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270화
19. 기억의 편린(14)
“어머, 새별아! 밖에 보지 말라고 했잖아.”
뒤에서 로사 수녀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얼른 수녀님을 불렀다.
“수녀님! 저 도경입니다.”
뭔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버선발로 뛰어나와 창살을 사이에 두고 손을 내미는 수녀님.
“도경아!”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창살을 눈짓한다.
“문 좀 열어주세요.”
수녀님이 얼른 주변을 둘러본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순경들 시켜서 놀이터 밖까지 사람들 내보냈어요. 이제 갇혀 있지 않으셔도 됩니다.”
로사 수녀님이 한숨을 쉰다.
“고마워, 아! 내 정신 좀 봐. 문 열어줄 테니 어서 들어와.”
수녀님이 얼른 돌아 들어가 현관 미닫이문을 열어주시고는 날 안아주신다.
나는 로사 수녀님 등을 두들겨 드린 후 보육원을 둘러보았다.
겁먹은 아이들이 거실 구석에 몰려 있다. 그 좋아하는 TV도 안 보고 거실 모서리에 뭉쳐 있는 아이들. 그나마 나는 낯이 좀 익을 텐데도 가까이 다가오는 아이가 없다.
“루이사 수녀님은 어디 계세요?”
“어, 주방에. 애들 밥 준비하고 있었어.”
그 난리를 겪고도 아이들 끼니부터 챙겨주시는 수녀님들. 겉으로는 연약해 보여도 내면은 매우 강한 분들이다. 일반인이었다면 충격으로 병원에 입원을 했을 텐데. 수녀님들은 여느 때와 같이 아이들부터 챙기신다. 이런 분들이니 나도 이렇듯 잘 큰 것이겠지.
나는 부엌으로 가 루이사 수녀님을 가만히 보았다. 카레라이스를 하시는지 감자를 썰고 계셨는데 손이 떨려 그런지 몇 번이나 칼을 미끄러뜨리는 수녀님. 저러다 손 다치시겠다.
나는 상의를 벗고 손을 씻으며 말했다.
“수녀님.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어머나, 도경아. 언제 왔니?”
“좀 전에 왔어요. 주세요.”
평소 같으면 절대 주방을 내주지 않을 루이사 수녀님. 하지만 오늘은 자기가 생각해도 도저히 칼을 잡을 수 없는 상태임을 인정하셨는지 선뜻 부엌칼을 내주신다.
나는 감자 앞에 서서 말했다.
“이거 다 썰고 또 뭐 썰어요? 양파? 고기?”
“어, 양파 내가 까줄 테니까 좀 썰어줘.”
“네, 맡겨두세요.”
수녀님 두 분과 부엌에서 아이들 식사 준비를 하고, 고소하고 매콤한 카레가 냄비 속에서 부글부글 끓을 때쯤 나는 두 분 수녀님을 모시고 아이들이 듣지 않는 방으로 가 손을 꼭 잡았다.
“마음고생 많으셨죠?”
낯빛이 어둡지만 억지로 웃는 두 분 수녀님. 루이사 수녀님이 내 손을 만지며 말했다.
“우린 괜찮아. 우린 고작 잠깐 그런 사람을 마주했지만 우리 도경이는 항상 보고 살 텐데. 그 생각을 하니까 가슴이 미어지네.”
로사 수녀님도 고개를 끄덕이며 내 머리를 만져주신다.
“우리 도경이가 많이 힘들겠다.”
서른을 넘어 중반으로 달려가고 있는 나이. 누군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 것이 무척 어색하게 느껴질 나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수녀님들의 손길은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나는 빙긋 웃으며 두 분을 안아드렸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순찰, 경호 인력 배치했으니까 안심하세요.”
루이사 수녀님이 물었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됐어?”
“병원에 있어요.”
“생명에는 지장 없고?”
“네, 긴급 수술 하고 나서 이제 회복하고 있어요.”
“다행이다.”
내 입장에서는 다행인데. 수녀님 입장에서도 다행일까? 덕분에 이렇게 경찰 병력들에게 갇혀 얼마간 사셔야 할 텐데. 나는 두 분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힘드시겠지만 그날 놈이 무슨 말을 했는지 생각해 봐 주실 수 있을까요?”
수녀님들의 얼굴이 흙빛이 된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모양이다.
“너무 힘드시면 천천히 하셔도 돼요. 놈이 잡혀서 이제 여유가 좀 있으니까.”
물론 정말 나중에 진술하라는 뜻은 아니다. 놈이 잡혔다는 이야기로 안심을 시켜주기 위해 꺼낸 말이다.
루이사 수녀님이 자기 팔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밤 아홉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는데 그날 로사와 내가 떡을 했거든. 솔잎 떡 기억나지? 너도 어릴 때 많이 해줬는데.”
물론 기억난다. 솔직히 그거 맛은 별로 없다. 하지만 이상하게 나이 지긋한 어른들은 곧잘 드셨다. 수녀님이 만드는 떡이 최고라며 떡만 하면 성당에 찾아오는 동네 아저씨도 있을 지경이니까.
수녀님 말로는 예전에 한국이 못사는 시절에 보릿고개가 찾아오면 산에 가 솔잎을 따다 떡을 해 먹었던 추억 때문일 거라고 하셨다.
“떡을 갖다 드리기엔 좀 늦은 시간 아닌가요?”
루이사 수녀님이 말을 이었다.
“미카엘 신부님이 우리 성당에 오신 후로 매일 개인 미사를 지내시고 아홉 시 반쯤 침소에 드시는 걸 알고 있었거든. 개인 미사 전에 저녁을 드시니까 미사 드리고 난 후에 갖다 드리면 좋겠다 싶어서 로사와 같이 갔어.”
“나갈 때 이상한 점은 없었고요?”
“응, 난 못 봤어.”
“동선이 어떻게 돼요?”
“음…… 애들 씻기고 부엌에 들러서 차 끓여서 떡과 함께 들고 바로 숙소로 갔어.”
성당의 구조를 떠올려 보자.
이곳엔 크게 세 곳의 건물이 있다. 쭉 이어진 세 개의 건물 중 중앙이 성당 건물이며 셋 중 규모가 제일 크다.
보육원은 성당의 좌측에 있고, 신부님 숙소는 성당의 우측에 있다. 보육원에서 나와 성당을 지나 숙소로 가신 것이다.
“그 시간에 성당 문 열어둔 상태였나요?”
이번에는 로사 수녀님이 말했다.
“응, 밤에 기도드리러 오는 형제님들을 위해 요즘은 늘 개방해 둬.”
“새벽에도 개방해 둬요?”
“응.”
놈은 성당에 숨어 있었을까? 아니면 성당 맞은편 빌라 어딘가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맞은편 건물 CCTV 영상을 보니 놈이 수녀님들 뒤를 따라 숙소로 들어가던데.”
루이사 수녀님이 한숨을 쉰다.
“응, 숙소 문은 스프링 장치 때문에 문을 닫지 않아도 자동으로 닫히거든. 그래서 우린 보통 문 닫히는 걸 따로 확인하지 않아. 그날은 떡과 차를 가지고 오느라 손에 여유가 없어 더 그랬고.”
일반적인 아파트 현관문과 같은 구조의 숙소 문. 문을 연 뒤 스스로 닫히는 문이며, 도어 록 장치가 있어 잠기는 것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문이다. 수녀님들 입장에서 뒤를 경계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다.
“누가 따라오는지 전혀 모르셨던 거죠?”
“응, 신부님이 문을 열어주셨어. 우린 떡과 차를 좀 가져왔다고 했고. 신부님이 웃으며 숙소 거실 소파에 앉으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신발을 벗고 소파 쪽으로 가는 중에 신부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거야. 반사적으로 뒤를 바라봤는데 손에 칼을 든 그 남자가 서 있었고…… 그 사람 뒤로 우리가 열고 들어온 문이 닫히고 있었어.”
“놈이 처음부터 신부님을 죽이려 하던가요?”
루이사 수녀님이 흠칫 놀라며 몸을 부르르 떤다. 하지만 강인한 분답게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을 이으신다.
“아니, 한동안 신부님을 노려봤어.”
“말은? 말은 안 했어요?”
“말은…… 미카엘 신부님이 먼저 하셨어.”
“뭐라고요?”
“토마스……라고 했어.”
장진수의 세례명이다. 미카엘 신부님은 놈을 한 번에 알아보셨다. 다시 수녀님이 말을 잇는다.
“그리고 네게 전화가 왔어. 처음에는 전화를 끄려고 했는데 네 전화번호인 걸 보고…… 어떻게든 전화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어.”
난 이 대목이 이상했다. 칼을 들고 위협하던 놈이 전화를 받게 해줬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놈이 전화받으라고 하던가요?”
놈은 내 이름을 안다. 만약 놈이 전화기에 뜬 내 이름을 보고 전화를 받으라고 했다면? 그것도 말이 안 된다. 놈은 내가 이 보육원에서 자란 것을 모르고 있었다.
루이사 수녀님이 자기 전화를 가져와서 바닥에 내려둔다.
“떡과 차를 바닥에 내려놓을 때 그 옆에 내 전화기도 이렇게 내려두었어. 그래서 전화기를 꺼내지 않고도 네게서 온 전화임을 알았지. 그 사람 눈치를 보면서 얼른 전화기를 끄려고 하다가 네 전화인 걸 알고 어떻게 하면 전화를 받을 수 있을까 고민했어. 고민 끝에 보육원에 있는 아이 전화인데 애가 몸이 아파서 전화를 꼭 받아야 된다고 했어. 그랬더니 받으라고 했고.”
살인범이 자신과 관계도 없는 아픈 아이 전화를 받으라고 했다고? 그런 상황에? 일반인도 아니고 추악한 살인마에게 그게 가능한 선택이었을까?
로사 수녀님이 겁먹은 얼굴로 손을 떠신다.
“너와 통화를 하고…… 갑자기 그 사람이 신부님께 달려들었고…… 큰 소리가 나면서 피, 피가 튀고…… 우리는 소리를 지르며 굳어 있었어. 그리고 헬멧을 쓰고 총을 든 경찰특공대가 들어와 그 사람 목을 만져본 뒤에 아직 살아 있다고 소리 지르며 구급차를 불렀고.”
“따로 신부님께 말한 건 없고요?”
“신부님께 말한 건 없는데. 쓰러진 후에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어.”
“뭘 중얼거려요?”
로사 수녀님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엄마……라고.”
나는 실소를 참지 못했다. 지 손으로 죽인 엄마를 찾아? 아마 그건 엄마를 찾았다고 하기보단 버릇처럼 아플 때 찾는 엄마 소리일 것이다. 엄마 얼굴도 못 본 내가 어릴 때 다치면 수녀님을 부르짖었던 것처럼.
“혹시 놈이 들어올 때 손에 책 같은 건 안 가지고 있었나요?”
“책?”
“네, 성경책이나 가죽으로 된 노트 같은 거.”
“못 봤어.”
“음.”
나는 아까 보육원 창살 너머로 새별이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혹시 아이가 놈을 본 걸까? 나는 잠시 고민했다. 새별이는 아직 어리다. 이제 막 일곱 살이 된 아이가 제대로 된 진술을 할 수 있을까?
“수녀님.”
“응?”
“갑자기 이런 말씀 드리긴 좀 그런데.”
“무슨 일 있어?”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수녀님 쿠키 몇 개만 주실 수 있어요?”
수녀님들은 황당한 얼굴이 된다. 하지만 곧 따뜻한 웃음을 보내주신다.
“우리 도경이가 수녀님 쿠키가 먹고 싶었구나? 그래, 그게 네게 힘이 된다면 얼마든지 줘야지. 어릴 때처럼 막 먹으면 안 된다? 알지?”
“에이, 저 나이가 몇인데.”
“하하, 알았어. 줄 테니까 기다려.”
“저 수녀님.”
“응?”
“새별이 좀 불러주시겠어요?”
“새별이는 왜?”
“아, 뭐 좀 물어보려고요. 새별이 여기 맡긴 사람이 저인데 너무 신경을 못 써준 것 같아서요.”
“아, 그래. 알았어.”
수녀님 두 분이 방을 나가신다. 잠시 후 루이사 수녀님이 먼저 쿠키와 차를 가져오셨고, 로사 수녀님이 뒤를 이어 새별이 손을 잡고 오신다.
나는 쿠키와 차를 등 뒤에 숨겨둔 후 수녀님께 말했다.
“잠깐 새별이와 둘이 이야기 좀 할게요.”
“응? 둘이?”
“네, 비밀 이야기라서.”
나는 새별이에게 윙크를 하며 슬쩍 엉덩이 한쪽을 들어 뒤에 숨긴 쿠키를 보여주었다. 새별이는 눈이 커지며 날 바라보고 있다.
나는 새별이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
“우리 새별이. 아저씨와 둘이 비밀 이야기 할 거 있지?”
새별이가 큰 눈망울로 날 바라보다 수녀님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응! 나 아저씨랑 비밀 이야기.”
로사 수녀님이 웃음을 지으신다.
“둘이 소원하더니 이제 많이 친해졌네. 그래, 이야기 나눠. 그리고 현도경.”
“네?”
“새별이 쿠키 한 개만 줘.”
“…….”
역시 내 속을 다 아시는 수녀님. 나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피식 웃은 수녀님이 문을 닫고 나가신다.
나는 기대에 부푼 새별이 앞에 쿠키를 꺼내놓으며 말했다.
“한 개는 내가 먹었다고 할 테니까 두 개 먹어. 총 세 개니까 하나는 숨겨뒀다가 나중에 먹고. 알았지?”
“응!”
“이건 우리 둘만 아는 비밀이야, 알았지?”
“응!”
새별이는 손에 쥐여준 쿠키를 베어 먹으며 행복한 얼굴로 웃는다. 그게 그리도 좋을까? 하긴 저 쿠키는 나도 어릴 때 환장하며 먹었지.
“새별아.”
쿠키를 오물거리는 귀여운 아이가 날 바라본다.
“어제 본 아저씨 말이야. 우는 아저씨. 그 아저씨 이야기 좀 해줄래?”
새별이가 눈동자를 굴리다 배시시 웃는다.
“비밀 이야기?”
“응, 비밀 이야기. 너와 나 둘만 아는 비밀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