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281화
20. vetus silentium(오래된 침묵)(5)
국가수사본부 중대범죄 수사과.
필적이 다른 이름을 발견한 순간부터 성경을 쥐고 놓지 않고 있는 연주가 손을 번쩍 든다.
“여기! 발견하지 못했던 메모가 있어요.”
만약 KCSI 대원이 본부로 성경을 가져갔다면 발견해 냈겠지만 색도 없는 연필로 작게 메모된 성경 주석은 한번 넘겨보고 발견하기 어려운 곳에 숨겨져 있다.
꼼꼼하게 성경을 확인하던 연주가 책갈피를 성경에 끼워 넣으며 소리치자, 오진규와 관우가 뛰어온다.
“뭔데? 단서야?”
연주가 손톱을 깨물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성경 공부를 한 것 같은데.”
“뭐라고 써 있어?”
“음, 일단 성경 구절은 빌립보서 4장 16절.”
연주가 헛기침을 한 뒤 성경 구절을 읽어준다.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두 사람이 눈을 깜빡인다. 관우가 이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게 뭔 소린데?”
연주가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쓰여진 주석을 읽어준다.
“일단 필적은 뒤에 이름을 쓴 필체와 달라. 연필로 쓴 주석이고. ‘성도가 사제를 잘 대접하면 더 큰 복을 받는다’라고 써 있어.”
오진규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이게 뭔 소리야?”
연주가 성경을 넘기며 말했다.
“여기 또 있어요. 시편 105편 15절.”
오진규가 연주를 만류하며 말했다.
“성경 내용은 들어도 모르겠으니 그냥 주석 써 있는 것만 읽어봐.”
연주가 연필로 쓰여진 주석을 읽는다.
“음…… 성도가 사제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비방하면 죽거나 알거지가 되는 끔찍한 저주를 받을 것이다.”
관우의 표정이 점점 이상해진다.
“사이비 종교 아냐?”
연주가 다시 성경을 넘긴다.
“이번 주석은 꽤 길어. 일단 성경 말씀이 아니라 본인이 질문을 하고 질문에 대한 답이 써 있네.”
“어디? 방금 말한 시편 아래에 써 있는 거야?”
“응.”
“읽어봐.”
“사제가 각종 스캔들과 교회 분열의 빌미를 제공하고 각종 문제를 일으키는 장본인이 되었을 때에도 성도는 그 사제를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주의 종으로 믿고 따라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네.”
“답은?”
“성도가 볼 때 문제가 많은 사제일지라도 하나님이 쓰시는 기름 부은 종일 수 있으며, 그 예로서 구약 시대 의인으로 불리는 노아, 모세, 다윗의 실수를 하느님께서 용서해 주셨다. 신약 시대에는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한 죄를 용서하시고 오히려 큰 사도로 사용하셨다.”
관우가 인상을 쓰며 오진규를 돌아본다.
“종교를 모르는 우리가 들어도 이상한 주석이네요, 그렇죠?”
오진규가 관자놀이를 긁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이상해.”
연주가 펜을 입에 물고 한참 성경을 바라보다 어느 순간 눈썹을 꿈틀거린다. 잠깐 눈알을 굴리던 연주가 급히 성경 맨 뒤에 써 있는 이름을 확인한 뒤 관우를 보며 말했다.
“이번 총격 사건 때 미카엘 신부님 진술서 받은 거 있지?”
“응? 어, 있지.”
“가져와 봐.”
“그건 왜?”
“가져와 봐, 일단.”
관우가 마지못해 캐비닛으로 가 진술서를 찾아온다. 돌아오며 진술서를 힐끔 본 관우는 연주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대번에 알아챘다.
“필적?”
연주가 손을 내밀며 고개를 끄덕인다.
“줘.”
관우가 얼른 연주 손에 진술서를 쥐여주자, 연주는 진술서 내에서 ‘장, 진, 수’라는 글자들을 찾아 대조하기 시작했다.
“여기 보세요. 진술서에 ‘거실 서랍장 쪽에서 내 쪽으로 뛰어왔다.’ 여기서 장이란 글자. 그리고 여기 성경책에 쓰여진 장이란 글자. 비슷하지 않아요?”
오진규가 둘을 비교하며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는다.
“음…….”
연주가 다시 진술서를 가리킨다.
“여기 ‘로사 수녀’라고 써 있는 진술서. 성경책에 쓰여진 수 자도 그렇고.”
“음…….”
연주가 볼펜을 던지며 말했다.
“일단 줘보세요. KCSI 가서 필적 감정해 보게.”
관우가 가만히 고심하다 말했다.
“그러니까 이 성경에 이름을 적어 선물해 준 것이 미카엘 신부다? 그렇다는 건…….”
연주가 성경을 챙겨 흔들며 말했다.
“여기 이 말도 안 되는 주석들이 달리도록 인간 세뇌를 한 것도 미카엘 신부일 수 있다는 거지.”
오진규가 턱을 쓸며 말했다.
“미카엘 신부가 잘못된 종교관을 심었고, 그것이 놈을 살인자로 만들었다?”
관우가 혓바닥으로 입안의 볼살을 밀어내며 말했다.
“감옥에서 그게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는 게 말이 되나요?”
연주가 옷을 챙겨 입으며 말했다.
“말이 돼. 감옥에서도 종교활동이 가능하고, 가톨릭의 경우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할 기회도 주어져. 잘못된 종교관을 바로 잡아줄 신부님이 있다는 거지.”
오진규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그렇다 해도 미카엘 신부에게 죄를 물을 수 없다. 잘못된 종교관을 설교한 경우 가톨릭 협회에 연락을 취해 사제 직함을 박탈할 수 있겠지만 사법적 징계는 불가능해.”
연주가 인상을 쓰며 옷을 걸친다.
“네, 알아요. 그래도 만약 이게 진짜라면 계속 사제 일을 하게 둘 순 없죠. 또 다른 장진수가 태어날지도 모르는데.”
오진규는 연주의 말이 옳다는 듯 지시를 내린다.
“좋아, 관우 넌 부산교도소 쪽 전화해서 일요일 미사 주관하는 신부님 연락처 알아보고 통화해서 놈이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알아봐. 연주는 필적 감정해 오고.”
“예, 선배님.”
“네, 알겠습니다.”
“미카엘 신부 지금 어디 있지?”
연주가 노트북을 열어 데이터베이스에 접근 후 말했다.
“성당 경호 인력들이 매일 보고서 업데이트해 두는데 특별한 일 없으면 확인 안 하고 있었어요. 어디 보자…… 인력 이동 보고가…… 아, 여기 있네요. 소아 전문 병원 행사 참석하러 지방 내려갔다는데.”
오진규가 눈썹을 일그러뜨린다.
“중요 보호 대상이 지방에 내려갔는데 특별 보고도 없이 서면 보고만 달랑 했다고?”
관우가 끼어든다.
“집중 보호 시스템이 아니라 성당과 보육원 주변 순찰 및 경호 지시였어요. 개인적인 스케줄까지 취소하게 만드는 레벨의 지시가 아니었습니다.”
“누가 따라갔어?”
연주가 노트북을 확인하며 말했다.
“종로서 김현중 경장이 따라갔다는데. 어? 이 사람 영현 선배 팀원이네.”
관우는 예전 종로 경찰서 강력 3반의 후배라는 소리에 반가운 표정을 짓는다.
“오, 그래? 거기 요즘 어떤가 모르겠네.”
오진규가 눈짓하며 말했다.
“연락 취해서 문제없는지 확인해.”
관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 * *
근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저씨가 수사한 자료는 방대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것이 직관적으로 의미를 알기 어려운 정보들이다.
예를 들어 1989년 당시 부모님이 살던 집 근처의 슈퍼 주인과의 인터뷰 내용 같은 것들이나, 아버지가 다니던 주류 회사 직장 동료의 이야기들이 담긴 수첩들은 언뜻 수사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로 보인다.
하지만 아저씨와 삼촌의 집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당시 거리의 모습, 사람들의 사진, 그들의 연락처. 없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CCTV가 거의 없던 1989년이었기에 영상 자료가 전무하다. 범인에 대한 직관적 힌트는 전혀 없는 것이다.
강혁 아저씨가 믹스 커피를 타 내밀며 말했다.
“대충 둘러보면 알겠지만 여기 있는 자료는 1980년대 수사 기법을 통해 구축된 데이터베이스다. 사실 말이 좋아 데이터베이스라고 부르지만 아날로그 방식으로 모은 구시대적 수사법이라고 보면 되지. 영상 자료가 전무하니 피해자의 당일 동선을 거꾸로 따라가는 방식의 수사를 했다고 보면 된다.”
그 시절에는 그런 방법을 썼다. 지금이야 과학수사를 통해 사망 시간을 추정해 내고, 그 시간 내의 CCTV를 모조리 확인해 범인을 색출하는 편한 방식의 수사 방법이 주를 이루지만 그 시절에는 사망자가 나왔을 때 그의 당일 동선을 확인하고 이동 중에 만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확인하는 수사 방법을 썼었다.
그래서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숫자의 경찰 인력들이 동원되곤 했다. 아까 언급한 개구리 소년 사건에도 무려 35만 명의 경찰 인력이 투입되었다.
나는 수첩들을 넘겨보며 말했다.
“당일 동선들이 어떻게 됩니까?”
아저씨가 책장 앞에 선 뒤 가죽 수첩 한 권을 빼서 내민다.
“하 선배의 동선은 별거 없었다. 그냥 집에 있다가 밤이 되어 잠깐 산책을 했다. 그리고 사라졌어.”
아저씨가 내게 수첩을 넘겨준 뒤 한숨을 쉬었다.
“내가 아는 활동적인 하 선배는 하루도 집에 가만히 붙어 있었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종일 집에만 있었다는 점을 의심했지. 덕분에 선배가 집에 있었다는 시간을 조사하느라 몇 년을 썼다. 내 생각에 집에만 있을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보니 그게 널 돌보기 위해서였구나. 난 그것도 모르고 몇 년이나 허비한 것이고.”
갓난아기의 엄마는 대부분 집에 있다. 아기가 조금 컸다면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을 했겠지만 너무 어린 아기는 면역력이 약해 밖에 데리고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부분은 좀 이상하다. 하루 종일 집에만 있던 사람이 왜 갑자기 날 데리고 밖으로 산책을 간 걸까? 너무 답답해서? 아저씨 말대로 활동적인 사람이 집에만 있는 것이 고역이라 그랬던 걸까?
아저씨도 그 부분이 이상한지 고민스러운 얼굴이 된다.
“네 덕에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는데 이건 고민이 더 커진 상황이군. 아무리 활동적인 사람이라고 해도 모성애는 그걸 앞설 텐데. 답답함을 못 참고 애를 재우고 잠깐 나갔다 오는 건 이해해도 갓 태어난 아이를 데리고 산책을 가? 이건 좀 아닌데.”
나는 수첩을 열어보며 물었다.
“남자 쪽은 어땠어요?”
나는 아버지란 말 대신 남자 쪽이란 말을 썼다. 속으로 생각할 때는 아빠, 엄마라는 호칭을 붙일 수 있지만 평생 그런 말을 해보지 않은 내가 입 밖으로 그 단어를 꺼내는 것이 생소했기 때문이다.
아저씨도 내 마음을 이해하는지 별다른 지적은 하지 않는다.
“사건 발생 이틀 전에 출장 갔어.”
“어디로 갔습니까?”
“대구.”
“음, 그럼 실종 신고는 남자가 한 겁니까?”
강혁 아저씨가 살짝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요?”
“네 부모가 살던 집의 집주인이 했다. 갑자기 두 사람 모두 보이지 않고 전기요금과 수도요금이 밀려 있다고. 당시 우편함을 확인 결과 신고일로부터 최소 두 달 전에 일이 벌어진 것 같아. 네 기억대로 3월 10일이라면 앞뒤가 맞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버지는 대구 출장 후에 집으로 돌아왔을까? 만약 집에 아버지가 있었다면 엄마는 왜 나만 데리고 도주한 걸까?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저 능력 넘치는 강혁 아저씨가 30년이나 수사에 난항을 겪고 있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이제 이야기가 달라졌다.
내가 수사에 뛰어들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