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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기억-292화 (292/328)

살인의 기억 292화

20. vetus silentium(오래된 침묵)(16)

이번에는 미카엘 신부가 날 노려보며 입을 닫는다.

나는 말없이 그를 마주 노려보았다. 마지막 말을 한 것은 나이니 이 적막을 유도한 것은 내가 아니라 미카엘 신부이다.

나는 침묵으로 그를 압박하고 어색한 적막에 대한 책임은 미룰 수 있다.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지만 함께 온 동료 중 누구도 적막을 깨지 않는다. 이들은 이제 나와 한 몸이다. 내가 누군가를 의심한다는 것은 모두의 마음속에도 의심이 도사리고 있다는 뜻이다.

미카엘 신부는 한참 나를 노려보다 입을 열었다.

“이제 와 그 사건을 들추시는 겁니까?”

“단순 조사입니다. 경호 대상이 되는 사람의 인적 조사는 필수이니까.”

“……그렇군요.”

미카엘 신부는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차를 한 모금 마신다. 일그러진 그의 얼굴이 차츰 평안해지고, 천천히 입을 연다.

“부모님과 여동생이 끔찍하게 죽었습니다. 저는 한때 신을 원망한 적이 있을 만큼 충격을 받았지요.”

미카엘 신부가 슬픈 미소를 지으며 우릴 바라보았다.

“다들 경찰이시니 피해자 가족들을 만나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그들이 어떤 지옥에서 살아가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겠지요. 저도 그랬습니다. 사제의 길을 걷고 있던 제가 신을 원망할 만큼이요.”

나는 미카엘 신부를 노려보며 끼어들었다.

“그래서. 신을 원망했습니까?”

“…….”

미카엘 신부는 움직임을 멈추고 날 바라본다. 하지만 조금 전처럼 노려보는 것은 아니다. 얼굴에 떠오른 슬픔이 살짝 흔들릴 뿐이다.

“그랬다면 사제의 길을 포기했을 겁니다.”

가족에게 생긴 끔찍한 일을 딛고 일어나 신의 사제가 되었다. 그것은 아마 사제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간증거리가 될 것이다.

미카엘 신부가 묵주 팔찌를 손에 쥐고 말했다.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하느님인데 어찌하여 우리에게 질병과 노화를 주셨는지. 그것이 없어도 살아가기 힘든 것이 세상인데 어찌 이리 만드셨는지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원망을 발산하는 방법으로 기도를 택했고, 어느 날 응답을 받았습니다.”

응답? 일반적인 기도 응답이라면 좋은 방향의 제시를 받았다 생각했겠지만 나는 지금 그를 의심하고 있는 만큼 혹시 악마의 속삭임을 하느님의 응답이라 생각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응답이었습니까?”

미카엘 신부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미카엘아, 미카엘아. 네가 사람들의 구원이 되어라. 나는 그리하기 위해 세상을 만들었고 너희 사제들을 만들었다. 네가 나의 존재를 증명하라.”

위험한 발언이다. 미카엘 신부의 말에 따르자면 신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질병과 노화를 만들고 사람들이 신에게 기대게 조종했다는 뜻이 되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이곳에 나밖에 없다. 나머지는 가톨릭 교리에 대해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나는 실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톨릭 협회에서 연락은 왔습니까?”

“…….”

“징계가 있을 거라고 하던데.”

미카엘 신부가 고개를 숙인다.

“제가 작금의 토마스를 만들었다고 말한다면. 저는 그렇다고 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로 인해 벌을 받아야 한다면 그 또한 받아야 합니다.”

“…….”

뭐지? 징계를 달게 받겠다는 뜻이지 않나? 억울하다, 내가 그런 가르침을 내린 게 아니라고 변론해야 되는 것 아닌가? 다시 침묵이 흐른다.

나는 잠시 혼란스러운 생각을 접어두고 물었다.

“하나만 묻죠.”

“예, 형제님.”

“당신은 어머님이 암 질환을 앓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까?”

“…….”

미카엘 신부가 다시 고개를 떨군다. 순간 그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흩뿌려지는 것이 보인다.

“아니요, 몰랐습니다.”

“아들이 어머니의 질병을 몰랐다는 것이 가능합니까?”

“저도 사건이 일어난 후, 경찰 조사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 내 어머니께서 사제의 길을 걷고 있는 아들을 배려하고자 말을 아끼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음.”

“부모의 마음은 신이 사람을 아끼는 마음과 같습니다. 혹여 내 아들이 공부를 포기하고 자신에게 돌아와 스스로의 존재가 짐이 될까 두려우셨던 걸까요? 나는 그런 어머니가 고마우면서 원망스러웠습니다. 내게 아들로 본분을 다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고 그토록 외롭고 처참한 모습으로 발견되셨으니까요.”

“…….”

미카엘 신부가 눈물을 흘린다. 주머니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미카엘 신부. 그는 잠시 울다 목이 멘 음성으로 말했다.

“질문에 대한 답을 했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장시간 이동을 했더니 피곤하군요.”

나는 그의 말에 두말없이 일어났다. 그를 흔들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했지만 내가 지니고 있는 패가 전무한 상황이니 괜히 더 말을 섞다 내 쪽에서 허점을 노출할 수도 있기에 딱 이 정도가 좋다.

“예, 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경호 쪽은 마음 놓으시고 푹 쉬세요. 그만 가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미카엘 신부와 인사 후 밖으로 나오자 관우가 한숨을 쉬며 신부 숙소를 돌아본다.

“정말 저 사람에게 뭔가 있을까요? 제 눈에는 그저 안타까운 피해자로 보이는데.”

연주와 오진규도 방금 미카엘 신부와의 대화로 인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오진규가 물었다.

“그런데 과장님.”

“예.”

“아까 미카엘 신부에게 장진수가 죽인 사람이 아홉이라고 하셨는데. 제가 아는 과장님이 그런 실수를 할 분이 아니거든요. 혹시 무슨 의미가 있는 겁니까?”

요셉 신부와 통화를 한 건 나 혼자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정보였기에 공개하지 않았던 이야기. 나는 내 팀원들에게 요셉 신부와의 통화를 말해주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시시각각 표정이 바뀌던 연주가 물었다.

“열하나가 아니라 아홉이다. 여기서 이 숫자가 말하는 의미는 피해자의 숫자일 거다. 이 말씀이죠?”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해.”

오진규가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그럼 장진수가 죽이지 않은 나머지 둘이 누구냐. 이게 문제인데.”

오진규가 신부 숙소를 노려보며 말했다.

“만약 장진수가 맨 처음 저지른 살인인 제 부모의 사건이 스스로 저지른 사건이 아니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관우가 입술을 쭉 내밀고 말했다.

“그 사건을 통해 살인을 배웠다고 할 수 있겠죠.”

연주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미카엘은 천사의 이름입니다. 이 천사는 신의 군대를 지휘해 인간을 구원하고요. 장진수는 의부에 의한 아동 학대의 피해자였습니다. 만약 미카엘 신부가 그의 부모를 죽였다면 어린 장진수에게는 자신을 구원하러 온 신의 사자로 보였을 수도 있겠죠.”

다시 오진규가 말했다.

“그러니까, 자신을 구원하고 세상을 구원해 줄거라 믿고 따랐던 미카엘 신부가 단순한 살인자였고, 그를 찬양하며 따라 했던 자신이 희대의 연쇄살인마가 되었다는 것을 감옥에서 깨닫고 그를 처단하고자 탈옥을 감행했다? 그래야 살인의 연쇄 고리가 끝이 나니까? 음, 이건 말이 되는데.”

연주가 수첩을 꺼내 마구 앞으로 넘기며 말했다.

“장진수 사건 수사 시에도 미카엘 신부 쪽이 이상하긴 했어요.”

직접 단양에 내려가 수사했던 것은 나와 연주였기에 자세한 상황을 모르고 있던 관우가 물었다.

“뭐가 이상해? 단양은 안 갔어도 수사 보고서 작성하느라 나도 확인했는데. 신부님에게 의심할 만한 정황은 없었잖아?”

“아니, 보고서에는 안 들어갔어. 최종적으로 신부님은 모르는 사실로 나왔으니까. 장진수 본인 진술도 모두 자기 혼자 했다고 나왔으니 더 조사할 필요가 없었지만 진짜 이상하지 않아?”

“뭐가?”

연주가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당시에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 사건이 워낙 깔끔하게 끝나서 묻었는데. 전 계속 이상했어요. 장진수 놈이 인체 단백질 투명화 작업을 할 때 사용하던 액체가 보관된 장소는 미카엘 신부가 성찬 때 쓸 와인을 만들던 장소였다고요.”

관우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뭐? 보고서상으로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오크 통에서 포르말린이 발견되었다고 했는데.”

“그래, 그건 맞아. 확실히 의심할 거리는 못 되니 그냥 넘어갔는데 너무 이상한 게 그 장소는 신부님만 들어가는 곳이란 말이지? 근데 놈이 드나드는 걸 몰랐다고?”

“음.”

“미카엘 신부는 단양 성당에 두 번 근무했어. 16년 전에 근무하고 다른 곳을 돌다 몇 년 전 장진수 사건 때 다시 그곳에 있었던 거야. 주임 신부였으니 최소 10년은 거기 있었다는 소리인데 그걸 몰랐다고? 이게 가능해?”

“생각해 보니 이상하네. 근데 그렇게 말하면 그동안 단양 성당에 부임한 다른 신부님들도 의심해 봐야 하는 거 아닐까?”

“아냐, 내가 성당에서 제일 나이 많은 수녀님께 슬쩍 여쭤봤는데 원래 거기는 창고 용도로만 쓰는 곳이라고 했어. 다른 신부님들은 포도주 담글 때 야외에서 담그고 성당 뒤편에 있는 공터에 저장한다고 하더라. 오직 미카엘 신부만 혼자 거길 기어들어 가서 포도주를 만들었다고.”

당시 수사 시 나도 이 부분이 수상하긴 했다. 하지만 장진수 체포 후 워낙 깔끔하게 본인만의 범행임을 자백하는 바람에 유야무야 넘어간 부분이다.

오진규가 박수를 한번 딱 치며 말했다.

“확실히 이상하긴 하네. 하마터면 눈물 연기에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지만 제대로 조사를 해봐야 할 것 같아.”

관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한다.

“동의합니다. 너무 오래된 사건이라 조사하기 쉽지는 않겠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죠.”

세 사람이 동시에 나를 바라본다. 정식 지시를 해달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나는 세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다 말을 꺼냈다.

“세 사람에게 해야 할 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셋이 무엇이냐는 표정을 지으며 눈으로 질문을 던진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 부모님 찾았습니다.”

세 사람이 동시에 놀란다. 당장 축하의 인사를 던지려던 연주는 내 표정이 이상함을 보고 멈칫한다.

“설마…….”

나는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이미 돌아가셨어.”

“아…….”

세 사람이 입을 꾹 다문다. 이 상황에 이들이 내게 뭔가 묻기는 어려울 것이다. 내 편이라 믿는 사람들이니 내가 먼저 말하는 것이 옳다.

나는 엄마가 원래 경찰이었으며, 나를 잉태한 뒤 경찰을 관두고 전업주부로 사셨다는 말과, 대구에 출장 간 아버지가 실종되고, 어머니도 실종된 후에 얼마 전 백골 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설명을 했다.

충격적인 이야기에 입을 떡 벌리고 듣고만 있는 팀원들.

오진규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일이…….”

얼마나 참담하십니까, 얼마나 힘드십니까 따위의 말은 오가지 않지만 이들이 나와 함께해 주는 것만으로 충분한 위로가 된다.

“내 어머니는 강혁 청장님의 선배 경찰이었고, 아저씨는 여태껏 사건을 포기하지 않고 혼자 비밀리에 수사하고 계셨습니다.”

관우가 놀라며 물었다.

“아니, 그럼 청장님은 과장님이 자기 선배 아들이란 걸 알고 있었다는 겁니까?”

“아니, 모르고 계셨다. 지금은 알게 되셨고.”

“와, 엄청난 우연이네요.”

나는 세 사람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제 나는 부모님 사건의 자료가 보관된 방으로 여러분을 데려갈 겁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관우와 연주가 당연하다는 듯 손을 번쩍 든다.

“당연합니다!”

무턱대고 도와주겠다고 하는 연주와 관우와는 달리 오진규는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장진수, 미카엘 신부 사건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에서 과장님 부모님 사건에 대해 언급하신 이유가 있겠죠?”

연주와 관우는 오진규의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뜨며 날 바라본다.

나는 가만히 미카엘 신부가 있는 숙소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내 부모님 사건이 어떤 식으로든 미카엘 신부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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