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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기억-267화 (267/328)

살인의 기억 267화

19. 기억의 편린(11)

꿈을 꾸었다.

호접지몽(胡蝶之夢)이라고 했던가?

나는 꿈속에서 살인자가 되었다. 아니, 나는 악마가 되었다.

수많은 죄 없는 사람들에게 뽑아내 시냇물처럼 흐르는 피 웅덩이에 홀로 서서 비틀린 웃음을 입에 걸었다.

어둠 속에서도 뚜렷하게 보이는 검붉은 핏자국들.

그 속에 선 나의 얼굴은 계속해서 바뀌고 있다.

웃을 때는 장진수 얼굴로.

울 때는 나의 얼굴로.

무표정할 때는 늙은 오종식의 얼굴이었고.

노려볼 때는 김상식의 얼굴이 되었다.

모두가 내 안에 있는 모습 중 일부분일까?

내가 살인마가 된 것인지,

살인마가 내가 된 것인지 모를 꿈.

장자는 만물에 구분이 없다고 말했다. 장주가 나비 꿈을 꾸는 것인가, 나비가 장주 꿈을 꾸는 것인가?

그는 만물의 변화의 원리, 즉 도(道) 속에서 구분은 의미가 없다고 했다. 어느 한 관점을 갖고 고착될 나는 존재하지 않으며, 만물에는 구분이 없다는 것이다.

‘장주의 나비 꿈’은 역으로 ‘나비의 장주 꿈’과 차이가 없다. 나는 어느새 내가 상대하던 어둠에 잠식된 것일까?

어느 순간, 아래를 내려보니 내 발밑에 고인 피의 웅덩이가 소용돌이를 일으켜 나를 바닥으로 끌고 내려가는 것이 보인다.

나는 물끄러미 내 발을 끌고 들어가는 검붉은 웅덩이를 바라보았다. 저 속에 들어가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애처롭게 손을 뻗어보았지만 내 손을 잡아줄 자는 없다.

“야, 인마.”

아주 멀리서 누군가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웅덩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위를 바라보았다. 컴컴한 어둠과 검붉은 핏자국만이 가득한 어두운 방. 이 소리는 어디서 들려오는 걸까?

“자냐?”

환상같이 메아리치는 목소리. 조금만 더 크게 불러줘. 날 좀 깨워줘. 당신이 누구든. 내가 나락으로 떨어지기 전에 내 손을 잡아줘. 부탁해.

그때 어둠의 공간이 와장창 깨지며 누군가 내 어깨를 건드리는 것이 느껴진다.

“피곤하냐?”

강하게 밀친 것이 아니다. 그저 내 어깨에 누군가 손을 올려놓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구원의 손길보다 빠르게 나의 어둠을 부숴 버렸다.

가위에 눌렸다 깬 사람처럼 온몸을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난 나. 새하얀 병원의 복도, 강렬하고 눈부신 조명이 눈을 쑤셔온다.

하지만 나는 눈을 보호하려 감기려는 눈꺼풀을 억지로 붙잡았다. 다시 눈을 감으면 그 꿈속으로 돌아갈 것 같아서.

“왜 이래?”

그제야 내 옆에 서 있던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들썩이던 마음에 평온을 찾았다.

“아저씨.”

강혁 아저씨다. 아저씨는 자다 말고 갑자기 미사일처럼 튕겨 일어나는 날 보며 눈썹을 치켜세운다.

“너 이 새끼. 요즘 병원 안 가지?”

“…….”

아저씨가 내 귀를 잡고 비틀며 으르렁거린다.

“내가 이놈아, 병원 잘 다니라고 했어, 안 했어? 이리 와, 오늘 아주 그냥 몽둥이찜질을 해야 정신을 차리지.”

아프다, 심각하게 아프다. 나는 발뒤꿈치를 들어 귀가 비틀리는 고통을 덜어냈지만, 웃고 있다.

“아아, 아파요. 하하.”

“웃어? 내가 우습냐?”

“아뇨, 하하. 그냥 좋아서.”

“뭐가 좋아, 그새 변태라도 된 거냐? 귀 더 비틀어줘?”

“하하.”

개꿈일 거다. 별 의미 없이 지나가는 꿈. 하지만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버릴 만큼 무서운 꿈이었다. 꿈에서 본 광경은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나를 그곳에서 구해준 사람이 아저씨라는 것이 마냥 행복하다.

아저씨는 내가 자꾸 웃자 슬그머니 잡았던 귀를 놓으며 걱정스러운 얼굴이 된다.

“다른 놈들은 어디 가고 너만 남았어?”

나는 빙긋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잠깐 자고 오라고 했어요.”

아저씨가 도끼눈을 뜨며 소매를 걷어붙인다.

“뭐? 이 새끼들이 빠져 가지고. 감히 과장한테 보초 서게 하고 지들이 자빠져 자러 갔다고? 내 이놈의 새끼들을 아주 그냥!”

“하하, 제가 시킨 겁니다. 다들 피곤할 테니까.”

아저씨는 당장 뛰어나갈 기세였다가 날 가자미눈으로 훑는다.

“넌 뭐 철인이냐?”

“전 괜찮아요.”

“지랄, 괜찮다는 놈이 여기서 병든 닭처럼 땀 질질 흘리며 졸고 자빠져 있어?”

“가만히 기다리는 일뿐인데요 뭘. 잠이라도 자서 충전해 놔야 또 움직이죠.”

“말이나 못하면. 내가 속이 아주 시커멓게 썩는다, 너 때문에.”

걱정과 애정이 듬뿍 담긴 잔소리. 나는 아저씨 마음을 느끼며 물었다.

“어쩐 일이에요, 새벽부터?”

아저씨는 날 째려보다 손목시계를 보여준다.

“새벽이 아니라 아침 일곱 시다. 밤새 장진수 이 새끼 총 맞은 뉴스가 대한민국을 들썩거리게 한 놈이 그게 할 소리냐? 기자 브리핑이라도 해야 되는데. 네놈을 전면에 세울 수도 없고, 사건 사이즈도 있으니 내가 나서는 게 모양이 좋지. 이놈 이거 어떤 상태야? 오면서 대강 보고는 받았는데.”

나도 특별히 보고할 것이 없다. 그저 아저씨가 보고받은 그대로 몇 시간에 걸친 긴급 수술 중이고 아직 생사는 장담할 수 없는 상태라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아저씨는 내 이야기를 들으며 수술실 램프를 빤히 들여다본 후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한숨을 쉰다.

“이 새끼, 설마 그새 다른 사람 죽인 건 아니겠지?”

“아닐 겁니다.”

아저씨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날 바라본다.

“확신해?”

“아뇨?”

“이 새끼가 장난질을 치나.”

“하하, 그게 아니고.”

나는 놈과의 통화 내용에 대해 자세히 전달했다. 아저씨는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음, 확실히 희망적인 상황으로 보이기는 하는데. 근데 저놈이 지 작품 완성하러 온 게 아니라고 했다고?”

“네.”

“그럼 미카엘 신부는 왜 죽이러 온 거야? 정말 자기 삐뚤어진 종교관이 누구로 인해 내면에 심어졌다고 착각한 건가?”

“아마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원래 제정신이 아닌 놈이니까.”

강혁 아저씨는 잠시 날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미카엘 신부 쪽을 더 조사해.”

“네? 아니 그렇게 할 것까지는.”

사실 장진수 말이 사실이라도 미카엘 신부님을 법정에 세우는 건 불가능하다. 잘못된 종교관을 가르친 것이 위법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법률이 있다면 사이비 종교 교주들도 집어넣을 수 있겠지만 종교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기준 따위는 없기에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면 종교에 대한 법적 조치는 탄압이 된다.

아저씨가 짧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누가 신부님 감옥에 넣으라고 했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실히 알고 가자는 거지. 막말로 저놈 저게 일어나면 몰라, 그냥 뒤지면 어쩔 거야? 뭔 짓을 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뒤지면? 과거라도 알아야 유추를 하지, 인마.”

“음.”

일리는 있다. 물론 장진수가 저대로 죽는다는 가정하의 일이지만.

그때 수술실 자동문이 열리며 피곤한 기색의 의사 세 명이 나오는 것이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이 수술한 사람이 누구인지 이미 아는지 우릴 보자마자 다가와 물었다.

“경찰에서 나오셨죠?”

강혁 아저씨가 슬쩍 물러난다. 의사가 자신이 경찰청장임을 알면 당연히 굳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아저씨의 신호를 알아챈 내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예, 어떻게 됐습니까?”

맨 앞에 선 의사가 한숨을 쉰 후 말했다.

“일단 허벅지에 박힌 두 발의 총알은 제거했고, 폐 쪽은 관통상이었습니다. 흉벽이 열려서 압력이 소실되어 폐의 허탈을 초래했고, 체액을 비롯한 이물질이 흉강에 괴게 되어 기능에 장애가 생겼습니다. 현재 흉강 배액 상태이며 의식 불명입니다.”

“위독한 상황입니까?”

“수술은 잘되었습니다, 중환자실에서 회복을 지켜보는 것이 최선입니다. 본인 의지만 있다면 회복 가능한 수준입니다.”

후, 다행이다. 죽지는 않겠구나. 기자들에게 브리핑을 해야 하는 아저씨도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이 보인다.

나는 의사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장시간 수술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덕분에 중요한 범죄자의 진술을 놓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여섯 시간이 넘는 대수술에 지쳤는지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다른 의사들과 함께 사라졌다.

아저씨가 의사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세상 좋아졌네. 총을 세 발이나 맞아도 살아나고. 난 영락없이 죽은 줄 알았는데. 어찌 됐건 최악의 경우는 면했네. 이 새끼 중환자실 들어가면 바로 면회는 불가능하겠지?”

“아마, 음압 병동에 들어갈 확률이 높으니 그렇겠죠.”

“순경 열 명쯤 차출해서 교대로 중환자실 돌릴 테니까 너도 그만 들어가. 여기 있다고 뭐 나오는 거 없을 거다. 혹시 이놈 깨면 연락해 줄 테니까.”

아저씨 말처럼 언제 깨어날지 모를 놈을 기다리는 건 시간 낭비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기자회견 잘 부탁드려요.”

아저씨는 기자회견을 싫어하는 티를 팍팍 내며 중얼거린다.

“기자는 씨X, 내가 전생에 기자였던 모양이다. 죄가 많아, 죄가…….”

중얼거리며 회견장으로 가는 아저씨 뒷모습이 오늘따라 웃기다.

* * *

오후 네 시.

병원 인근에 있는 사우나에서 한숨 잔 나는 다시 병원에 들렀지만 여전히 혼수상태라 면회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확인하고 청으로 돌아왔다.

다들 좀 자고 나왔는지 안색이 나아 보이는 팀원들이 날 맞아준다.

“과장님, 잠은 좀 주무셨습니까?”

“얼굴이 퉁퉁 부으셨는데. 그러니까 저한테 맡기고 과장님이 좀 쉬시라니까.”

“과장님, 안 피곤하세요?”

다들 내 걱정을 한다. 나는 웃으며 팀원들을 보았다.

“나도 자고 왔어, 목욕도 했고.”

다들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쉰다. 나는 시간을 확인 후 말했다.

“관우야, TV 좀 틀어줄래?”

관우가 얼른 리모컨으로 TV를 켜며 말했다.

“안 그래도 하루 종일 앵커들이 장진수 이름만 불러대고 있어요. 보통 이러면 장 씨나, 장 모 씨라고 나오는데 이 새끼가 첫 사건 때 지 이름 공개 요청해서 그런지 뉴스에서 대놓고 이름이 막 나오네요.”

TV 화면 속, 기자회견장.

단상에 선 강혁 아저씨가 브리핑하는 모습이 보인다. 아저씨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여성의 앵커의 말이 소리를 대신한다.

[경찰은 오늘, 탈옥한 연쇄살인범 장진수를 체포했음을 공표했습니다. 체포 과정 중에 범인이 경찰 특공대 저격수의 총에 맞는 사고가 있었으나, 생명에 지장이 없으며 현재 수술 후 회복 중에 있다는 발표입니다. 전문가들은 공개수사 전환 즉시 범인을 체포한 것이 국민의 투철한 제보 정신과 경찰의 빠른 판단에 기인한다며 일제히 찬사를 보냈습니다. 반면 탈옥수를 만든 교정 본부에 대해서는 좀 더 강력한 인사 징계가 있어야 할 것이라는 국민들의 청원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진규가 팔짱을 끼고 뉴스를 보며 한숨을 쉰다.

“교정 행정 본부 쪽에는 좀 미안하지만 그래도 우리 쪽으로 불똥이 튀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되나.”

관우와 연주도 다행스럽다는 얼굴이 된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아직 상황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놈이 다른 이를 죽이지 않았을 거란 것은 어디까지나 내 추측일 뿐이다. 나는 놈의 기억을 읽어본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절대 확신할 수 없다.

나는 시간을 힐끔 확인한 뒤 팀원들을 보며 말했다.

“아직 긴장 늦추지 마세요. 만약 놈이 탈옥 후 사람을 죽였다면 여론의 돌팔매는 다시 우리 쪽을 향하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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