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인의 기억-275화 (275/328)

살인의 기억 275화

19. 기억의 편린(19)

KCSI가 내부 조사를 시작하는 동안 일단 밖에서 기다리던 나는 관우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어, 관우야.”

-과장님, 실시간 범죄 보고 모니터링 시키신 거 있잖아요?

“그거 연주에게 시킨 일인데.”

-예, 연주가 사건 몇 개에서 나온 CCTV 분석을 요청해서 확인 중에 장진수 모습으로 보이는 현장이 있어 보고드립니다.

나는 순간 긴장했다. 놈은 내게 탈옥 후 살인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게 거짓말이었을까? 나는 약간 긴장한 어조로 말했다.

“무슨 사건인데?”

-강북구 우이동에서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난 절도 사건입니다.

“……피해자는?”

-빈집 털이 사건이라 피해자는 안 나왔습니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피해 금액은?”

-집에 있는 현금만 가져갔답니다. 세 건 모두 합쳐 50만 원 정도입니다.

“장진수 모습이 CCTV에 찍힌 건가?”

-얼굴을 가리고 있었습니다만, 보행 분석 결과 놈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때 부동산 계약서를 가지러 갔던 주인이 돌아온다. 나는 통화를 이어가며 손을 내밀었다. 내키지 않는 얼굴로 계약서를 내미는 주인.

나는 그의 손에서 계약서를 빼앗은 후 눈으로 서류를 확인하며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일단 알았다.”

-거긴 좀 어때요? 뭐 좀 나왔습니까?

“아직 KCSI 조사 중이야. 저거 끝나면 들어가 봐야지.”

-저도 갈까요?

“됐어, 여기 오 선배님도 계시니까 넌 거기서 지원해 줘.”

-예,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나는 계약서의 마지막 부분에 기재된 대여 금액을 확인하며 턱을 쓰다듬었다.

“월세 50만 원.”

계약금은 없다. 월세 50만 원. 매달 1일 선금에 3개월 렌트. 전입신고 불가, 현금영수증 발행 불가. 이것이 대여 조건이다.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놈은 탈옥 후 편의점 앞 ATM기기에서 50만 원을 찾았다.’

그리고 양계장을 털어 옷을 갈아입은 후, 택시를 타고 서울에 왔다. 그때 지불한 택시비는 30만 원. 놈에게 20만 원이 남았다.

탈옥 직후 내려간 우리는 관우 덕에 놈이 ATM 기기에서 현금을 인출한 것을 알아냈고, 즉시 계좌를 동결했다. 그러므로 놈은 더 이상 돈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남은 20만 원으로 버텨야 했을 텐데 모텔에 가면 일주일도 못 버틴다. 돈을 아끼기 위해서는 이런 숙소가 필요했을 것이다.

놈은 이 숙소를 얻기 위해 절도를 저지른 것이다. 다행이라면 말이 좀 이상하지만 이 와중에 살상은 없었다.

나는 건물주를 힐끔 본 뒤 계약서를 챙겼다.

“일단 알겠습니다, 서로 가셔서 조사에 응해주셔야 되니 준비하세요.”

건물주가 한숨을 쉰다. 살인사건이나 범인의 탈옥을 도운 것은 아니나, 부동산거래법 위반 사실은 어쩔 수 없으니 포기한 모양이다. 몇 푼 아끼자고 이 난리가 났으니 앞으로 이런 짓은 안 하겠지.

그때 KCSI 대원 한 명이 계단 밑으로 내려와 말했다.

“1차 조사 종료됐습니다. 장비 착용하시고 진입하세요.”

구석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던 오진규가 얼른 담배를 끈 후 달려와 장비들을 챙겨준다.

장갑과 발싸개, 머리카락을 감싸는 헤어 커버까지 쓴 우리는 천천히 계단 위로 올라갔다. 아주 좁은 계단은 사람 한 명이 겨우 올라갈 수 있을 만큼 비좁다.

오진규는 2층에 올라가자마자 혀를 찬다.

“이야, 이런 집도 렌트가 되는구나. 이게 무슨 집이야, 개집도 이것보단 낫겠네.”

오진규의 목소리를 들으며 올라간 나는 2층의 모습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원룸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크기의 방. 아래층이 식당이라 윗집도 비슷한 크기라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다. 이건 아래층에 있는 식당의 화장실만 한 크기 정도밖에 안 된다.

자세히 말하자면 내가 사는 고시원 방 중 가장 작은 방. 그러니까 책상을 두고 나면 그 아래 머리를 밀어 넣어야 발을 뻗고 잘 수 있는 정도의 방이다. 다행히 책상 뒤로 큰 창문이 있어 크게 답답하지는 않다.

큰 창문 앞에 책상 하나가 있고, 바닥에 이불이 깔려 있다. 책상 오른쪽에 매우 작은 화장실 하나가 딸려 있다.

오진규가 KCSI 대원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여기 구조 좀 이상하지 않아요?”

대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비밀 공간이 있나 확인해 봤는데, 건물주가 불법 구조 변경으로 만들어낸 방으로 보입니다. 저 벽 너머로 식당에서 사용하는 식재료 창고가 있고 위층은 건물주가 거주하는 가정집입니다. 줄자 가지고 확인해 봤는데 평수가 딱 맞습니다. 비밀 공간은 없어 보이네요.”

“음, 하여간 있는 놈들이 더하네. 특별히 나온 건?”

대원이 책상 위를 눈짓한다.

“이 방에 있는 범인의 물건이 몇 개 없습니다. 저기 성경책, 초록색 펜 한 자루. 나머지는 쓰레기입니다. 주인집 아줌마에게 물어보니 이불도 건물주 집에 있던 걸 내줬답니다.”

나는 대원의 말에 책상 옆에 있는 쓰레기를 바라보았다.

난잡하게 어질러진 쓰레기 더미가 아니다. 장진수라는 인물의 성격을 나타내는 듯 차곡차곡 가지런히 정리되어 종량제 봉투에 들어 있는 쓰레기들. 대부분이 컵라면의 빈 컵이다.

오진규가 한쪽 무릎을 꿇고 쓰레기 더미를 뒤져보다 혀를 찼다.

“새끼, 고작 밖에 나와서 컵라면이나 먹으려고 그 개고생을 한 거냐? 허, 이 새끼 이거. 라면밖에 안 먹고 살았나 보네. 영양실조 걸리면 어쩌려고.”

범죄자를 불쌍하게 보는 듯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오진규.

하지만 나는 그가 뼈 있는 농담을 하고 있음을 안다. 어차피 탈옥을 위해 어마어마한 다이어트를 감행한 놈치고는 꽤나 잘 먹고 있었다는 반어법인 것이다.

나는 봉투에 들어 있는 성경책을 눈짓했다.

“성경책은 확인했습니까?”

대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DSLR 액정을 보여준다.

“일반 가톨릭 성경이었고, 특이한 부분은 모두 사진을 찍어놨습니다.”

오진규가 카메라를 받아 사진을 확인한다.

“성경에 밑줄 그은 거?”

오진규가 보고 있는 사진. 그것은 책상 위에 있는 초록색 펜으로 성경에 밑줄을 그은 사진이다. 대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총 세 군데입니다.”

“음, 그것뿐입니까?”

“네, 1차 조사에서는 그것밖에 안 나왔습니다. 바로 KCSI 본사로 이동해 성경 내, 외부에 묻은 미세 증거 성분 분석 예정입니다.”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성분 분석은 왜요?”

대원이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말했다.

“매뉴얼입니다만.”

오진규는 봉투에 싸인 성경을 가져오며 말했다.

“어이, 성분 분석을 하는 이유가 뭡니까?”

대원은 눈을 깜빡인다.

“성경 내, 외부에 묻은 미세 증거를 수집해 범인이 은신하고 있는 장소를 유추하고 검거에 도움을…….”

대원은 말을 하다 말고 멈칫하고는 얼굴이 벌게진다. 범인이 이미 잡혀 병원에 있다는 걸 떠올린 것이다.

“죄송합니다.”

오진규가 혀를 차며 봉투를 연다.

“이거 우리가 가져갑니다.”

“예, 알겠습니다.”

“나가서 일 보세요.”

대원이 나가자, 오진규는 성경책을 넘겨보다 초록색 펜으로 밑줄이 그어져 있는 부분을 바라본다. 하지만 종교와는 거리가 먼 그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 날 바라본다.

“성경에 다니엘서라는 게 있었습니까? 처음 들어보는데.”

“원래 성경 잘 모르시지 않나요?”

“어릴 때 교회 다녀봤는데 처음 들어봅니다.”

“어릴 때 많이 접하는 장은 아니죠.”

오진규가 가만히 성경을 바라보다 말했다.

“다니엘서 10장 13절부터 21절까지 밑줄이 그어져 있습니다.”

“내용이 뭡니까?”

오진규는 종교가 없지만 그래도 성서라는 생각이 들어 그런지 약간 진중한 목소리로 구절을 읊어준다.

그런데 페르시아 나라의 제후 천사가 스무 하루 동안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래서 일제후 천사들 가운데 하나인 미카엘이 나를 도우러 오자,

나는 그를 그곳 페르시아 임금들 곁에 남겨두었다.

그리고 나는 뒷날 네 백성에게 일어날 일을 네가 깨닫게 해주려고 왔다.

이 환시는 그때와 관련된 것이다.

그가 이러한 말을 나에게 할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얼굴을 땅에 대고 있었다.

그때에 사람 형상을 한 이가 내 입술에 손을 대었다.

그래서 나는 입을 열고 내 앞에 서 있는 이에게 말하였다.

‘나리, 환상 때문에 고통이 들이닥쳐 저는 힘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리의 이 종이 어떻게 나리와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저는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숨조차 쉴 수가 없습니다.’

사람 모습을 한 이가 다시 나에게 손을 대며 힘을 북돋아주었다.

그가 이렇게 말하였다.

‘총애받는 사람아, 두려워하지 마라. 너에게 평화가 있기를! 힘을 내어라. 힘을 내어라.’ 그가 이러한 말을 할 때에 나에게 힘이 솟았다.

그래서 내가 말하였다. ‘나리께서 저에게 힘을 주셨으니 이제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그가 말하였다. ‘너는 내가 왜 너에게 왔는지 아느냐? 나는 이제 돌아가서 페르시아의 제후 천사와 싸워야 한다. 내가 그 일을 마치면 그리스의 제후 천사가 올 것이다.

이제 나는 진리의 책에 적힌 것을 너에게 일러주려고 한다.

너희의 제후 천사 미카엘 말고는 나를 도와 그들을 대적할 이가 없다.’

오진규는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모양인지 입맛을 다시며 다음 밑줄을 찾아낸다.

“유다서 1장 9절.”

그러나 미카엘 대천사도 모세의 주검을 놓고 악마와 다투며 논쟁할 때, 감히 모독적인 판결을 내놓지 않고 ‘주님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바란다.’ 하고 말하였을 뿐입니다.

오진규가 다시 페이지를 넘긴다.

“요한계시록 12장 7절부터 9절까지.”

그때에 하늘에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미카엘과 그의 천사들이 용과 싸운 것입니다.

용과 그의 부하들도 맞서 싸웠지만 당해내지 못하여, 하늘에는 더 이상 그들을 위한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큰 용, 그 옛날의 뱀, 악마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자,

온 세계를 속이던 그자가 떨어졌습니다. 그가 땅으로 떨어졌습니다. 그의 부하들도 그와 함께 떨어졌습니다.

오진규가 혀를 차며 실소를 짓는다.

“성경은 도통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네요.”

성경은 전후 내용을 모르고 중간 부분만 보면 내용을 알 수 없다. 가톨릭 신자도 이해하기 어렵거나 곡해하는 경우가 많은 성경을 일반인이 한 번에 이해하는 건 어렵다.

하지만 나는 그가 읽어주는 구절들을 보며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다.’

총 세 개의 구절. 그 속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나는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대천사 미카엘.”

오진규는 내 중얼거림을 듣고 멈칫하더니 다시 성경을 읽어본 뒤 눈살을 찌푸렸다.

“미카엘 신부님?”

내가 손을 내밀자 오진규가 성경을 넘겨준다. 장진수가 그었다는 밑줄. 장갑 낀 손으로 밑줄을 만져본 나는 느꼈다.

“아주 힘을 주어 꼭꼭 밑줄을 그었습니다. 일반 종이보다 얇은 재질의 종이로 만든 성경을 찢어버릴 듯한 힘으로.”

원한이다. 미카엘 신부에 대한 원한을 표현한 것이다.

장진수 너는 정말 살인범이 된 원인이 미카엘 신부님에게 있다고 생각한 거야?

“하…… 이 또라이 새끼. 검거가 조금만 더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군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