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인의 기억-276화 (276/328)

살인의 기억 276화

19. 기억의 편린(20)

성경을 발견했지만 아직 결정적 증거인 일기장이 발견되지 않았다. 나는 일단 오진규에게 현장 지휘를 맡기고 성경을 잘 조사해 보란 지시를 내린 후 절 쪽으로 걸었다.

멀지 않은 곳에 일기장을 숨겨놓았을 것 같지만 수색 범위가 너무 넓다.

“어디 숨긴 거냐, 장진수.”

절을 끼고 뒤편으로 돌아 산의 초입에 선 나는 문득 엄마에 대한 생각이 났다.

‘보광사 뒤쪽 5㎞ 지점.’

엄마의 백골 사체가 발견된 곳이 이곳에서 가깝다. 엄마에 대한 기억은 갓난아기 시절의 단편적 기억밖에 없지만 왠지 한 번은 가봐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마침 장진수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도 복잡하니 등산하는 셈 치고 한번 다녀와도 좋을 것 같다.

처음에는 등산로를 걷던 나는 미리 체크해 둔 위성사진을 토대로 사체가 발견된 지점으로 향했다.

중간부터는 길이 없는 곳이라 꽤 험한 길이다. 그러나 산책 나오듯 천천히 걸으니 갈 만한 것 같다.

오랜만에 혼자 걸으니 지금껏 혼란스럽기만 했던 생각들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나는 지금 무척 찜찜하다. 왜 그럴까?

놈은 총을 맞고 이미 검거되었다. 유치장이나 감옥에 들어가 실실 웃고 있는 게 아니라 총상 부작용으로 사경을 헤매는 중이다. 그런데 나는 왜 찜찜한 기분이 드는 걸까?

‘탈옥 후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그래, 나는 이 점이 이상하다. 살인 중독은 마약 중독보다 심각하다. 한번 우발적 살인을 한 사람이 아닌, 살인이 주는 희열에 취한 중독자들은 절대 살인을 끊을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잠시 살인이 중단되는 경우는 전례가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반드시 다시 살인을 저지른다.

‘하지만 장진수 놈은 아니었다.’

왜?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안 돼서? 아니다. 놈은 탈옥 후 많은 이들을 만났다. 놈은 제일 처음 만난 택시 기사도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택시 기사는 이런 진술을 했었다.

‘조수석에 제 아들놈 어린 시절 사진이 있었거든요. 그걸 빤히 보더니 아들이냐고 묻더군요.’

‘그래서요?’

‘아들이라고 했죠. 사실 그게 20년 전에 찍은 사진인데 아들놈이 하도 귀엽게 나온 사진이라 택시 처음 시작할 때부터 거기 둔 사진이거든요. 지금은 장성해서 군대도 다녀오고 사회생활 중이지만 여전히 제 눈에는 그때 그 꼬마 녀석으로 보이죠.’

‘그뿐입니까?’

‘음, 아들에게 잘해주냐 물었습니다.’

‘그게. 서울 올라갈 때까지 뒷좌석에 그냥 앉아 있던 사람이 사진을 보며 질문을 할 때는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로 얼굴을 쭉 내밀고 있었습니다.’

‘사진을 자세히 보려고 그런 것 아닙니까?’

‘아뇨, 질문을 한 뒤가 문제죠. 잘해주냐고 묻고 난 뒤에 제 얼굴에 바싹 자기 얼굴을 들이밀고 절 노려보더군요.’

‘…….’

‘순간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싶었죠. 그러다 아, 혹시 어린 시절에 뭔 상처 같은 게 있나 보다 해서 얼른 제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놈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더니 천천히 뒷좌석으로 물러나더군요.’

놈은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학대를 받았다. 정확히는 의부로부터 당한 폭행이다.

그는 부모를 죽였다. 마음속에 부모라는 존재에 대한 반감을 가진 살인범이다.

그런 놈이 택시 기사를 죽이지 않았다. 왜? 당시 나는 기사님이 아들에게 잘해준다 말했기에 죽이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었다.

‘그건 보통 사람의 의식 흐름이고.’

놈은 연쇄살인범이다. 그것도 사람을 열셋이나 죽인 살인마. 그런 놈이 일반인의 의식 흐름에 따른 생각을 했다고?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다음으로 성당의 보육원.

보육원을 덮치지 않은 것은 너무 많은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괜히 보육원에 들어가 살인을 했다가 남은 애들이 크게 울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지니까.

하지만 새별이는? 그 아이는 아무도 없는 보육원 뒤쪽 창고 옆에서 놈을 만났다. 하지만 놈은 아이를 죽이지 않았다. 충분히 죽일 수 있는 여건이었지만 건드리지 않았다.

‘되려 아이에게 물과 과자를 대접받고 울었다.’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아무도 반기지 않는 탈옥수가 오랜만에 받은 따뜻한 대접에 감동했기 때문에 아이를 건드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 역시 일반인 범주에서나 통용될 생각이다. 그는 살인에 중독된 연쇄살인범이다.

놈은 마치 살인에 관심이 없는 보통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집에 있는 성경에 나온 대천사 미카엘의 구절에 힘을 주어 밑줄을 긋고 같은 이름의 신부님을 찾아 죽이려 했다.

도무지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는다. 범죄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는 명백한 원한 살인미수이다. 자신과 아무 접점이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시신을 훼손하던 놈의 범죄 심리 분석과 전혀 맞지 않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장진수.’

나는 생각에 잠긴 채로 산길을 걷다 문득 핸드폰을 보았다.

산속이지만 그래도 서울이라 그런지 핸드폰은 잘 터진다. 핸드폰을 본 김에 수녀님이 잘 계신지 안부 전화를 걸어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때 보육원 출신의 경찰이 있다는 건 두 분 수녀님들께 큰 위안이 될 거다. 지금이 효도할 찬스이기도 하고. 루이사 수녀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자, 신호가 한 번 울리고 바로 전화를 받으신다.

-도경아.

“네, 수녀님. 별일 없죠?”

-응, 그래 별일 없어. 걱정 끼쳐서 미안해.

“에이, 또 뭐가 미안하다고.”

-우리 도경이도 바쁠 텐데, 자꾸 신경이 쓰이니까 전화하는 거 아니니.

“수녀님들은 내 어머니들이세요. 당연한 걸로 자꾸 서운하게 그러지 마세요.”

-그래도.

“됐어요, 애들은 좀 어때요?”

-응, 다들 괜찮아.

“새별이는요?”

-새별이? 왜?

“…….”

아, 수녀님은 새별이가 장진수를 만났다는 걸 모르신다. 괜히 알려 드렸다가 걱정만 끼쳐 드릴 수도 있고 새별이와 비밀 이야기라고 약속도 했으니 이건 입을 닫는 쪽이 좋겠다.

“아~ 그냥 궁금해서.”

-응, 잘 있어. 지금 로사와 그림 공부 중이야.

“아하, 로사 수녀님은 좀 어때요?”

-응, 밤에 악몽을 꾸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씩씩하게 잘 이겨내고 있어.

수녀님들은 30년이 넘게 보육원 일을 보셨다. 그동안 속 썩이는 원생은 얼마나 많았을 것이며, 아이들 때문에 찾아와 따지거나, 무시하는 인간들을 얼마나 많이 보셨을 것이며, 성당과 보육원에 일어나는 대소사들은 또 얼마나 겪으셨겠는가?

두 분은 무척 강인한 분들이다. 이번에도 잘 이겨내실 거다.

“신부님은 좀 어떠세요?”

-휴, 신부님 지금 안 계셔.

“예? 어디 가셨는데요?”

-소아 전문 병원 행사에 가셨어.

“이 와중에 행사를 가요?”

-그러게. 다음에 가시라고 그렇게 말렸는데 기어이 가시네.

신부님이 자리를 떴는데 내게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순간 눈썹을 찡그렸지만 곧 상황을 이해했다. 내가 지시한 것은 성당과 보육원의 경계였지 특정 인물에 대한 경호가 아니었다.

즉, 성당과 보육원 사람들을 그곳에 감금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므로 자유로운 이동은 가능한 것이다.

‘그래, 위험 인물이 사경을 헤매는 중인데 지금은 위험할 이유가 없지.’

경계 중인 형사들도 같은 생각이니 신부님 이동을 허락했을 것이다.

나는 몇 가지 안부를 더 물으며 산길을 걷다가 문득 장진수가 성경에 표기해 두었던 부분들이 떠올랐다.

“수녀님.”

-응?

“어릴 때 제게 대천사 이야기 해주신 적 있죠?”

-일곱 천사 이야기 말이니?

“네, 맞아요.”

-응, 그건 왜?

“그거…… 다시 이야기해 주실 수 있어요?”

-지금?

“네, 바빠요?”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갑작스러운 내 요청에 잠시 당황했지만 언제나 종교적 질문에 대해서는 성의껏 답해주셨던 수녀님은 이번에도 그리하신다.

-우리엘, 라파엘, 라구엘, 미카엘, 사라카엘, 가브리엘, 레미엘 천사. 이 일곱 천사는 모두 관장하는 부분이 달라. 우리엘은 천둥과 지진을 담당하고, 라파엘은 사람들의 영혼을…….

“수녀님. 다른 천사들 말고. 미카엘에 대해서만 이야기해 주실래요?”

버릇없게 수녀님 말씀을 잘라먹었지만 지금 다른 부분은 중요하지 않다. 루이사 수녀님이 잠시 생각해 보신 후 말을 잇는다.

-미카엘 대천사는 지옥의 권세에 맞서는 하느님 군대의 지도자요, 천국 군대의 지휘관이지.

어릴 때 이 부분을 가장 좋아했다. 뭔가 만화에 나올 것 같은 멋진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등 뒤에 돋아난 천사의 날개를 활짝 펼치고 손에 황금빛 창을 쥔 무표정한 신의 전사. 어린이들이 정말 좋아하는 이미지이다.

-어릴 때 해줬던 이야기 기억하지?

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네, 구약성경에서 그가 선택받은 민족의 수호자로 활약했듯이, 교회의 수호자이기도 하죠.”

-그래, 기억하는구나.

어릴 때 미카엘 천사를 그린 낙서를 많이 봤다. 같이 보육원에 사는 다른 아이들이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다. 물론 수녀님의 옛날이야기 속에 나오는 천사와 진짜 성경 속 천사는 다르겠지만.

“오랜만에 수녀님 이야기 들으니 좋네요. 어린 시절 생각도 나고.”

-호호, 그래. 어릴 때 이 이야기를 참 좋아했지.

“그런데 미카엘 천사는 싸움질을 좋아하나 봐요. 싸움을 그렇게 해대던데. 사람이었으면 경찰서 좀 들락거렸겠죠? 하하.”

신성모독을 할 생각은 아니다. 단지 농담을 하고 싶었을 뿐.

-미카엘 천사는 전투만 하는 게 아니란다.

“오? 또 뭐가 있어요? 제게 해주신 옛날이야기는 매번 싸우는 것만 나왔는데.”

-어린이에게 해줄 이야기는 아니었거든.

응? 어린이에게 해줄 이야기가 아니다? 뭔가 잔혹한 이야기라도 있는 걸까?

“제게 해주지 않은 말씀이 있었나요?”

잠시 뜸을 들인 수녀님이 말했다.

-미카엘 대천사의 일은 전투와 수호 외에 두 가지가 더 있어.

“뭔데요?”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죽음의 천사.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게 될 때, 악마들이 인간의 죄를 고발하면 반대로 미카엘은 인간을 변호하여 그가 구원받을 수 있게 도와준단다. 이러한 믿음 때문에 가톨릭교도들이 죽기 전이나 죽을 위험에 놓이게 될 때 미카엘에게 전구를 청하는 것이고.

“오, 멋있네요. 또 하나는 뭐예요?”

-최후의 심판이 있는 날, 나팔을 부는 임무와 함께 인간의 영혼을 저울에 다는 것이란다.

생각지도 못한 말. 나는 걸음을 멈췄다.

“저울에 달아요?”

사실 경찰들 사이에서 저울에 단다는 표현은 장기매매 업자들을 체포했을 때나 듣는 말이다. 사람의 무게를 저울로 달아 가격표를 붙이는 행위. 그래서 경찰들은 이 표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대천사나 되는 양반이 인간의 영혼을 저울에 단다고?

-응, 최후의 심판이 있는 날. 죄악의 저울에 인간의 영혼을 달아 죗값을 받게 하는 것이 미카엘 천사의 일이야.

나는 지금 전화기를 들고 나무들 사이에 우두커니 서 있다. 수녀님의 목소리는 이미 끝났지만 머릿속에서는 계속 메아리치고 있다.

죄악의 저울에 인간의 영혼을 달아 죗값을 받게 한다.

그리고 죄를 정화하여 하느님 나라로 이끈다.

장진수.

놈이 연쇄살인을 한 이유와

대천사 미카엘의 존재 이유가 겹친다.

우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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