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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기억-285화 (285/328)

살인의 기억 285화

20. vetus silentium(오래된 침묵)(9)

“과장님?”

멍하게 생각에 빠져 있는 날 부르는 현중이의 목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리는 메아리같이 느껴진다. 눈은 녀석을 보고 있지만 정신은 아득하게 날아가 있는 상황.

“과장님, 어디 불편하십니까?”

나는 다시 한번 나를 부르는 현중이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나는 지금껏 착각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감옥에 있던 장진수가 자신에게 잘못된 가르침을 준 스승을 죽이러 나왔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매우 합리적인 보통 사람의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악마를 상대하는 사람. 보통 사람의 생각으로 접근하는 것은 처음부터 오류였다.

‘만약 놈이 미카엘 신부에게 배운 것이 종교가 아니라면.’

아니다. 반드시 종교는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갑작스레 종교가 없던 놈이 열성적으로 성당에 나가게 되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종교만은 아니라는 가정은 해볼 수 있다.

‘미카엘 신부가 2010년도에 단양에 있었다. 이건 명백한 내 실수다. 살인자를 검거했다는 생각에 안일하게 넘어간 일들이 문제였던 거다.’

좀 더 확실히 확인했어야 한다. 물론 그건 형사의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미 검거된 살인마의 과거에 대해 연구하고 범죄 심리에 대한 데이터를 축적하는 것은 학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내 추론이 옳다면 나는 큰 실수를 한 것이다. 열하나를 죽인 살인마는 검거했지만, 둘을 죽인 살인마는 검거하지 못한 실수.

나는 처음 장진수를 검거했을 당시, 내기에서 이긴 후 들었던 진술 내용을 떠올렸다. 놈은 당시 자신의 이름을 언론에 밝히는 대가로 순순히 진술에 임하며 이런 말을 했다.

‘아버지란 새끼는 의부였습니다. 진짜 아버지는 얼굴도 본 적 없습니다. 그 새끼는 매일 저를 때렸고, 감금했습니다. 꼭 엄마가 보지 않을 때만 그랬죠. 일을 다녀온 엄마에게 그 새끼가 자꾸 절 때린다고 일렀지만 엄마는 오히려 그 사람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며 진짜 아버지가 아니라 싫은 마음에 거짓말을 하면 못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루이사 수녀님이 해주신 미카엘 천사에 대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미카엘이란 이름이 가진 뜻은 Quis ut Deus. 한국어로 ‘누가 하느님 같으랴?’라는 뜻이다.

나는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겼다.

‘장진수는 어린 시절 의부에 의한 지속적인 폭행을 당했다. 친모에게 사실을 고백했지만 친모는 오히려 어린 아들을 탓했다. 지옥 같았겠지. 처음에는 어린 마음에 자신의 잘못만을 탓하며 마냥 두려워했겠지만 머리가 커가며 의부에 대한 분노는 커졌을 것이고 종국에는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을 거다. 하지만 실행하지 못했겠지.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니까. 그런 녀석 앞에 미카엘 신부가 나타났다.’

만약 미카엘 신부가 놈의 부모를 죽였다면. 장진수 입장에서 미카엘이 어떻게 보였을까?

하느님의 군대를 이끌고 하늘에서 사탄의 군대와 맞서 싸우는 천사.

여호수아기를 보면 ‘약속의 땅’에서의 전투 초반에 여호수아가 ‘주님 군대의 장수’와 만났다는 기록이 있다. 그때 장진수에게 미카엘은 주님 군대의 장수와 같아 보이지 않았을까?

자신을 지옥에서 구해준 구세주 같았을 테니까.

나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를 갈았다. 총을 맞고 창백한 얼굴로 침상에 누워 있던 놈이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자신은 모든 것을 걸었는데, 나는 아무것도 걸지 않아 억울했다. 그리고 이제 게임이 공평해졌다.”

살인자 미카엘 신부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의 곁에 있다. 그것은 내게도 충분한 위험부담이 된다는 뜻.

그리고 만약 내가 게임을 빨리 해결하지 못하면 내게도 잃을 것이 생긴다는 뜻이다. 아니, 그럴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미카엘 신부가 있는 병원을 노려보았다.

“이 개 같은.”

갑자기 으르렁거리며 욕설을 뱉는 통에 놀란 현중이가 움찔한다.

나는 한참 병원을 노려보다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 증거는 없다. 단순한 추론일 뿐이다. 설마 사제가 사람을 둘씩이나 죽였다고?’

믿을 수 없는 건 그뿐이 아니다. 이야기의 흐름을 보면 미카엘 신부는 어린 장진수가 보는 앞에서 두 사람을 죽였을 확률이 높다.

‘그때 단양의 본가 지하실에서 발견된 두 구의 시신.’

장진수 부모님의 시신은 놈이 했던 방법 그대로 단백질 투명화가 진행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그것은 장진수가 했던 살인 행위가 모방범죄라는 뜻.

그 미친 짓을 최초로 시행했던 것은 장진수가 아니라 미카엘이란 뜻이 된다. 그럼 사제라는 인간이 사람을 죽인 것도 모자라 저 짓거리를 했고, 아직 머리도 굵어지지 않은 아이 앞에서 가르치듯 살인 후 사체 훼손을 했다는 뜻이 된다.

어린 시절부터 신부님, 수녀님들 사이에서 자란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나는 지금 사력을 다해 회피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병원을 노려보며 말했다.

“현중아.”

“예?”

“미카엘 신부가 언제 서울로 돌아간다고 했지?”

“내일 오후 다섯 시 기차입니다.”

“…….”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전후 상황을 보았을 때 미카엘이 쌍문 성당으로 돌아가면 위험해질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기우일 수도 있다. 내가 장진수라는 미친놈 손에 놀아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미카엘 신부가 쌍문 성당에 온 시기는 몇 달 전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사고가 난 적은 없었다.

‘불안해.’

어쩌면 아무 죄 없는 사람일지도 모르지만 불안하다. 불안해서 미칠 것 같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병원을 노려보았다. 16년도 넘은 일. 이제는 증거조차 남지 않은 일에 대한 단서를 찾아야 저 사람이 살인자인지 아닌지 확실해진다. 하지만 만약 내가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럼 어찌 되는 거지?

‘요셉 신부가 파문 이야기를 했었다.’

미카엘 신부는 모종의 일로 파문이 논의되고 있다고 했다. 파문이 된다면 그가 성당을 떠날 때까지 수녀님들을 지켜내야 할 것이고, 만약 파문이 되지 않는다면 무려 그의 주임 신부 재임 기간인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불안감에 떨며 살게 될 것이다.

“젠장, 미치겠네.”

이럴 때가 아니다. 나는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현중아.”

“예.”

“미카엘 신부 쌍문 성당 도착할 때까지 경호 예정이지?”

“예, 맞습니다.”

“지금 이 시간부터 한 시간 단위로 이동 시간, 장소, 특이 사항 모두 내게 다이렉트로 보고해.”

“예? 아, 예…….”

일단 미카엘 신부가 여기 있는 오늘과 내일은 성당이 안전하다. 당장 연주에게 성당의 보육원 주변 경호 인력을 늘리고, 여경들을 동원해 보육원 내에서 숙식하며 경호하도록 지시를 변경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다시 한번 병원을 노려보았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무려 16년 전에 벌어진 사건에, 장진수 놈이 본인이 했다고 증언한 살인사건의 진범. 그걸 밝혀낼 수 있을까?

‘할 수 있을까, 없을까……가 아니라 반드시 해야 돼.’

아니면 나의 수녀님들과 아이들이 위험해지니까.

나는 짧은 한숨을 쉰 뒤 현중이를 힐끔 보았다. 그래도 날 위해 자료를 준비해 줬는데 아랫사람이라고 인사도 없이 휙 나가는 건 예의가 아닌 듯해서였다.

하지만 녀석의 눈을 보는 순간 나는 또 다른 것이 떠올랐다.

‘신부님, 여기 와보신 적이 있나 봅니다?’

‘하하, 어떻습니까? 살기 좋은 동네 같지요?’

‘네, 그러네요. 시골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대도시인 줄 몰랐습니다. 저야말로 서울 촌놈이었네요.’

‘요즘은 그렇죠. 옛날에는 여기도 시골이었는데 말입니다.’

‘아까 여인숙 이야기 하시던데. 여기서 묵어 보신 적이 있나요?’

‘하하, 설마요. 여기 오면 교구가 있는데 제가 왜 여인숙에 가겠습니까?’

‘아, 그러시구나.’

미간을 좁힌 나는 현중이 얼굴을 바라보다 물었다.

“아까 말했던 여인숙 말인데.”

갑자기 두서없이 말을 해대는 나 때문에 혼란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눈치가 빠른 녀석인지 잠시 눈알을 굴리다 알아먹는 현중이.

“아! 예, 과장님.”

“여기서 멀어?”

현중이가 바깥 도로를 두리번거리다 말했다.

“차로 가면 10분 조금 더 걸릴 겁니다.”

“서문 시장 금은방 거리라고 했지?”

“예.”

“잠깐 시간 되면 안내 좀 해줄래?”

현중이는 영문 모를 얼굴이었지만 감히 총경의 지시에 질문을 할 순 없었는지 벌떡 일어난다.

“예, 제 차로 모시겠습니다.”

“부탁해.”

대구 서문시장.

금은방 거리 근처에 주차를 하고 주변을 기웃거리던 현중이가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음, 그러니까 저쪽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이 길로 왔습니다. 이쪽으로 쭉…… 걸어서 아, 여기네요.”

금은방 거리 중간쯤에 선 현중이가 한 건물 방향을 보며 말했다.

“여기 서서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현중이가 바라본 건물을 올려 보았다.

다른 낡은 건물들에 비해 비교적 새 건물인 것을 보니 재건축된 건물인 모양이다. 지하에는 코인 노래방이 있고, 1층에는 분식집과 성인 오락실이 보인다. 2층에는 PC방, 3층에는 당구장이 있다.

“미카엘 신부가 여기서 예전에 했던 일이 생각났다고 말했다 이거지?”

“예, 맞습니다. 여기가 원래 여인숙이었다고 했고.”

그때 1층 성인 오락실에서 배꼽 위로 바지를 바싹 끌어 올리고 몸에 딱 붙는 티셔츠에 팔에 문신이 잔뜩 있는 인상 더러운 남자가 담배를 물고 나오다 우릴 바라본다.

그는 건장한 남자 두 명이 업소 앞을 얼씬거리는 것이 신경 쓰이는지 힐끔거리며 오락실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인다. 강해 보이고 싶은지 괜히 깡통으로 만든 재떨이를 발로 툭툭 건드리며 째려보는 건달.

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실례인 줄 알면 그냥 가.”

“예?”

“안다며? 알면서 왜 실례를 해?”

“…….”

“어디 애들이냐? 명륜? 수성?”

이놈이 지금 나와 현중이 녀석을 깡패로 보고 있는 건가? 현중이가 황당한 얼굴로 나선다.

“이 새끼가 지금.”

나는 건달을 들이받으려 하는 녀석을 손으로 밀쳤다.

“됐다.”

깡패 놈은 의자에 앉아 배를 내밀며 씩 웃는다.

“그래, 선배 말 들으면 자다가 떡이 나온다. 어린놈이 눈치 좀 챙겨야 오래 살지?”

나는 발악하려는 현중이를 뒤로 밀어낸 뒤 신분증을 꺼내 깡패 놈에게 내밀었다.

“뱃살 짜내서 주유소에 팔아 버리기 전에 아가리 닥쳐라.”

놈은 내 신분증을 보고는 담배를 툭 떨군다.

“겨, 경찰?”

나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는 놈의 뱃살을 꽉 붙잡았다.

“어이구, 이 기름 봐라. 기름이 너무 껴서 미국이 침공하겠네. 돼지 새끼야.”

“…….”

현중이가 실소를 짓는다. 자신은 말려놓고 심각한 언어 폭행 중인 과장이 황당한 모양이다.

깡패 녀석은 신분증을 보고 헛기침을 한다. 하지만 동네에서 어깨에 힘깨나 주고 다니는 녀석인지 자세를 고치며 말했다.

“어느 서에서 나오셨는지? 나 여기 수성 경찰서 김 계장님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인데.”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어이구, 그러세요? 그럼 전화 한번 해볼래?”

깡패는 날 째려보다 핸드폰을 든다. 진짜 전화를 거는 걸 보니 아는 사람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여보세요, 형님? 나 순성인데. 예, 어제 잘 들어갔죠? 예, 예. 아니 다름이 아니고 업장에 경찰이 와서. 예? 아뇨, 전혀 사고 친 거 없어요. 예, 예예. 바꿔 드려요? 아, 예.”

순성이란 놈이 핸드폰을 손으로 막으며 씩 웃는다.

“좋은 말로 할 때 듣지 그랬어, 경찰 아저씨 당신 이제 X 됐다?”

응, 그래. 네 미래에 대해 스스로 자기소개 중이구나. 나는 검지손가락을 들어 놈이 내민 핸드폰 화면에 스피커 폰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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