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억 290화
20. vetus silentium(오래된 침묵)(14)
“과장님? 이거 어디다 둘까요?”
관우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나는 기억을 읽었던 같은 장소이지만 다른 시간에서 깨어났다.
잠시 멍하게 초점 잃은 눈으로 마당을 바라보는 내게 다가온 관우가 물었다.
“과장님, 괜찮으세요?”
“아, 어? 뭐라고 했지?”
“이거 어디 둘까요?”
관우 손에 오래된 전화기가 들려 있다.
“요즘 레트로가 유행 아닙니까, 이 정도면 좋은 인테리어 소품이 될 거 같은데. 버리기 아깝잖아요?”
누가 버린다고 했냐, 그거 우리 엄마가 쓰던 전화기다.
“줘, 가구 들어오면 잘 보이는 곳에 두게.”
“예. 근데 배고프네요. 이사 날은 자장면인데. 어때요, 시킬까요?”
“그래.”
“제가 쏩니다!”
“네가 왜 쏴?”
“그냥 한번 사고 싶어서, 히히.”
매번 얻어먹는 것이 미안했던 모양이다. 동생은 얻어먹어도 된다고 만류하려고 하다 예전에 강혁 아저씨가 나이 많다고 무조건 계산하려 들면 동생들이 부담되어 잘 안 만나려고 하니 괜히 꼰대 짓 하지 말고 사주면 감사히 먹으라고 했던 말이 떠올라 그만뒀다.
“그래, 사주면 나야 고맙지.”
“히히! 시키겠습니다!”
배달 앱을 켜는 관우가 물었다.
“여기 주소가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도봉로123길 39-158.”
“오케이, 보자 보자…… 어디가 맛있나? 고수는 리뷰를 보는 법!”
자장면 하나도 허투루 시키지 않는 관우는 배달 앱을 실행해 리뷰를 확인하며 신중히 고른다. 매번 햄버거만 먹던 녀석이니 다른 걸 먹을 기회가 별로 없어 그런 모양이다.
나는 마당을 바라보며 방금 읽은 기억에 대해 생각했다.
‘도봉로123길 39-158. 신주소다. 구주소는…….’
강북구 쌍문동 390-1589. 기억 속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가 말했던 그 주소. 바로 이곳이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사건을 정리했다.
‘아버지는 대구에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다. 범인이 자신을 목격한 아버지를 쫓아왔고 전화를 걸고 있는 아버지를 공격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난 후 주소를 말했고.’
지금은 카드 지갑이나 핸드폰만 덜렁 들고 다녀도 불편할 것이 없는 시대지만 그 시절 사람들은 꼭 지갑에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다녔고, 그곳에는 주소가 써 있었다. 범인은 쓰러진 아버지의 지갑을 뒤져 주소를 알아낸 것이다.
‘처음 읽었던 기억 속에서 어머니는 쫓기고 있었다.’
대구에서 아버지를 해친 범인이 주소를 보고 서울에 올라와 어머니까지 해한 것이다. 왜? 아버지가 전화하고 있는 것을 보았으니까.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니 애초부터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아버지가 저녁을 먹기 전에 전화한 곳은 여인숙. 하지만 늦은 밤에 전화를 한 건 공중전화 같았다.’
여인숙 내부에 있는 전화기는 주인집 전화다. 주인 할아버지 말로는 아버지가 오백 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전화를 사용했다고 했다.
만약 여인숙에서 일이 벌어졌다면 당연히 손님들이나 주인 할아버지가 알고 있었을 것이지만 아무도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인적이 드문 공중전화일 확률이 높다.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티를 낼 수 없지만 지금 나는 무척 마음이 흔들린다.
그동안 수없이 보아왔던 범죄자의 기억과 피해자의 기억들. 하지만 이번에는 내 부모님이 피해자인 사건의 기억이다.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자장면을 시키던 관우가 핸드폰을 툭 던지며 말했다.
“시켰습니다, 와, 빨리도 오네요. 아직 점심 시간 안 지나서 그런가? 20분 내에 온대요.”
“시간도 나와?”
“예, 배달하는 사람이 음식 픽업하면 알려주기도 해요. 세상 좋아졌죠?”
관우가 마루에 벌렁 드러눕는다.
“연주가 미카엘 신부 신상 털고 있던데. 과장님이 시키신 겁니까?”
“응?”
관우가 씩 웃으며 누운 채로 다리를 꼰다.
“아닌가 보네요. 하긴 연주가 눈치 하나는 진짜 타고났으니까 알아서 움직이고 있나 봅니다.”
그랬구나. 연주 녀석. 눈치 빠르게 알아서 움직여 주고 있었구나. 안 그래도 청에 복귀하면 뒷조사를 시키려고 했는데 잘됐다.
관우 말처럼 자장면은 20분도 안 되어 도착했다. 아직 식탁도 없어 마룻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먹었지만 꽤 잘하는 집인지 맛이 좋다.
관우가 입가에 자장 소스를 잔뜩 묻힌 채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미카엘 신부 도착하려면 두 시간쯤 남았는데. 차로 이동하실 겁니까?”
“아니, 여기서 걸어서 10분 거리야.”
“오, 가까워서 좋네요. 소화도 시킬 겸 슬슬 걸어가죠, 그럼.”
걸어서 10분. 어머니는 어린 나를 안고 걸어서 10분 거리를 뛰었다. 뛰어서 3분이면 가는 거리지만 조깅을 하듯 뛰는 것과 살인자에게 쫓기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경찰 일을 하며 단련되어 있던 어머니가 고작 3분을 뛰고 그리 숨이 턱까지 찼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니, 이건 잘못된 추론일 수 있다. 어머니의 목적지는 성당이 아니라 단순히 놈에게서 도망치는 것이었을 테니까.
직선거리로 뛰지 않고 이리저리 놈을 피해 달아나다 한참 후에 성당 앞에 도착했을 수도 있다.
과연 그날 아버지가 목격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이었기에 범인이 서울까지 올라와 어머니까지 죽이려 한 걸까?
자장면을 먹다 말고 젓가락을 내려놓은 나는 머리가 복잡해 입맛이 돌지 않았다.
관우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물었다.
“입에 안 맞으세요? 맛집이라고 해서 시킨 건데.”
“아? 아, 그런 게 아니고. 아침을 많이 먹었더니 배가 부르네.”
“오, 그래요? 그럼 남은 거 제가 먹어도 돼요?”
“먹던 건데?”
“괜찮습니다, 저 연주가 먹다 남긴 과자 매일 훔쳐 먹는데요, 뭘. 히히.”
넉살 좋게 내 자장면까지 가져가서 먹어대는 관우. 나는 녀석이 잘 먹는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때 마당 밖으로 보이는 벽 위로 뭔가가 쑥 올라왔다 사라진다.
“어?”
또다시 뭔가 쑥 올라온다. 사람의 머리다.
“과장님!”
관우가 자장면을 입에 물고 밖을 바라본다.
“이거 연주 목소리 아닙니까?”
또다시 벽 위로 연주 머리가 올라온다. 밖에서 깡총깡총 뛰고 있는 모양이다.
나가서 문을 열어주자, 연주와 오진규가 함께 와 있는 것이 보인다. 연주가 대문 밖의 벨을 누르며 말했다.
“벨이 고장 났나 봐요. 눌러도 소리가 안 나네. 혹시 남의 집인가 해서 안 좀 살피느라 벽 잡고 뛰었어요, 히히.”
“어, 들어와. 선배님도 오셨습니까?”
오진규가 세제를 내밀며 웃었다.
“이사 축하드립니다, 과장님.”
“아, 뭘 이런 걸 다. 들어오세요.”
“예, 성당에서 다 모일 것 같아서 미리 왔습니다. 같이 이동하시죠.”
“예, 그러시죠. 식사는 하셨습니까?”
“예, 오는 길에 연주와 순댓국 한 사발 먹고 왔습니다. 킁킁, 그래도 자장면 냄새는 좋네요.”
관우가 남은 자장면을 마구 입에 쑤셔 넣은 뒤 구석에 치우고 오진규를 보고 꾸벅 고개를 숙인다.
연주와 오진규에게 아무것도 없는 집을 대충 구경시켜 준 후 마루에 앉자, 연주가 수첩을 꺼내며 말했다.
“미카엘 신부에 대해 조사를 좀 했는데 특이 사항이 있습니다, 과장님.”
“특이 사항?”
“네.”
연주가 수첩 사이에 끼워 둔 신문 스크랩을 꺼내준다.
“1983년에 일어난 사건의 기사입니다.”
오진규는 이미 연주에게 전달받았는지 별로 궁금한 기색이 없다. 대신 아무것도 모르는 관우가 신문 스크랩을 받아 들고 의문스러운 얼굴이 된다.
“일가족 변사사건?”
연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1983년 9월 21일. 낙동강 강가에서 시신 한 구가 발견됐습니다. 오후 3시 20분경 낚시꾼이 수풀에 뒤엉켜 있는 시신을 발견해 신고, 옷 속에서 신분증이 발견되었으며 신원 확인 결과 울산의 빌라에 거주 중인 구 씨였습니다.”
나는 이게 미카엘 신부와 무슨 관계가 있는 사건인가 생각해 보며 물었다.
“사인은?”
“익사였고, 외상 흔적은 없었습니다.”
“계속해.”
“시신의 신원이 확인된 다음 날 구 씨가 살던 빌라를 찾은 경찰은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나오는 사람이 없어서 결국 열쇠 업자를 섭외해 강제로 문을 따고 들어갔는데 오랫동안 집이 비어 있었던 것 같았답니다. 집을 조사하다 보니 강한 악취가 났고, 악취를 따라가 보니 베란다에 있는 붙박이장이 원인으로 보였답니다. 투명 테이프로 다섯 겹이나 칭칭 감아놓은 것을 본 형사가 칼로 장을 열어보니 사과 박스 두 배 정도의 커다란 박스가 놓여 있었고, 거기서 썩은 냄새가 강하게 났답니다.”
관우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시체야?”
연주가 고개를 끄덕인다.
“응, 확인해 보니 악취와 관련된 주변 민원이 접수된 것이 무려 3년 전부터였다고 해.”
관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3년 전에 살해당했다고? 아니, 주택 밀집 지역에서 시신이 썩고 있는데 3년이나 냄새를 참았다는 게 말이 돼? 주변 이웃들이 어떻게 참고 살았지?”
“당시 피해자들이 살던 빌라는 한 층에 한 개 호만 살던 구조였다고 해. 5층은 맨 꼭대기 층이라 냄새들의 상당 부분이 위로 퍼져 올라갔어.”
“아무리 그래도…… 하긴 민원이 지속적으로 들어왔다니까 이웃들도 냄새의 존재는 알았겠네. 와, 대단하다 대한민국. 아무리 80년대 초라고 해도 시민 민원을 3년이나 해결 안 해주다니.”
“79년에 대통령 암살되고 정권 바뀌면서 난리가 났었던 시기이니 그럴 수 있었겠지.”
“그래서 어떻게 됐어?”
연주가 다시 날 바라보며 말했다.
“상자에서 살점이 하나도 남지 않은 백골 사체가 나왔습니다. 9월인데 백골이 입고 있던 옷은 한겨울 옷이었고.
“시신 신원은?”
“해당 집에 살고 있던 조 씨였습니다. 당시 나이 59세였고, 익사체로 발견된 구 씨의 아내였습니다.”
“다른 가족은?”
“아들과 딸이 있었습니다.”
관우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응? 이상하네. 엄마가 3년 전에 살해당해 백골이 되고, 아빠는 강가에서 익사체로 발견…… 애들이 무사할 리가 없는데 설마…… 애들도 죽었어?”
연주가 짧은 한숨을 쉬며 수첩을 바라본다.
“딸을 찾기 위해 경찰 인력이 동원되었고, 며칠 뒤 태화강에서 발견됐어.”
“하, 몇 살인데?”
“열여덟 살.”
“와씨, 어떤 개새끼가 그 어린 애를.”
“발견 당시 구더기와 벌레들 때문에 시신이 극심하게 훼손된 상태였고, 물속에 장시간 방치되어 있던 시신이라 조사가 쉽지 않았어. 발견한 날에 비까지 와서 부유물과 부패 체액들이 주변에 범벅이 된 상태였고.”
관우는 자기 배를 만지며 인상을 쓴다.
“방금 밥 먹었는데, 젠장.”
나는 연주를 바라보며 물었다.
“사인은?”
“익사입니다, 다만 당시가 80년대 초반이었으며 시신의 부패가 매우 심각해 사인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음.”
관우가 끼어든다.
“잠깐만, 아들도 있었다며. 걔도 죽었어?”
연주가 고개를 젓는다.
“아니, 아들은 당시 지방에 있는 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집에 없었어.”
“응? 딸이 열여덟 살이라며. 아들도 어릴 텐데 지방에 학교를 다녀? 부모가 허락을 해주나?”
“여섯 살 터울의 오빠라 나이는 성인.”
여섯 살 터울이면 오빠는 스물넷. 대학생이라면 지방에 있을 수도 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나는 어느 순간 눈썹을 꿈틀거렸다.
“낙동강에서 익사한 남자 성이 뭐라고?”
연주가 수첩을 내리며 말했다.
“구가입니다. 이름은 혁수.”
“…….”
“눈치채셨습니까?”
관우가 굳어 있는 나와 연주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왜, 뭔데요?”
연주가 관우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미카엘 신부의 본명이 구종식이야.”
관우가 멍한 얼굴이 되었다가 눈을 번쩍 뜬다.
“설마! 미카엘 신부가 그때 혼자 살아남은 아들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