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286화
20. vetus silentium(오래된 침묵)(10)
“예, 전화 바꿨습니다.”
-어, 나 수성 경찰서 강력계 김호철 계장인데. 어디서 나왔어?
“업무상 비밀입니다만.”
-뭐? 너 이 새끼. 어디 소속 놈이야? 거기가 어디인 줄 알고 기어가서 행패야?
“여기 오락실입니다만.”
-이 개새끼가 장난질을 치나, 너 거기 딱 기다려. 어디서 내 동생 가게에 가서.
순성이 놈이 큰소리를 치는 김호철 계장의 목소리에 비실비실 웃는다. 거봐라, 너 이제 큰일 났다는 얼굴이다.
나는 놈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놈은 내 미소를 보고 눈썹을 꿈틀거린다.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놈이 들고 있는 전화기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말했다.
“어이.”
-어이? 이 새끼가 진짜 미쳤나.
“김호철 계장.”
-왜, 이 새끼야.
“나한테 기다리고 했지?”
-그래, 이 새끼야. 딱 기다려. 오늘 강냉이 다 털어줄 테니까.
“5분 준다, 튀어 와.”
-하, 이 미친 새끼가.
“김호철 계장.”
-왜, 이 새끼야!
“나 국가수사본부 중대범죄 수사과장 총경 현도경이다.”
-…….
지금껏 상대가 지르는 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온몸을 부르르 떨던 핸드폰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진다. 나는 싱글싱글 웃으며 순성이 놈을 바라보았다.
“5분 준다.”
검지를 세우고 핸드폰의 통화 해제를 누르자, 순성이 놈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침을 꿀꺽 삼킨다.
이런 시골 깡패가 아는 경찰 조직은 강력계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이름부터 범상치 않은 국가수사본부라는 이름에 직감적으로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놈이 벌떡 일어나 90도로 허리를 숙인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형님!”
눈치가 빠른 녀석이구나. 나는 놈의 뒷목 살을 꼬집어 허리를 바로 세우며 다른 손으로 놈의 출렁거리는 뱃살을 툭 쳤다.
“앉아 있어, 아까 자세 그대로.”
“…….”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순성이 놈이 내 눈을 바라본다. 비록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은 날 보며 흠칫 놀란 놈이 엉거주춤 플라스틱 의자에 앉는다.
나는 놈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담배 물어.”
“…….”
“아까처럼 물라고.”
놈이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낸다. 손이 발발 떨리는 걸 보니 상황을 완전히 눈치챈 모양이다. 나는 친절하게 놈의 다리를 꼬아주었다.
“아까 이러고 있었잖아. 엉덩이 더 앞으로 내밀고, 배도 내밀어, 인마. 아까 자세 그대로.”
순성이 놈이 식은땀을 흘리며 아까 자세를 기억해 내고 어색하게 따라 한다. 나는 예술 작품을 감상하듯 두 걸음 떨어져 놈을 살펴보다 현중에게 물었다.
“아까 자세 맞아?”
현중이는 재미있다는 듯 팔짱을 끼고 웃는다.
“재떨이 위치가 좀 다른데요?”
“아, 맞다. 인마, 재떨이 아까처럼 발로 차서 밀어놔.”
순성이 놈이 발발 떨리는 다리로 재떨이를 슬쩍 민다. 아까처럼 박력 있게 찬 건 아니지만 대충 위치가 맞으니 됐다.
“김호철 올 때까지 그 자세로 있어. 움직이면 오늘 둘 다 뒤지는 거야.”
내 말에 순성이는 그대로 얼음이 된다.
정확히 4분 후, 승용차 한 대가 미친 듯이 골목길 앞에 선다.
주차할 수 있는 곳이 아니지만 운전석에서 뛰어내린 남자가 이쪽을 바라본다. 아직 내가 진짜 수사과장이라는 확신이 없으니 급히 뛰어오진 않는다.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지만 여유롭게 걸어오는 김호철.
나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정확히 사 분이 지났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간은 지켜 온 모양이다. 여기까지 오 분 내에 왔다는 건 미친놈처럼 운전해서 왔다는 건데 도착 후 저렇게 천천히 움직이는 걸 보니 마지막 자존심이 남은 모양이다.
김호철 계장을 본 순성이가 울상을 짓는다.
“혀, 형님.”
형님 앞에서 감히 이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이 불경하다 생각했는지 담배를 버리고 일어나 열중쉬어 자세를 취하는 순성이.
나는 놈을 돌아보며 씩 웃었다.
“움직이면 어떻게 된다고 했지?”
순성이가 울대를 꿀렁거린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놈이 외쳤다.
“그, 그렇지! 형님 오실 때까지 이 자세로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오신 다음에 움직였으니 괜찮은 것 아닙니까?”
생각보다 머리가 돌아가는 녀석이네.
“음, 그랬지, 참.”
김호철 계장은 장난 같은 이 상황을 살피다 말했다.
“신분증 좀 보여주시죠?”
나는 손을 내미는 김호철 계장을 빤히 보다 말했다.
“깡패 새끼와 호형호제하는 강력계 계장이라?”
“…….”
“돈도 좀 받아 챙기고, 술도 좀 얻어 드시고. 어?”
김호철 계장은 손을 내민 채 날 살핀다.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는 것이 내가 진짜 수사과장이 맞는지 가늠하는 모양이다. 하긴 나는 총경에 수사과장이라고 하기엔 너무 젊다.
‘하, 나 지금 뭐 하냐?’
지금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이런 녀석들과 놀아주고 있을 시간이 없다.
나는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 던졌다. 공중으로 날아오는 신분증을 받아서 확인한 김호철 계장이 사색이 되어 차려 자세를 한 뒤 경례를 한다.
“충! 성!”
자기 형님이 정자세로 경례를 하는 것을 보고는 순성이 놈도 군인처럼 차려 자세를 한다.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 한숨을 쉬었다.
“다른 건 됐고, 수사 때문에 여기 조사 좀 해야 되는데 협조 좀 합시다.”
김호철 계장은 얼른 달려와 순성이의 뒤통수를 때리며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이놈은 제가 따로 교육을.”
“아, 됐어요. 그보다 여기 토박이십니까?”
김호철 계정이 얼른 고개를 끄덕인다. 이 사람 입장에서는 어떡하든 상황을 반전시켜야 하니 협조적일 수밖에 없다.
“예, 대구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나는 오락실이 있는 건물을 눈짓하며 물었다.
“여기 원래 여인숙이 있었다고 하던데.”
김호철 계정이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예, 맞습니다.”
“언제 바뀐 겁니까?”
“한 8년 됐습니다.”
“건물 허물고 다시 지은 겁니까?”
“예.”
하, 오래전에 미카엘 신부가 여기서 뭔가를 했다. 하지만 건물은 허물어지고 완전히 새 건물과 새 가게들이 들어섰다. 여기서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을 거다.
나는 잔뜩 얼어붙어 있는 순성이 녀석을 힐끔 보았다. 내 시선이 닿은 것뿐인데 어깨를 움츠리는 녀석. 덩치가 아깝다, 이놈아.
나는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건물을 올려 보았다.
“하, 여인숙 주인을 찾으려면 시간 좀 걸리겠지? 현중아.”
뒤로 물러나 있던 현중이가 나선다.
“예, 과장님.”
“원래 여기 있던 여인숙 운영하던 사장 좀 알아봐.”
“예, 알겠습니다.”
그때 건물을 올려 보던 내 시야에 누군가가 손을 슬며시 드는 것이 보인다. 시선을 내려 보니 겁먹은 얼굴의 순성이가 손을 들고 있다.
“뭐?”
“저기…….”
순성이가 김호철 계장 눈치를 살핀다. 계장은 옳다구나 하는 얼굴로 순성이 녀석을 앞으로 밀어 세운다.
“그, 그렇지! 과장님. 이놈이 도움이 될 겁니다.”
깡패 새끼가 무슨 도움이. 나는 다시 순성이를 보았다.
“뭔 도움?”
순성이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인숙…… 그거 저희 아버지가 하던 곳인데요.”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관련자가 튀어나왔다. 여인숙 주인을 찾아다닐 수고를 덜어 기분이 좀 나아진다. 나는 구겼던 인상을 펴며 물었다.
“아버지 어디 계셔?”
“집에 계십니다.”
“여기 너네 집 건물인가?”
“예, 명의는 여전히 아버지 이름이고 저는 1층 오락실만 관리합니다.”
“나머지 다 월세 줬고?”
“예.”
“너도 여기서 컸냐?”
“아…… 고등학교 때까지 여기서 컸습니다, 스무 살부터는 부산에서 좀 살다 다시 돌아왔습니다.”
“몇 살이냐?”
“서른인데요.”
음, 생각해 보니 괜히 물었다. 미카엘 신부가 여기서 무얼 했는지 모르는 건 당연하지만 언제 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언제부터 여인숙을 운영하셨지?”
“어…… 저 태어나기 전부터 하셨다고 들었는데.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너 집 머냐?”
“예, 근데 아버지 집은 바로 저기인데.”
순성이가 가리키는 곳. 서문 시장 대로를 건너 길가에 보이는 주택이다. 나는 눈짓하며 말했다.
“안내해.”
“예!”
나는 순성이를 따라가려다 엉거주춤 서 있는 김호철을 바라보았다.
“김호철 계장.”
“예? 예!”
“강냉이를 어쩌고 어째?”
“죄, 죄송합니다!”
나는 그의 어깨를 꽉 잡았다.
“깡패 새끼들과 유착 관계 털어서 뭐 나오기만 해, 옷 벗을 각오하고.”
“죄, 죄송합니다!”
“가.”
“예?”
“꺼지라고.”
“아, 알겠습니다.”
“서에 가서 나 여기 있다고 말하지 말고. 귀찮으니까.”
“예…….”
총경이 내려온 건 문제가 안 되지만 국가수사본부 과장이 내려온 건 문제가 된다. 모르긴 몰라도 지방서이니 서장이 직접 나올지도 모른다. 괜히 귀찮은 일을 만들고 싶진 않다.
김호철 계장은 주춤거리며 물러나다 순성이와 눈을 마주치곤 눈짓으로 수많은 말을 던진다. 아마 잘 모시라는 거겠지. 그래야 이 일이 조용히 넘어가질 테니까.
순성이는 로봇이 걸어 다니듯 잔뜩 굳은 자세로 우릴 집으로 안내했다.
“여기입니다, 형님.”
대문을 열어주는 순성이. 나는 손가락으로 놈의 이마를 튕겼다.
“나 네 형님 아니다.”
“아야. 죄송합니다. 뭐라고 불러야 할지.”
“과장.”
“아, 예. 과장님 들어가시죠.”
굽실굽실거리는 놈. 약자에게 거들먹거리고 강자에게 굽실거리는 것이 뒷골목에서 살아온 놈 태가 난다.
상가가 여럿 있는 건물주의 집이라고 보기에는 검소한 단독 주택. 할아버지 한 분이 마당에 있는 화분에 물을 주다 우릴 보고는 와락 인상을 구긴다.
“야 이놈의 새끼야. 집에 깡패 새끼들 데려오지 말라고 했냐, 안 했냐.”
할아버지가 분무기를 들이밀며 우리에게 물을 뿌리려 하는 것을 몸으로 막은 순성이가 외쳤다.
“아버지! 아냐, 아냐! 이분들 경찰이라고!”
할아버지가 눈에 쌍심지를 켜며 분무기를 거꾸로 들고 아들 대가리를 후려친다.
“이놈의 새끼가 뭔 사고를 쳐서 집에 경찰이 와,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이 호로 새끼야!”
“악! 그런 거 아니라고! 노인네 진짜!”
현중이가 나서며 할아버지를 말린다.
“어르신, 아드님 때문에 온 게 아닙니다. 몇 가지 여쭤보려고 왔습니다.”
할아버지는 아들을 마구 때리다 멈칫하며 가자미눈으로 물었다.
“진짜 이놈이 뭐 사고 친 거 아니오?”
“예, 아닙니다.”
할아버지는 나와 현중이를 번갈아 보다 분무기를 한쪽에 던져놓았다. 죄 없는 아들을 두들겨 팬 건 별로 미안하지 않은 기색이다. 하긴 저런 놈이면 평소에 사고뭉치였을 테니 좀 맞아도 된다.
할아버지가 대청마루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앉아요.”
나와 현중이가 마루에 앉자 눈치껏 내 쪽 계급이 높다는 걸 알아낸 할아버지가 날 보며 물었다.
“그래, 뭘 물어보려고?”
나는 신분증을 마루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서문시장 금은방 거리에서 여인숙을 오래 운영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내 신분증을 힐끔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오래 했지요.”
“얼마나 하셨습니까?”
“어디 보자…… 그러니까…… 내가 군대 갔다 와서 열었으니까…… 1975년이겠네.”
1975년. 무려 50여 년 전부터 여인숙을 했다. 어쩌면 할아버지 기억 속에 미카엘 신부나 그때 있었던 사건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
나는 할아버지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여인숙 운영 중에 기억에 남는 특별한 사건 같은 게 없었습니까?”
할아버지가 날 가만히 바라본다. 그러다 헛웃음을 짓는다.
“아니, 경찰 양반. 질문을 하려면 대강 언제 있었던 일인지 정해주고 물어야지. 50년 운영하면서 험한 꼴을 한두 번 겪은 것도 아니고. 그렇게 물으면 내가 어떻게 대답을 하나?”
“…….”
하, 나도 알아요 할아버지.
하지만 아는 게 없습니다. 무슨 일인지, 언제 벌어진 일인지. 아무것도 모르니 이렇게 질문할 수밖에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