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284화
20. vetus silentium(오래된 침묵)(8)
전화를 끊은 나는 손깍지를 끼고 요셉 신부님의 말을 복기했다.
‘열하나가 아니라 아홉이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일까?’
평소 알고 지내는 신부님은 아니지만 그의 태도를 보면 안다. 그는 매우 입이 무거운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굳이 단서를 주었다. 그것이 아무 의미 없는 단서일 수는 없다. 반드시 뭔가 의미가 있다.
그때 KCSI에 다녀온 연주가 사무실로 들어오며 말했다.
“과장님! 필적 감정 결과 성경책에 써 있던 이름은 미카엘 신부의 필적이 맞았습니다.”
나는 들어오는 연주를 바라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성경책이 발간된 것은 장진수 놈이 태어나기도 전이다. 책 뒤에 쓴 이름은 미카엘 신부의 필적. 그렇다는 건 이 성경을 놈에게 선물한 사람이 미카엘 신부라는 뜻이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다. 나는 즉시 옷을 챙겨 들고 말했다.
“나 대구에 좀 다녀오마.”
연주가 내려놓았던 가방을 다시 들며 말했다.
“같이 갈게요.”
“아냐, 그냥 노파심에 가는 거니까 괜히 인력 낭비 말자. 연주는 두 시간에 한 번은 병원에 전화해서 장진수 상태 확인해. 의식 돌아오면 직접 가서 지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에 올라탄 뒤 핸드폰을 뒤져 현중이 전화번호를 찾았다. 시동을 걸고 차를 빼며 전화를 걸자 현중이가 잔뜩 기합이 들어간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충성! 종로경찰서 강력 3반 경장 김! 현! 중! 근무 중 이상무!
녀석도 내 전화번호를 저장해 뒀구나.
“오랜만이다. 잘 지냈지?”
-예, 과장님. 잘 지냈습니다.
“지금 대구에 있다고?”
-예, 그렇습니다.
“소아 전문 병원?”
-예, 그렇습니다.
“문자로 병원 주소 좀 보내.”
-내려오시는 겁니까?
“그래, 내려가서 보자.”
-준비해 둬야 할 것이 있을까요?
“너 미카엘 신부가 거기 내려갔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같이 있었지?”
-예, 그렇습니다.
“숙소는?”
-이쪽 성당 교구에서 마련해 준 숙소를 이용하고 있는데 저는 들어갈 수가 없어서 가까운 모텔에서 잡니다.
“신부가 숙소 들어간 후부터는 경호 못 하는 거야?”
-예, 그렇습니다만 사정을 알고 있는 교구에서 자체 경호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저는 공식 일정만 따라다니고요.
“좋아, 내려갈 테니까 지난 며칠간 미카엘 신부 행적 싹 정리해 놔.”
-예? 아…… 어떤 것 위주로 말씀이신지.
“뭐든 작은 것이라도. 어딜 가서 뭘 먹고 뭘 봤는지 전부 정리해.”
-알겠습니다.
“내려가서 보자.”
전화를 끊은 나는 복잡한 머리를 털어내며 액셀을 밟았다.
* * *
대구 수성 네거리.
약속한 카페에 도착하자, 구석 자리에 있던 현중이가 손을 번쩍 든다.
“과장님! 여깁니다.”
주변을 살피며 눈치껏 경례는 생략하는 현중이. 나도 대충 손을 들어 보인 후 녀석에게 다가갔다.
자리 앞에 큰 창문이 있어 대로가 훤히 보이는 카페. 맞은편에 하얀색의 커다란 건물을 눈짓한 내가 질문을 던졌다.
“저 병원에 있어?”
“예, 현재 아이들 병실을 돌며 기도해 주고 있습니다.”
“너 여기 와 있으면 거긴 어쩌고?”
“관할서 협조 얻어서 순경 넷 지원받았습니다.”
“잘했네. 그게 보고서야?”
“예, 여기.”
패션 잡지책 두께의 보고서. 내 요청에 급히 준비한 보고서는 아닌 것 같다. 매일매일 하루 일과를 모두 정리해 놓은 것이 분명하다.
나는 보고서 두께를 보며 웃었다.
“현중이, 일 잘하네?”
“가, 감사합니다!”
나는 눈웃음을 지어 보인 후 보고서를 넘겼다.
현중이는 생각보다 꼼꼼한 녀석인 것 같다. 정확한 시간과 이동 동선, 화장실 간 시간까지 모두 기록되어 있다. 항상 오전 여섯 시에 시작해 오후 아홉 시면 끝나는 미카엘 신부의 일과가 잘 정리되어 있다.
나는 보고서를 넘기며 중얼중얼 내용을 읊었다.
“새벽 여섯 시에 대구 교구 소속의 성당에서 아침 미사. 이거 매일 드리나?”
“예, 그렇습니다. 약 한 시간 정도 혼자 기도를 올립니다.”
“아침 식사 후에 대구 성지 순례. 성모당, 성유스티노 신학교, 관덕정, 서상돈 고택, 천주교 주교좌계산성당 방문.”
“예, 여기 내려온 첫날 스케줄이었습니다.”
“오후에는 신나무골, 여부재, 동명 성당, 한티 성지를 돌았고 오후 일곱 시에 식사 후 다시 개인 미사 후 취침.”
“예, 맞습니다.”
“어디까지 같이 있었어?”
“취침 전 개인 미사 직후까지 같이 있었습니다. 성당 맨 뒷자리에 앉아서 지켜봅니다.”
“숙소 들어간 후에는?”
“바깥 경계하며 수상한 놈 없는지 확인 후에 열 시쯤 숙소로 복귀합니다.”
“다음 날 새벽 여섯 시에 성당으로 나오고?”
“예, 나오면 어김없이 혼자 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음.”
현중은 마치 숙제 검사라도 당하는 듯 긴장한 얼굴이다.
다음 날의 행적은 매우 간단하다. 아침 미사 후 식사, 이후 소아 전문 병원에 가 하루 종일 아이들과 놀아준 스케줄이다. 중간에 점심과 저녁 식사를 한 것 외에는 특별한 일정이 없다.
나는 외부에 보이는 병원을 눈짓하며 말했다.
“오늘 스케줄은 아직 정리 안 됐네?”
“예, 보통 일과 끝나고 숙소에 가서 정리합니다. 핸드폰에 메모를 해놨는데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 일정입니다.”
“하루 종일 병원에만 있었어?”
“예, 그렇습니다.”
음, 딱히 의심할 바 없는 스케줄이다. 나는 다시 첫날 스케줄을 확인하며 말했다.
“첫날 말인데, 여기 써 있는 보고내용 말고 다른 건 없었어?”
“예?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
“뭐든 좋아. 이상했던 것도 좋고.”
“이상한 점은…….”
“아, 꼭 이상한 거 아니라도 좋아. 일상적인 것들 중에 여기 안 쓴 거 있어?”
“아…… 그게.”
현중이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그게, 오전 성지 순례를 마치고 점심을 먹은 후 오후 순례 성지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나는 다시 보고서의 일정을 확인하며 말했다.
“천주교 주교좌계산성당에서 신나무골로 가는 길 맞아?”
“아닙니다. 성당에서 나온 후에 식당에서 밥을 먹었으니 식당에서 신나무골로 가는 길로 봐야 됩니다.”
“좋아, 그런데?”
“성당에서 도보 13분 거리에 있는 서문 시장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메뉴는 육개장이었고.”
“계속해.”
“좁은 골목길이라 차가 들어가지 못해 도보로 이동했는데 식사 후에 다시 차를 타러 가는 길에 미카엘 신부가 약간 이상한 소리를 했습니다.”
“이상한 소리?”
“예, 거기가 금은방 골목 앞이었습니다.”
“시장 내에 금은방 골목이 있어?”
“예, 그렇습니다.”
“뭐라고 했지?”
현중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여기 여인숙이 있었는데 없어졌구나. 예전과 많이 바뀌었네.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전과 많이 바뀌었다? 신부는 2년에 한 번씩 성당을 옮긴다. 주임 신부는 5년에 한 번씩 옮긴다. 미카엘 신부는 대구에서 근무해 본 적이 있었던 걸까?
현중이가 몸을 내밀며 말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뭐라고?”
현중이가 그때의 대화를 떠올리며 말했다.
‘신부님, 여기 와 보신 적이 있나 봅니다?’
‘하하, 어떻습니까? 살기 좋은 동네 같지요?’
‘네, 그러네요. 시골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대도시인 줄 몰랐습니다. 저야 말로 서울 촌놈이었네요.’
‘요즘은 그렇죠. 옛날에는 여기도 시골이었는데 말입니다.’
‘아까 여인숙 이야기 하시던데. 여기서 묵어보신 적이 있나요?’
‘하하, 설마요. 여기 오면 교구가 있는데 제가 왜 여인숙에 가겠습니까?’
‘아, 그러시구나.’
현중이가 잠시 말을 멈추며 복잡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본다.
“그저 옛날에 내가 여기서 한 일이 생각이 나 잠깐 회상에 젖었던 모양입니다.”
현중의 눈빛이 본래의 색으로 돌아오며 몸을 내민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필요 이상의 연기까지 포함된 진술이었지만 당시 상황이 여실히 전달된다. 나는 턱을 쓸며 중얼거렸다.
“옛날에 여기서 한 일?”
“예, 그렇게 말했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안 물어봤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이동 차량이 도착해서 바로 차에 타서 이동했습니다.”
미카엘 신부가 예전에 서문 시장 금은방 골목에서 했던 일. 그것이 무엇이길래 회상에 젖었을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 연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주야.”
-네, 과장님. 대구 잘 도착하셨어요?
“어, 여기서 현중이 만났다. 다른 게 아니라 하나만 확인해 줘.”
-네 말씀하세요.
“미카엘 신부가 대구에서 근무한 적 있는지 알아봐.”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나는 다시 현중이의 보고서를 넘겨보며 연주를 기다렸다.
잠시 후 연주가 말했다.
-대구에서 근무 기록은 없어요.
“그래?”
미카엘 신부는 대구에서 근무한 적이 없다. 그런데 여기서 무슨 일을 했다. 사제가 되기 전의 일일까? 날 때부터 신부는 아니었으니 사제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어떤 추억이 있었을 수도 있다.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닐 수도 있고.
연주가 키보드 소리를 내며 말했다.
-신부로 첫 부임한 곳은 순창이었습니다. 1987년부터 1989년까지. 다음으로 부임한 곳이 영주. 여기서 1991년까지 있었고, 상주에서 1993년까지, 아산에서 1995년까지 있다가 홍성으로 부임했어요.
“대구 근처는 전혀 없어?”
-음, 잠시만요. 대구, 대구…… 지도상으로 상주가 그나마 제일 가까운 곳이었어요.
1991년부터 1993년까지 근무했던 상주. 지금은 금세 갈 수 있는 거리이지만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편한 교통편이 많지 않은 시절이었다. 쉽게 오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니라는 뜻이다.
연주가 다시 말을 이었다.
-홍성에 97년도까지 있다가…… 서울로 왔네요. 그 후에 다시 평창, 가평을 거쳤네요.
97년에 서울로 왔다. 이후 평창을 거쳐 가평까지 총 세 개의 도시를 거쳤으니 6년이 지났다고 보면 된다.
연주가 다시 말을 이었다.
-2005년에 여주로 갔고요.
응? 왜 갑자기 2005년이야? 2003년이 아니고?
“중간에 빠진 곳이 있는 것 같은데. 연도가 안 맞아.”
-아, 가평 근무 때부터 주임신부가 됐어요.
아, 주임신부. 그럼 5년 근무지. 나는 별생각 없이 넘어가려다 멈칫했다.
“주임신부?”
“네, 과장님.”
나는 순간 장진수와 미카엘 신부의 접점에 대해 떠올리고 급히 물었다.
“미카엘 신부가 단양에 부임한 거 몇 년도야?”
-여주 근무 마치고 2010년 10월부터입니다.
나는 순간적으로 코를 찡그렸다. 2010년 10월이라고?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다시 한번 확인했다.
“2010년이라고?”
-네, 과장님.
“연주야.”
-네.
“장진수 부모들 말이야. 실종 후 사망 처리 신고된 게 언제인지 기억해?”
-아, 그게…… 2016년이네요.
2016년. 실종 5년 후 자동으로 사망처리되는 대한민국의 시스템상, 놈의 부모가 사망한 것은 2010년에서 2011년 사이라고 봐야 한다.
장진수의 부모가 사망할 무렵, 그곳에 미카엘 신부가 있었다. 그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루이사 수녀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착각이 든다.
‘천사 미카엘은 최후의 심판이 있는 날, 나팔을 부는 임무와 함께 인간의 영혼을 저울에 다는 역할을 한단다.’
그리고 또 하나.
요셉 신부님의 말이 머리를 스쳐간다.
‘열하나가 아니라 아홉입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미카엘 신부가 아이들을 만나고 있는 병동을 바라보았다.
“설마…….”
순간 장진수 놈이 병원에서 한 말까지 번개처럼 떠오른다.
‘항상…… 억울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걸었는데…… 형사님은 아무것도 걸지 않았으니까.’
‘이제…… 게임이…… 공평해진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