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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기억-277화 (277/328)

살인의 기억 277화

20. vetus silentium(오래된 침묵)(1)

같은 시각,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중대범죄 수사과.

연주가 함께 CCTV를 분석 중이던 관우에게 말했다.

“이놈 이거 확실히 장진수 같아 보이지?”

관우가 키보드를 두들기자, 예전 사건에서 찍어둔 동일인의 보행 분석 및 체형 분석 결과와 현재의 CCTV 영상 속 범인의 모습이 겹쳐진다.

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모니터를 손가락으로 튕긴다.

“확실해. 자, 어디 보자. 1차 절도사건이…… 인수 중학교 뒤 주택가이고 현금 13만 원이네. 아지트가 발견된 절에서 1.8㎞ 거리이고.”

연주가 모니터 옆에 띄워둔 다음 사건 메모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2차 사건은 국립 4.19 민주 묘지 입구에 있는 자동차 수리 사무실. 당일 현금으로 받은 수리비 31만 원이 피해액이고, 아지트에서 1.4㎞.”

관우가 목 뒤로 깍지를 끼며 몸을 젖힌다.

“3차 절도 사건은 덕성 여대 앞 주택 3층. 피해액은 6만 원, 거리는 1.3㎞.”

연주가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일단 요 세 사건만 CCTV로 장진수 놈과 대조 다시 한번 해줘. 난 관할서에 연락해서 이 세 사건은 우리 쪽에 넘기라고 할 테니까.”

그때 아지트 조사를 마무리하고 복귀한 오진규가 사무실로 들어온다. 관할서에 전화를 돌리려던 연주가 반기며 말했다.

“선배님. 수고 많으셨어요.”

“어, 그래.”

관우가 얼른 일어나며 엄지를 치켜세운다.

“역시 우리 선배님. 그걸 진짜 찾아내실 줄이야. 진짜 엄청나십니다.”

오진규가 공치사에 실소를 지으며 자기 자리에 털썩 앉는다.

“후, 그래 봐야 일기장도 못 찾았는데.”

오진규가 봉투에 넣은 성경을 테이블 위로 툭 던지며 눈짓한다.

“꼴랑 이거 하나 발견했는데 단서가 없어. 초록색 밑줄 그어놓은 게 다인데. 미카엘 천사에 대한 기록이다.”

연주와 관우가 얼른 달려와 성경을 살핀다. 갈색 가죽 성경은 얼마나 봤는지 매우 낡아 보인다. 관우가 성경 외관을 살피며 말했다.

“그…… 미카엘 신부님과 천사를 동일시했다는 건가요?”

연주가 봉투를 열며 말했다.

“장진수는 유년 시절 의부에게 폭행을 당한 기억이 있어. 종교로 자신을 구원해 준 미카엘 신부님이 자신을 구원하러 온 천사로 보였다고 가정하면 충분히 동일시하는 것이 가능하지.”

관우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말했다.

“그런데 체포되고 나서 자신이 한 일들이 옳지 않은 일임을 알았다……. 옳다고 철석같이 믿고 살인을 했는데 알고 보니 자신은 개 쓰레기 범죄자일 뿐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건데. 그럴 수가 있나?”

연주가 봉투를 열어 성경책 외부 가죽을 살피며 물었다.

“뭐가 그럴 수 있어?”

관우가 어깨를 으쓱한다.

“아니, 이상하지 않아? 만약 놈이 정말 예전에 저지른 그 살인들에 한 점 부끄러움 없다면 시신을 숨길 이유도 없고,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한 은신처를 만들 이유도 없었던 거 아닌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건데.”

연주가 혀를 차며 말했다.

“독불장군이라고 불리거나, 사이비 종교 같은 곳에 빠지는 사람들 특징 몰라?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 주변인이 틀렸다고 말해주면, 그들이 틀리고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자신을 이해 못 한다고 생각해. 사이비 종교도 마찬가지고. 일상생활 중에 독불장군 소리 듣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무조건 자기가 옳고 남이 틀렸다는 생각을 하지.”

오진규가 끼어들며 말했다.

“하지만 자기가 틀렸다고 말하는 놈이 많으면 점점 귀찮아져. 그들의 평가나 판단 따위는 중요치 않다고 생각하지. 난 옳은 일을 하고 있으니까. 그럼 어떻게 되느냐? 사람들을 피해. 내가 하는 짓을 아무도 모르게 해. 왜? 알려지면 귀찮은 잔소리가 오니까. 숨어서 계속 그 일을 하는 거야. 왜? 내가 하는 일이 옳으니까.”

관우가 입술을 내밀며 혀를 찬다.

“진실에 귀를 닫아버리면 답이 없죠.”

오진규가 엄지와 검지를 비비며 말했다.

“진실을 밝히는 두 가지 조건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란 말이 있지. 둘 중 하나라도 성립되지 않으면 진실을 깨닫기 힘들어져. 둘 중 어느 쪽도 말이지.”

“휴.”

연주가 성경을 열어 초록색 밑줄들을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자신에게 종교를 알려준 미카엘 신부님에게 원한을 가진 것 같네요. 밑줄 그은 성경 페이지가 찢어지기 직전인 걸 보니.”

오진규가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연주가 성경책의 맨 뒷장까지 넘겨보다 책 인쇄 정보란에 자필로 장진수의 이름이 써 있는 것을 발견한다.

“자기 이름까지 써놓은 걸 보니 예전부터 들고 다녔던 성경인 게 확실하고.”

관우가 손을 내밀어 성경을 달라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단양 자택까지 가서 찾아온 성경인데. 당연히 제 성경이지. 이해가 안 가네. 성경이 다 같은 성경이지, 굳이 위험부담 안고 단양 자택까지 가서 회수해 올 건 뭐야? 난 또 특별한 메모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고작 밑줄 몇 개 그은 게 전부야? 참나.”

관우가 성경책을 넘겨보다, 맨 마지막 장까지 온다. 맨 아래 연주가 말했던 자필 성명이 보인다. 혀를 찬 관우가 성경을 닫고 테이블 위에 놓으려다 멈칫한다.

“어?”

관우가 다시 성경을 집어 들고 맨 뒷장을 본다. 장진수가 제 이름을 쓴 자필을 자세히 본 관우가 눈썹을 꿈틀거린다.

오진규가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물었다.

“왜 그래?”

“…….”

관우는 고개를 들었지만 아무 답도 하지 않고 눈을 뒤룩뒤룩 굴리다 고개를 획 돌려 사무실 한편에 있는 캐비닛을 쏘아본다.

성경을 테이블 위에 놓은 관우가 달려가 캐비닛을 뒤지기 시작하자 연주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야, 일 보고 정리 안 하면 죽는다?”

관우는 연주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캐비닛 안의 서류를 마구 쏟아내고 있다. 처음에는 저게 웬 미친 짓인가 싶었던 연주와 오진규는 관우가 이유 없이 저런 행동을 할 녀석이 아니란 판단을 하고 달려왔다.

연주가 관우 옆에 쪼그리고 앉으며 말했다.

“뭐 찾는 거야? 같이 찾아.”

관우가 바닥에 쏟아 놓은 서류철들을 뒤지며 말했다.

“장진수 1차 사건 때 받은 자필 진술서.”

“아, 그거? 내가 빼놨지.”

관우가 고개를 획 돌려 연주를 째려보자, 연주가 어깨를 으쓱한다.

“뭐? 2차 사건이 그놈 탈옥 사건인데 당연히 1차 사건 자료는 따로 빼놓고 봐야지. 기다려 봐.”

연주가 자기 자리로 가 1차 사건 정리 파일을 꺼내 던져주자, 관우가 공중에서 파일을 낚아챈 뒤 진술서를 확인한다. 다시 성경이 있는 테이블로 가 책을 펼친 관우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들었다.

“달라.”

오진규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뭐가?”

관우가 성경과 자필 진술서를 앞으로 보여주며 말했다.

“장진수 자필 진술서와 여기 성경에 남은 이름. 두 필체가 다릅니다.”

오진규가 다가와 성경과 진술서를 넘겨받고 비교한다. 확연히 다른 두 가지 필체.

오진규가 관우를 보며 웃는다.

“대단한 자식. 눈썰미 하나는 끝장이구나.”

연주가 옆으로 와 팔짱을 끼고 말했다.

“음, 이게 단서가 될까요? 예전에 누구에게 선물 받은 성경일 수도 있고. 그건 사건에 별 단서가 될 것 같지 않은데.”

오진규는 다시 한번 성경책 뒷장에 써 있는 이름을 바라보다 어느 순간 멈칫하며 중얼거린다.

“초판 발행일이 1990년?”

오진규가 연주를 보며 물었다.

“장진수 몇 살이지?”

“35세요.”

오진규가 성경을 살피며 말했다.

“그럼 이 새끼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성경이란 건데.”

“어른한테 받았나 보죠. 저도 집에 엄마가 보던 성경 있어요.”

오진규가 생각에 잠긴다.

“어른에게 받은 성경. 그것을 소중히 여겼던 아이. 살인마가 된 후에도 여전히 소중한 성경책…… 뭔가 이상하지 않아?”

* * *

보광사 뒤편 산길.

엄마의 백골 사체가 발견되었다고 기록된 곳. 나는 사실 대략적인 위치와 사진을 미리 보고 왔지만 그곳을 정확히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사체가 발견된 시점도 벌써 3년 전이고, 주변에 건물과 같은 특이한 부분이 없는 산 중턱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근처라도 가서 당신 아들은 아직 잘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생각지도 못한 기회에 그녀가 발견된 곳을 정확히 알게 되었다.

저 멀리.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약 60미터 떨어진 곳. 나무들 사이에 낙엽들이 무성하게 떨어져 있는 산길 중간에 한 사람이 서 있다.

‘강혁 아저씨.’

아직 거리가 멀지만 분명히 아저씨다. 아저씨는 미동도 없이 바닥을 바라보며 고개를 떨구고 계신다.

‘아저씨는 엄마와 무슨 관계였을까?’

보통 관계는 아닌 것 같다. 엄마 사체가 발견된 곳이 시내도 아니고 이런 산까지 올라와 추모할 정도라면.

나는 일부러 발소리를 크게 냈다. 상대가 아저씨였기에 소리 없이 접근하고 싶지 않기도 했고 온통 낙엽이 깔린 바닥을 걸으며 발소리를 죽일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다.

발소리를 들은 아저씨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가 나를 발견하고 눈이 튀어나올 듯한 얼굴이 된다.

“뭐, 뭐야? 너 여기 어떻게 왔어?”

평소의 나였다면 아마 장난을 쳤을 거다. 아저씨 폰에 추적 어플리케이션을 숨겨놨다고. 그럼 아저씨는 당황하며 자기 핸드폰을 확인하다 웃으며 거짓말이라 말하는 날 열 받은 얼굴로 째려봤겠지. 하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다.

나는 뚜벅뚜벅 걸어 아저씨가 보고 있던 곳에 섰다. 바닥은 누군가의 시신이 묻혔던 자리라고 하기엔 너무 평범한 산길이다.

“누구예요?”

“…….”

아저씨는 내 얼굴을 빤히 보며 눈동자를 흔든다.

“뭐가?”

“여기 묻혀 있던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 겁니다.”

“…….”

아저씨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일순 당황하다 인상을 쓴다.

“내 기억을 읽은 거냐?”

“뭐, 비슷해요.”

아저씨는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상대를 죽이고 싶을 정도의 악의를 가져야 보이는 거 아니었어? 내가 네게 그런 마음 들게 할 짓을 했던가?”

아,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누군지 말해줄 수 있어요?”

“이 자식이 내 질문은 씹고 지 질문만 하네.”

강혁 아저씨는 다시 물끄러미 바닥을 바라본다.

나는 아저씨의 눈빛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잠시지만 깊은 슬픔이 아저씨 눈빛을 스쳐갔다.

아저씨는 한참 아무 말도 없이 바닥을 보다 어렵게 입을 뗀다.

“내…… 선배님.”

“선배님? 아저씨 경대 출신인데 왜 이 사람을 선배라고 부릅니까?”

엄마는 내가 태어나기 전인 1987년에 퇴직했다. 그녀의 최종 계급은 경사. 경찰대 출신이라 경위부터 시작한 아저씨보다 아래 계급이다.

강혁 아저씨는 날 힐끔 보며 으르렁거린다.

“이 새끼가. 남의 기억 읽고 뒷조사까지 끝낸 모양이네?”

“그냥 말해줘요.”

아저씨가 다시 바닥을 보며 한숨을 쉰다.

“네가 진규 놈에게 선배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순경 출신이었지만 처음 경찰로 임관한 햇병아리 경위보다 백 배는 나은 경찰이었지.”

음,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나는 슬그머니 질문을 던졌다.

“단지 선후배?”

“그럼 뭐가 더 있어야 돼?”

“애인은 아니었고요?”

“이 새끼가.”

아저씨가 눈을 부라린다. 반응을 보니 확실히 아닌 모양이다.

“고인 앞에서 그게 할 소리냐, 인마? 할 소리가 있고 안 할 소리가 있지, 인마. 내가 얼마나 존경하던 선배였는데 네가 감히 그런 소릴 해? 아무리 너라도 선 넘으면 용서 안 해.”

나는 으르렁거리는 아저씨를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아저씨와 엄마는 좋은 관계였던 모양이다. 다행이다.

아저씨는 갑자기 웃음을 짓는 날 보며 인상을 쓴다.

“왜 웃어?”

“그냥 좋아서.”

“뭐가?”

“아저씨와 엄마가 좋은 선후배였다는 게.”

강혁 아저씨는 무슨 미친 소리냐는 듯한 얼굴로 날 바라보다 어느 순간 점점 눈이 커진다.

“뭐……라고?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나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엄마가 묻혀 있던 자리를 눈짓했다.

“우리 엄마래요. 이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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