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272화
19. 기억의 편린(16)
삼 일 후.
우리의 하루는 언제나 금세 지났지만 현재는 비교적 한가로운 시간이다. 이미 탈옥수가 체포되어 병원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놈이 언제 누구를 죽일지 몰라 좌불안석하는 시간이 아니라 그런지 약간 느슨해진 우리.
나는 지난 삼 일간 놈의 말 때문에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하지만 역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모든 진실은 놈의 일기장에 있을 것인데 의사가 면회를 하지 못하게 하니 방법이 없다.
나는 두 시간에 한 번씩 병원에 전화를 걸어 놈의 상태를 확인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한결같았다.
‘아직 의식이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당분간 면회는 금지입니다.’
병원 입장에서도 꽤 짜증이 난 모양이다. 나만 전화하는 것이 아니라 기자들도 극성이라 십 분에 한 번씩 전화가 울린다며 간호사가 울상이다. 미안하지만 그건 나도 어쩔 수 없는 문제라 내가 도울 일은 없을 것 같다.
오진규는 놈의 아지트를 찾기 위해 지원을 요청했고, 장영훈 본부장님은 통 크게 서울시에 소속된 형사들 중 각 서에서 몇 명씩, 총 백 명의 형사를 지원해 주었다. 경험 많은 오진규가 백 명의 형사를 끌고 갔으니 분명 어떤 성과를 낼 것이다.
나는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물론 그 기다림이 무척 힘들지만.
턱을 괴고 컴퓨터 화면을 보던 나는 윈도우 화면 맨 아래 메모 스크랩들을 보았다.
나는 그곳에 사건에 관계된 여러 자료들 중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기록하는 버릇이 있다. 이렇게 시간이 날 때면 메모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다 불현듯 사건의 새로운 수사 방향이 생각날 때도 있다.
장진수에 대한 메모들을 훑어보던 내 눈에 제일 구석에 쓴 메모가 들어온다.
묘산 추모공원 5-438
성명 : 하나은
1960년 9월 13일 출생
2023년 11월 10일. 북한산 보광사 뒤편 5㎞ 지점에서 백골 사체로 발견
1987년 경사 진급 후 퇴직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사람. 만약 장진수 사건이 연달아 터지지 않았다면 나는 이 여자에 대해 조금 더 조사해 봤을 것이다.
나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여자와 관계된 기억은 강혁 아저씨의 기억.
그리고 나는 아저씨 기억을 읽을 때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두통과 어지러움. 그것에 답이 있어.’
스스로의 기억을 읽을 때 두통과 어지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충분히 가능한 추론이다. 물론 추론일 뿐이지만.
맨 처음 이 경험을 한 것은 정신의학과 상담 시간이었다. 쫓기고 있는 여성. 그리고 버려지는 아이. 혹시 그건 나였을까?
내 생일은 1989년 3월 17일이다. 기억 속에서 아이가 버려진 시점의 신문 날짜는 동년의 3월 10일. 내 생일과 일주일 차이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나는 버려졌고, 며칠간 보호자를 기다리다 조금 늦게 출생신고를 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니까.
만약 그녀가 내 엄마였다면. 버려진 아이가 나였다면?
로사 수녀님은 성당의 외벽 색이 예전부터 따뜻한 갈색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기억 속 성당은 붉은색 벽돌 건물이었다. 어렴풋이 내 기억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애써 부정했다.
솔직히 이제 와 버려졌을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제 기억나서 뭘 어쩌겠는가?
하지만…….
‘기억 속 그 여자. 아기를 버리고 싶어서 버린 게 아니다.’
그녀는 쫓기고 있었다. 그리고 위험에서 아기를 보호하려 했다. 그녀가 쫓기던 대상 방향으로 뛰어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녀는 성당 앞에 아기를 내려두고 자신을 쫓는 포식자의 방향으로 뛰었다. 그건 놈의 신경을 아기에게서 돌리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아기를 구하려고 한 거다.’
만약 그 기억 속 아기가 나라면.
엄마는 다시 날 구하러 오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그러니 보육원에서 길러졌겠지.
나는 인터넷을 열어 쌍문 성당을 검색했다. 꽤 많은 사진이 나온다. 성당 측에서 올린 사진도 있고, 개인 블로거가 올린 사진들도 있다. 하지만 모두 갈색 벽돌 건물의 성당 앞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그때 햄버거를 입에 문 관우 목소리가 들린다.
“뭐 하세요, 과장님?”
관우가 어느새 내 뒤에 와 함께 모니터를 보고 있다.
“어, 아니다.”
수사 중인 사건과 관련 없는 개인적인 일이다. 이건 따로 알아봐야 할 문제다. 관우가 새 햄버거 하나를 내민다.
“드실래요?”
“어, 그래. 고맙다.”
회전의자를 빙글 돌려 뒤에 서 있던 관우와 마주 보며 햄버거 포장지를 뜯었다. 고소한 냄새가 나는 치즈 버거. 나는 햄버거를 한입 물며 빙긋 웃었다.
“맛있네.”
관우가 씩 웃으며 창밖을 바라본다.
“장진수 이 새끼가 깨어나야 일이 좀 진행될 텐데. 이건 뭐 사건이 끝난 것도 아닌데 할 일이 없으니 되게 생소한 기분이네요. 이런 적은 처음이라 뭘 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할 일 없어?”
관우가 머리를 긁으며 민망하게 웃는다.
“예, 그러네요. 차라리 나가서 오 선배님 수색이나 도울까요?”
하긴 관우 전문분야의 수사는 모두 끝냈다. 별 수확은 없었지만 일단 모두 확인해야 하는 것들이라 이틀에 걸쳐 영상 분석을 끝낸 관우는 오늘 출근해서 종일 할 일이 없어 좀이 쑤신 모양이다. 그렇다고 없는 일을 만들어서 줄 수도 없다.
“그냥 쉬어. 쉴 수 있을 때.”
“에이, 그건 성미에 안 맞아서.”
“게임을 하든가.”
“설마 사무실에서 게임을 하라는 말씀이세요? 여기 경찰청인데?”
음, 그건 좀 그런가? 관우가 내 모니터 화면을 힐끔 보며 물었다.
“근데 저기. 쌍문 성당 아닙니까?”
요즘 수사하는 곳에다 며칠이나 성당 앞 CCTV를 보고 있어 그런지 바로 알아보는 관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거긴 왜 보고 계세요?”
“…….”
뭐라고 설명해야 될까? 음, 설명하기는 좀 그렇다. 일찌감치 설명은 포기하는 편이 빠르겠지. 잠깐. 관우 녀석 지금 할 일이 없다고 했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런 쪽 찾아내는 건 이 녀석이 최고인데.
“너…… 지금 진짜 할 일 없어?”
“네, 심심해 죽겠습니다. 일 좀 주세요.”
“하하.”
“뭔데요, 뭔데.”
나는 몸을 돌려 화면을 보여준다.
“보다시피 쌍문 성당이다. 외벽이 갈색이지?”
“예.”
“근데 성당 외벽이 붉은색이었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아서.”
“예?”
그게 뭔 소리냐는 표정.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번 사건과 연관은 없어. 그냥 내 기억에 어릴 때 분명히 본 것 같은데 어느새 갈색으로 변해 있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서.”
“음.”
“언제 변했나 궁금해서 한번 검색해 봤는데 안 나오더라.”
아무리 할 일이 없어도 이런 쓸데없는 일에 에너지를 소모하고 싶진 않겠지. 나는 씩 웃으며 인터넷 창을 내렸다.
“그냥 별일 아니다. 그냥 신경 꺼.”
관우는 턱을 쓰다듬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음…… 검색 창에 뭐라고 쓰셨어요?”
“쌍문 성당.”
“히히.”
“뭐야, 왜 웃어?”
“5분만 주세요, 제가 찾아드리겠습니다.”
“음?”
관우는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했다는 표정으로 쏜살같이 제자리로 뛰어간다. 이런 게 뭐가 재미있다고 새 장난감 발견한 어린이 같은 표정을 짓는지 참. 최영현이 관우를 변태 오타쿠라고 부르는 이유가 저런 면 때문일까?
뭐 시간을 빼앗아 봐야 고작 오 분. 그때까지 못 찾으면 그만두라고 할 작정이다. 내 개인적인 호기심에 팀원을 동원하면 안 되니까. 하지만 천재 관우는 일 분도 안 되어 손을 번쩍 든다.
“찾았습니다!”
“…….”
찾았다. 나는 녀석에게 붉은 벽돌 건물일 당시의 성당에 대해 말했다. 찾았다는 건 진짜 쌍문 성당이 붉은 벽돌로 지어진 시절이 있었다는 뜻. 그것은 내가 읽었던 기억이 내 기억일 수 있다는 확률을 더욱 높이는 결과가 된다.
나는 순간 긴장했다.
“붉은 벽돌…… 진짜로 붉은 벽돌 건물인 시절이 있었어?”
관우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1990년 1월이네요. 어? 근데 과장님 89년생 아닙니까? 이때 기억이 나실 리가 없는데.”
1990년 1월. 내가 아직 만 한 살이 되기 전이다. 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움직여 관우 자리로 향했다.
관우가 PC 모니터를 내 쪽으로 돌리는 순간 나는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다. 관우가 찾아낸 사진. 그것은 성당으로 검색한 결과가 아니었다.
관우가 턱을 괴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검색 옵션에 쌍문 성당과 쌍문동 둘 다 넣어서 찾았습니다. 성당이 주가 된 뉴스는 아니지만 사진 뒤에 성당이 걸려서 나온 거고.”
“…….”
나는 떨리는 눈으로 관우가 보여준 사진을 바라보았다. 관우는 내 낌새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 물었다.
“왜 그러세요, 과장님?”
“…….”
관우가 보여준 사진. 그것은 오래된 신문 기사의 내용이었다.
이름 모를 블로거가 사라진 쌍문동 옛 풍경에 대해 이야기한 개인 블로그. 그리고 그 게시물의 제목은…….
‘사라진 쌍문동 치약 공장. 이제는 추억 속으로.’
컬러 사진이지만 매우 화질이 나쁜 이미지 파일. 그것은 인터넷 기사가 아닌 신문 기사를 스크랩한 사진이었다.
사진 속에 회색 벽의 치약 공장 앞에서 마지막까지 공장을 지킨 직원들을 찍은 모습이 들어 있다. 그리고 그들의 뒤로 붉은 벽돌의 쌍문 성당이 반쯤 걸쳐 찍혀 있다.
‘치약 공장. 붉은 벽돌 성당.’
나는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역시 그건 내 기억이었다.’
나는 고개를 획 돌려 내 PC를 보았다. 아까 본 메모. 그 속의 이름. 그녀도 나와 관계가 있는 사람일 거다.
나는 의아한 눈빛을 보내는 관우를 뒤로하고 핸드폰을 꺼내 목 과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어 도경아. 또 뭐가 나왔냐?
“과장님. 뭐 하나 여쭤보려고요.”
-어, 뭔데?
“사인 불명 백골 사체 나오면 DNA 보관해 두죠?”
-보통 그렇지?
“2023년 11월 10일. 북한산 보광사 뒤편 5㎞ 지점에서 나온 시신에 대한 기록 좀 확인할 수 있을까요? 이름은 하나은입니다.”
-음, 잠깐만.
PC 앞에 계셨는지 키보드 소리가 난다.
-음, 여기 있네. 이거 뭐야? 경찰 근무 경력이 있는 사람이네? 퇴직 후에 실종된 것 같고.
“네, 맞습니다.”
-그래, 뭘 알아봐 주면 되냐?
나는 잠시 말문을 닫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전화한 것은 맞지만 혹시 진짜이면 어쩌지? 하는 마음도 든다.
나는 주먹을 들어 내 팔목을 바라보았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해 팔뚝에 힘줄이 돋아나게 한 나는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
“DNA 대조. 그거 할 수 있죠?”
-어? 뭐…… 할 수는 있지. 샘플은 있고?
“네.”
-보내, 해줄 테니까.
“지금 갑니다.”
-직접 오게? 뭐 중요한 거야?
“네, 잠시 후에 가겠습니다.”
-음, 알았다.
전화를 끊자 옆에서 듣고 있던 관우가 얼른 일어난다.
“KCSI 가는 거면 제가 갈게요. 샘플 어디 있습니까?”
“…….”
나는 말없이 상의를 집어 들었다.
“내가 직접 가.”
“에이, 뭐 그런 잡일로 과장님이 직접 가세요. 제가 가면 되는데.”
“괜찮아.”
이건 네가 할 수 없는 일이야. DNA 대조 샘플이 나 자신이니까.
나는 지금 무척 겁이 난다. 그녀는 강혁 아저씨와 무슨 관계였던 걸까? 그리고 만약 백골로 발견된 시신이행여라도 내 엄마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