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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기억-282화 (282/328)

살인의 기억 282화

20. vetus silentium(오래된 침묵)(6)

강북구 광산 사거리.

나는 아저씨와 함께 사거리의 큼지막한 도로 사이에 뚫린 작은 골목길로 들어갔다.

매우 오래된 주택들이 즐비한 곳을 거닐던 아저씨가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한 주택을 눈짓한다.

“저기다.”

나는 지금 가슴이 약간 두근거린다. 그렇다고 마구 두방망이질 치는 건 아니다. 약간 긴장되어 있다고 할까? 얼굴도 모르지만 내 부모님이 살던 곳이라니 그런 듯하다. 게다가 며칠 안 되겠지만 과거의 나도 이 집에서 살았을 테니까.

“칠을 다시 했나 보네요.”

오래된 집의 외관이긴 하지만 페인트칠이 비교적 깨끗하다. 강혁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인다.

“원래 벽이 시멘트색이었는데, 20년 전에 초록색으로 바꿨다가 지금은 외벽에 이렇게 노란 벽돌로 인테리어를 했다. 실제로 벽돌로 새로 지은 벽이 아니라 얇은 벽돌 모양 인테리어 재료를 붙인 거야.”

오랜 기간 수사를 한 사람답게 집의 변화를 자세히 알고 있는 아저씨.

“창문틀도 원래 알루미늄이었는데 몇 년 전에 시스템 창호로 바꿨다.”

단층 건물이지만 외벽이 낮아 키가 조금 큰 사람이라면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구조.

오래된 집이라 시멘트 바닥의 작은 마당이 있고,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시멘트 계단 두 개를 올라가야 가능한 구조의 집이다.

아저씨가 벽에 붙어서 안을 눈짓하며 말했다.

“지금은 현관문이 있지만 당시에는 미닫이문만 있었어. 전체적으로 여러 번 수리를 거친 집이다.”

아저씨의 말은 단순히 집을 수리했다는 뜻이 아니다. 30년도 넘은 집은 외관뿐 아니라 보일러 수리나 도배 등을 하며 당시의 모습과 증거들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뜻이다.

“지금 거주자는 누굽니까?”

“4년 전에 들어온 전세 세입자.”

“집주인은 과거와 같습니까?”

“그래, 달라지지 않았어.”

“집주인은 어디 있습니까?”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어.”

나는 아저씨를 돌아보며 물었다.

“서울에 집이 있는 사람이 여긴 전세를 주고 경기도에 내려가 살아요?”

아저씨가 실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한다.

“고시원 사는 놈인 거 티 내냐? 부동산에 대해 좀 알아야 수사도 하지, 이놈아. 잘 들어. 서울 산다고 돈 있는 놈이 아니다. 이런 오래된 주택 가진 사람들 중에는 자기는 좋은 집 살며 재개발 노리는 사람들이 많아. 오래된 집은 전세 주고 자기는 외곽에 있는 좋은 집에 전세 들어 사는 거지. 그럼 1가구 1주택이니 세금도 많지 않다.”

음, 그런 거구나. 집값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총경이 된 지금도 고시원에 사는 나라는 놈은 부동산으로 돈 벌 생각 따윈 없으니까.

물론 대한민국에서 부동산을 갖지 못하면 부자가 못 된다는 건 알고 있지만 너무 큰 종잣돈이 필요한 투자를 할 여력은 아직 없으니까.

나는 시간을 확인한 뒤 물었다.

“집주인 만나 보신 적 있죠?”

“있지.”

“뭐랍니까?”

아저씨는 기록된 수첩을 보지 않아도 다 외우는지 술술 말한다.

“집주인은 당시 중학교 교감 선생이었다. 교장으로 은퇴했고 후에 충청도 음성에서 주유소를 했었다. 5년 전에 주유소를 팔고 완전히 은퇴했고.”

아저씨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후, 신고한 날짜는 1989년 5월 4일. 가스와 전기료 독촉 전화를 받은 집주인이 세입자인 네 부모에게 몇 번이나 연락을 했다. 핸드폰은 물론이고 삐삐도 없던 시절이니 집 전화로 연락을 할 수밖에 없었지. 처음 연락을 취한 날짜는 4월 3일. 하지만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학교에 나가고 있는 상황이라 직접 와보기 힘들어 일주일에 한 번씩 전화 연결을 시도했지만 계속 전화를 받지 않아 결국 5월 4일에 집에 와봤다고 한다.”

“신고 사유는 뭡니까?”

단순히 집을 방문했을 때 사람이 없다고 신고할 생각을 하는 이는 없다. 뭔가 이상했으니 신고를 했을 것이다.

아저씨가 담배 연기를 뿜으며 현관을 눈짓한다.

“집 문이 열려 있었다고 했어. 마당 앞에 있는 시멘트 계단 보이지?”

“예.”

“예전에는 신발장이 따로 없었다. 계단 위에 신는 신발을 올려두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급히 나가다 찼는지 신발들이 바닥에 굴러떨어져 있었고 집에 먼지가 뽀얗게 덮여 있었다고 한다.”

“먼지…….”

“집주인과 네 부모의 사이는 좋은 편이었다. 네 엄마는 겉으로 털털해 보이지만 매우 깔끔한 사람이었어. 가끔 집에 방문했을 때 언제나 집이 깨끗했는데 아주 오랫동안 청소를 하지 않은 것처럼 먼지가 잔뜩 앉아 있었고 집 문도 열려 있는 걸 보고 이상해서 신고했다고 한다.”

“단순히 그 이유가 끝입니까?”

“아니, 혹시나 해서 여섯 시간이나 기다렸는데 밤이 늦어도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계약서를 뒤져 네 아버지 회사 이름을 알아내 전화번호부를 보고 전화를 했는데, 회사 경리가 네 아버지가 두 달 전부터 연락이 되지 않고 있다고 한 거지. 그걸 듣고 이상하다고 생각한 주인이 신고한 것이고.”

“음.”

“만약 그때 집주인이 신고해 주지 않았으면 더 늦게 알았을 거야. 그나마 네 부모와 사이가 좋아 남은 전세 기간 동안 관리비까지 자기가 내가며 집을 유지해 줬다. 하지만 두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어.”

나는 다시 한번 집을 바라보았다. 들어가 보고 싶은 굴뚝 같지만 현재 이곳에 사는 사람이 내 문제로 인해 자신이 사는 집을 불편하게 생각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그랬군요.”

바로 그때, 매우 늙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거기서 뭐 하십니까?”

고개를 돌려 보니 여든은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중절모에 코트를 입은 매우 점잖아 보이는 할아버지다.

나는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전에 여기 살았던 사람인데 잠깐 옛날 집을 보고 가려고요.”

할아버지는 중절모를 조금 올리며 날 바라본다.

“예전에 여기 살았다고? 난 처음 보는데.”

그때 강혁 아저씨가 반가운 얼굴로 나선다.

“아이고, 어르신. 저 기억 안 나십니까?”

할아버지가 아저씨를 바라보다 눈썹을 치켜뜨며 손을 덥석 잡는다.

“아니, 자네 경찰 양반 아닌가?”

“하하, 잘 계셨습니까?”

할아버지는 반갑다는 듯 아저씨 어깨를 어루만진다.

“허허. 나야 뭐.”

아저씨는 할아버지 손을 잡은 채로 날 돌아본다.

“인사드려라, 방금 말한 집주인 어르신이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부모님께 집을 빌려주고, 신고를 해주었으며 부모님이 돌아올 때까지 집을 유지해 주셨던 분이구나.

나는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할아버지가 날 빤히 보며 물었다.

“그런데…… 아까 여기 살던 사람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강혁 아저씨가 짧은 한숨을 쉬며 사정을 말하자 할아버지가 놀란 얼굴로 날 바라본다.

“아니, 새댁이 임신을 했었다고? 난 전혀 몰랐는데.”

강혁 아저씨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 여태껏 몰랐습니다. 출생 신고도 안 되어 있어서 더더욱 그랬고.”

집주인이 같이 사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았겠지만 전세를 주고 자기는 다른 곳에 사는 사람이 여기 사는 여자가 출산을 했는지 안 했는지 알 리가 없다.

할아버지는 내 얼굴을 뚫어지게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아버지 얼굴을 쏙 빼닮았네.”

사진으로만 본 아버지의 얼굴. 그를 실제로 본 사람. 묻고 싶다. 내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표정으로 말을 하고, 어떤 말투를 썼는지.

하지만 내 입에서는 아무 질문도 나가지 않았다. 꼭 누군가 입을 꿰맨 것처럼 입술이 붙어버렸다.

할아버지는 말없이 날 가만히 바라보았다. 평생 교편을 잡고 살아오며 수많은 아이들을 지켜보았을 주인 할아버지. 그는 강혁 아저씨에게 아무 설명도 듣지 않았지만 상황을 대충 짐작한 모양이다.

할아버지가 강혁 아저씨를 보며 말했다.

“경찰 양반과 함께 다니는 걸 보니 같은 경찰인 모양이군?”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이자 복잡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던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어깨를 어루만지신다.

“잘 컸네. 이렇게 바르게 자라기 쉽지 않았을 텐데. 하늘이 도우신 게야.”

뭔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부모님에 대해 모르니 내 입에서 나올 질문은 사건에 관한 것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긴 세월 동안 이 수사를 해온 아저씨가 이미 물어보셨던 질문일 공산이 크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더더욱 입을 열기 힘들어졌다.

아저씨는 내가 말을 하지 않자 자연스레 나서며 물었다.

“그런데 어르신. 여긴 어떻게 오신 겁니까? 남양주에 사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할아버지가 집을 바라보며 말했다.

“응, 이제 이 집을 팔려고.”

“예?”

“이제 내 도리는 다했다 싶어서 말이야.”

“아…….”

할아버지는 회한이 서린 눈빛으로 집을 바라보며 말했다.

“작년에 자네가 날 찾아왔었지. 새댁이 백골 사체로 돌아왔다고. 서럽게 울면서 말이야.”

“…….”

나는 아저씨를 보았다. 민망한 얼굴이 된 아저씨는 내 눈길을 피한다.

할아버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혹시나 새댁이 돌아오면 말이야. 내 이 집을 주려고 했어. 돌아와 준 것만으로 고마워서.”

할아버지가 집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작년에 자네 말을 듣고 나니 더는 이 집을 내 소유로 해놓을 이유가 없더군.”

할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당시 전셋값 받은 것도 그대로 있어. 물가와 금리도 많이 올랐으니 큰돈이 되었겠지. 계산은 안 해봤지만 지금 이 집값 정도는 될 거야. 안 그런가?”

그런 건 잘 모른다. 할아버지가 이제 와 이 집을 판다고 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다. 나는 지금껏 내 부모를 기억해 준 할아버지가 그저 고마운 마음밖에 없다.

할아버지는 푸근하게 웃으며 강혁 아저씨를 바라본다.

“이달 말이 계약 기간이 끝나는 날이야. 세입자에게 이미 나가라고 했고. 도배 장판을 새로 한 뒤 집을 팔려고 했는데…… 집주인이 나타나 버렸군?”

강혁 아저씨의 눈이 커진다. 아저씨는 나와 할아버지를 번갈아 바라보다 물었다.

“이놈에게 집을 주시겠다는 뜻입니까?”

아저씨의 말에 나는 조금 많이 놀랐다.

할아버지가 날 보며 웃는다.

“자네 부모가 내게 받아야 할 전셋값이 있어. 찾아가질 않아 은행에서 불리기도 했고 다른 곳에 투자해 더 큰돈을 벌었지. 자네에게 이 집을 줘도 내게 손해는 아니네. 어떤가? 오래된 집이긴 해도 살 만한 집인데.”

“…….”

너무 갑작스러운 일. 이런 때는 뭐라고 대답해야 되지?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아저씨도 할아버지의 결정이 꽤 놀라운 모양인지 입을 떡 벌리고 있다가 얼른 내게 눈짓하며 고개를 마구 끄덕인다. 받으라는 신호인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선뜻 할아버지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 갑자기 집을 준다는데 넙죽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저는 그게…….”

할아버지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내가 자네에게 주는 것이 아니네.”

“…….”

“자네 부모가 남긴 유산이지.”

부모님이 남긴 유산.

내게도 그런 것이 있었구나.

혼자인 줄 알았던 내게도 부모님이 있었고, 그들이 남긴 유산이 있었다.

너무 늦게 찾았지만. 누군가의 호의 없이는 찾지 못할 것들이었지만.

강혁 아저씨의 집요한 수사로 부모님의 존재를 찾았고.

주인 할아버지의 호의로 유산을 찾았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집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부모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찾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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