하느님께 어둠에서 구원해 주심을 감사하고, 또다시 어둠이 우리를 잠식하지 않게 해달라 기도할 거야.”
나는 입맛을 다셨다. 그래, 그것이 수녀님들이 스스로의 가치관을 지키는 심리적 탈출구라면 그래도 좋다. 어찌 됐건 두 분이 충격에 빠져 아무 일도 하지 못할 것 같지는 않으니까.
그때, 보육원 문이 열리며 새별이 얼굴이 불쑥 나온다. 자고 있는 게 아니었구나. 아니, 이 난리가 났는데 애들이 아직 자고 있는 것도 웃기지.
경찰차 불빛이 싸이키 조명처럼 뿜어져 나가고, 현장을 정리 중인 요원들이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현장에서 잠을 잘 수 있다면 그건 그것 나름 문제이다.
새별이는 잔뜩 겁먹은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오밤중에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보육원과 성당을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두 분 수녀님을 슬쩍 밀며 말했다.
“아이들이 깬 것 같아요.”
수녀님 두 분이 동시에 고개를 돌린다. 그러더니 거의 동시에 뛰어가신다. 그래, 아이들에게는 수녀님들의 손길이 필요하다. 아이들을 보살피는 행위로 인해 충격을 잊을 수 있다면 그 나름 좋은 방법이겠지.
나는 수녀님이 새별이를 비롯해 밖이 궁금해 자다 말고 나온 아이들의 손을 잡고 다시 재우러 가는 것을 가만히 보다, 또 다른 구급차 안에서 밖을 바라보고 있는 미카엘 신부님을 보았다.
수녀님들과 달리 침착한 얼굴로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 신부님은 수건으로 피를 닦아도 얼굴에 핏자국이 벌겋게 남아 계셨다. 미카엘 신부님이 계신 구급차 앞으로 가 눈을 마주치자, 신부님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는 손을 들어 그를 만류했다.
“일어나지 마세요, 신부님.”
“…….”
신부님이 다시 엉거주춤 앉으시는 것을 본 나는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제 판단이 늦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죄송합니다.”
미카엘 신부님의 얼굴에 의문이 서린다. 그러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깨달으셨는지 재빨리 손사래를 치신다.
“아닙니다, 형제님. 형제님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저와 두 분 수녀님은 하느님 곁으로 갔을 겁니다. 신의 곁에 가는 것은 반길 일이지만 남겨질 아이들에게는 못 할 짓이지요. 잘못했다 말씀 마세요. 충분히 잘해주셨습니다.”
나는 눈으로 신부님을 살폈다. 꽤 많은 피가 튀었다. 닦아낸다고 닦은 모양이지만 옷에도 피가 튀어 있어 본인 상처인지 튄 피가 묻은 것인지 잘 분간이 안 간다.
나는 내 뒤를 스쳐 가는 구급 대원을 붙잡고 물었다.
“신부님 상태가 어떤 겁니까?”
여성 구급 대원이 안심하라는 얼굴로 말했다.
“약간의 찰과상 말고 문제없습니다. 출혈도 없고, 외상도 거의 없어요. 찰과상은 처치해 드렸으니 휴식 취하시면 됩니다.”
휴, 다행이다. 나는 구급 대원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후 다시 신부님을 보았다.
“혼란스러우실 텐데 죄송합니다. 질문 좀 드려도 될까요?”
신부님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엉덩이를 들썩인다.
“예, 뭐든 하세요.”
“놈이 신부님을 찾아와 뭐라고 했습니까?”
미카엘 신부님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그게…… 숙소에서 매일 개인적으로 드리는 저녁 미사를 마치고, 조금 출출하던 참이었습니다. 루이사 수녀님과 로사 수녀님이 아이들을 위해 떡을 하셨는데 저도 좀 먹어보라며 가지고 오셨죠. 숙소 거실에서 두 분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들어오던 두 분 수녀님의 뒤로 토마스가 따라 들어왔습니다.”
문을 따고 침입한 것이 아니다. 즉, 놈은 미카엘 신부님을 찾아 여기로 왔고 밖에서 지켜보다 자연스럽게 침입할 수 있는 시기를 기다린 것이다.
“놈이 신부님 위치를 어떻게 알았을까요?”
“음…….”
잠시 고민하던 미카엘 신부님이 손가락을 튕긴다.
“아, 이것인 것 같습니다.”
신부님은 주머니를 뒤졌다. 하지만 핸드폰을 숙소에 두고 왔는지 빈 주머니만 더듬거리신다.
나는 신부님의 몸짓을 보고 내 핸드폰을 건넸다.
“혹시 제 핸드폰으로도 볼 수 있는 겁니까?”
“아, 예.”
신부님은 내게 핸드폰 잠금을 열어달라 부탁한 뒤 포털 사이트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검색 결과를 내게 내미신다.
그러자 이미지 검색란에 보육원을 배경으로 나무를 심고 있는 신부님의 환한 미소가 담긴 사진이 보인다. 신부님 뒤로 쌍문 성당이라는 현판이 보이고, 날짜는 한 달 전이다. 제목을 보니 뉴스의 기사 같아 보인다.
‘어린이가 없는 곳에 천국은 없습니다.’
언론사와 인터뷰를 한 모양이다. 검색한 단어를 힐끔 보니 ‘미카엘 신부’라는 단어로 검색기를 돌린 흔적이 보인다. 그래, 이런 기사가 났다면 장진수 놈이 여기 올 수 있겠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혹시 무슨 말을 했는지 여쭤도 될까요?”
신부님은 한숨을 쉬며 시선을 떨군다.
“나를 기억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기억한다고 하셨습니까?”
“예, 제가 토마스를 어찌 잊겠습니까? 기억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했습니까?”
신부님이 마른세수를 한다. 아직 마르지 않은 장진수의 피가 뭉개져 신부님 얼굴이 온통 시뻘겋게 변한다.
“내가…… 자기 인생을 망쳤다고 했습니다. 하…….”
이 개새끼가. 상대는 신의 말씀을 전하는 사제다. 그런 분께 그따위 생각 없는 말이 얼마나 큰 상처로 남는지 모르는 거야? 아니, 애초에 너 같은 새끼에게 그런 상식이 있었을 리가 없지.
“살인범의 말입니다. 온 정신의 소유자가 아닙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마세요.”
미카엘 신부님이 나를 가만히 바라본다. 그의 눈빛에 미안함이 가득하다.
“나는 토마스가 행복해지기를 바랐습니다. 내가 아이에게 한 모든 가르침은 아이의 행복을 위한 것이었는데. 제가 부족했습니다. 아이가 오해하고 잘못 들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했던 모양입니다.”
“아닙니다, 그건 신부님 탓이 아닙니다.”
“후.”
신부님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숙인다. 나는 신부님이 다시 힘을 내는 데 나의 위로보다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좀 더 질문하고 싶었지만 그건 천천히 해도 된다. 우리는 이미 살인범을 잡았고, 그 살인범은 지금 위독한 상태로 긴급 수술 중이니까.
나는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오늘은 큰일을 겪으셨으니 차후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쉬세요.”
신부님이 성호를 그으며 고개를 숙이신다.
“감사했습니다, 형제님.”
신부님 곁에서 멀어지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우리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던 관우가 노트북을 들고 다가온다.
“과장님. SOU로부터 저격수 액션 CAM과 맞은편 건물 CCTV 영상을 받아 왔습니다.”
SOU의 저격수는 항상 CAM을 달고 다닌다.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상황이 정당했는지에 대한 법의 심판을 받게 될 때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또한 맞은편 건물 CCTV 영상을 확보함으로 전후 상황을 자세히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차에 가서 보자.”
나는 관우를 데리고 다시 차로 돌아가 영상을 재생시켰다.
저격수는 숙소 창문이 보이는 맞은편 주택의 2층 계단 위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영화처럼 조준경을 통해 확대된 화면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저격수의 헬멧에 장착된 CAM이었기에 화면 속에 있는 창문은 매우 작게 보인다.
하지만 화질이 무척 뛰어나다. 관우가 몇 가지 조작을 한 뒤 다른 화면을 동시 재생하자, 맞은편 건물 CCTV가 동시에 재생된다. 비교적 깨끗한 화면으로 창문 내부의 상황이 보인다.
먼저 눈에 띈 것은 저격수가 도착하기 전, 맞은편 건물 CCTV의 화면이다.
맨 처음, 미카엘 신부님의 말씀대로 혼자 있던 그는 어떤 소리에 현관문 쪽을 바라본다. 그리고 직접 가서 문을 열어준 뒤 웃으며 소파를 가리킨다.
루이사 수녀님과 로사 수녀님이 쟁반에 떡과 차를 가져온 것이 보인다.
두 수녀님이 미소를 지으며 소파로 가는 도중 잔뜩 굳어진 미카엘 신부님의 얼굴이 보인다. 소파 쪽을 바라보고 있는 두 수녀님들과 달리 현관문 쪽을 보고 있던 신부님 눈에는 수녀님들 뒤에 들어오는 장진수가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신부님의 낌새가 이상함을 느낀 두 분 수녀님이 뒤를 돌아보셨다가 놀라 쟁반을 떨어뜨리며 물러난다. 모자를 푹 눌러쓴 장진수의 옆 모습이 보인다.
관우가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대화 소리는 녹음되지 않았습니다.”
당연한 이야기다. 맞은편 주택에서도 대화 소리가 들리면 이웃들이 어떻게 살겠는가?
“놈이 신부님께 찾아와 당신이 날 망쳤다며 원망했다고 했어.”
“하? 이 미친 새끼가.”
“장진수 어떻게 됐어?”
“아직 수술 중이요. 같이 파견된 형사 말로는 의사가 아주 위험한 상태라고 했답니다. 저격수가 복부를 겨냥했는데 이놈이 움직이면서 폐를 맞은 모양이에요. 미친 자식이 저격수가 있다고 미리 이야기까지 해줬는데. 다 인과응보 아니겠습니까? 제 놈이 한대로 받는 거죠.”
나는 관우 말을 들으며 영상을 뚫어지게 보았다. 장진수는 마스크를 쓰고 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신부님을 노려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신부님은 수녀님들 앞에 나서서 놈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신부님의 입은 움직이지 않고 있다. 대화를 시도하지 않았거나, 혹은 답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잠시 후 루이사 수녀님이 전화를 들어 보이며 받아도 되냐 허락을 받는 것 같은 모습이 보인다.
수녀님이 전화를 받고 핸드폰을 놈에게 넘겨준다. 나와 한참 통화를 하던 놈은 신부님이 옆으로 한 걸음을 움직이자 힐끔 보며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겨눈다. 신부님과 수녀님들이 손을 들며 굳는다. 얼마나 무서우셨을까? 장진수 이 개새끼.
한동안 통화를 하던 장진수가 힐끔 창밖을 바라본다. 내게 저격수가 배치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일 것이다.
잠시 후 전화를 바닥에 툭 던진 놈이 창밖을 자꾸 힐끔거리다 고개를 숙인다. 언뜻 포기한 것처럼 보이지만 다시 고개를 번쩍 든 놈이 갑자기 신부님께 달려든다.
화면이 급격히 흔들리고 피를 뿌리며 날아가는 놈의 복부와 허벅지에서 피가 튄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노트북을 닫았다.
“이 새끼가 수술 받고 있는 병원으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